[김필남의 영화세상] 반짝거리지만 충동적인 아이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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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일본 소마이 신지 감독의 '여름정원'
죽음 궁금한 아이들과 노인의 우정
1990년대 서사의 유효함 확인시켜

'여름정원' 스틸컷. 에이유앤씨 제공 '여름정원' 스틸컷. 에이유앤씨 제공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들이 존경을 보내는 한 사람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내가 넘어서고 싶었던 단 한 명의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는 “일본 영화사의 마지막 거장일지도 모른다”고 말했으며, 하마구치 류스케는 “어떤 일본 영화감독도 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은 채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는 바로 1980-90년대 일본영화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소마이 신지 감독이다. 2001년 세상을 떠난 감독은 롱테이크 중심의 독자적인 연출 방식,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으며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등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구축하며, 일본영화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개봉하지 않았기에 이름이 덜 알려져 있다가, 작년 ‘태풍클럽’(1985)이 정식 개봉하면서 시네필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최근 과거 작품들이 4K로 디지털 복원되면서 다시 개봉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데, 소마이 신지의 영화도 이 흐름에 맞춰 한국에서 연이어 개봉했다. ‘이사’(1993)와 ‘여름정원’(1994)은 한 주 차이를 두고 개봉을 했는데 공통점이 많다. 모두 초등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일본 간사이 지방의 여름을 배경으로 촬영됐다. 먼저 부모의 이혼을 마주하면서 주인공 소녀 ‘렌’이 겪게 되는 혼란과 방황을 그리는 ‘이사’는 절제된 연출력과 개성 있는 인물들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는 여름이 주는 생동감과 소녀의 방황과 모험이 주된 내용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신비로운 느낌이 강해서 다소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름정원’의 경우 좀 더 대중적인 작품인데 아이들과 노인의 우정을 따듯한 시선으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정원’은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사흘 만에 등교한 야마시타에게 친구들이 ‘죽음’에 대해 질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이들이 심각하게 죽음을 논의하는 장면은 생경하면서도 한편으로 위험해 보인다. 언제나 함께 다니는 삼총사 안경잡이 ‘카와베’, 스모 선수 ‘야마시타’, 말라깽이 ‘키야마’는 죽음을 염탐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그 대상자를 동네에서 혼자 사는 노인으로 정한다.

영화 속 아이들의 세상은 어른이 생각하는 것만큼 순수하지 않다. 놀라울 정도로 도발적이고, 충동적이며 한순간도 멈추어 있지 않다. 내리쬐는 햇빛 속에서 갑작스레 퍼붓는 소나기처럼 아이들의 세계는 예측불가능하다. 먼저 아이들이 관찰하는 노인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집에 혼자 산다. 종일 누워서 TV를 보거나 먹거리를 사러 나가는 일 말고는 딱히 하는 일이 없는 노인은 아이들의 말처럼 내일 죽어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우연한 계기로 아이들이 허물어져가는 노인의 집을 고쳐주면서 그들의 관계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노인의 집 지붕에 색을 입히고, 집에 쌓여있던 폐품을 버리는데 이는 마치 노인의 삶을 어루만지는 듯 보이면서 한편으론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 즐거워 보인다. 잡초로 무성하던 정원에 꽃씨를 뿌린 아이들은 꽃이 어서 피길 바라는 마음을 안고 노인의 집으로 달려간다. 노인을 미행하던 때는 노인의 죽음이 궁금했지만, 노인의 일상으로 들어온 아이들은 노인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여름정원’은 아이들과 노인이 친구가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만 설명할 수 없다. 태평양전쟁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하는 노인의 이야기는 끔찍한 역사와 조우하고, 부모의 이혼으로 슬픔을 삭이는 아이는 가족 해체가 낳는 비극을 상상케 한다. 아이들의 질문으로 돌아와 죽음은 두렵고 회피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것처럼 당연한 이치임을 느끼게 만든다. 그때 아이들도 비로소 한 뼘 성장한다. 여전히 유효한 서사와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소마이 신지의 영화가 왜 지금 사랑받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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