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충만하게 존재하기
서정아 소설가
물질이 아닌 감정과 경험을 나누며
아름다운 시간 자체에 감동한다는 것
이 가을, 충만하게 존재하는 시간으로
지금 나는 공유 오피스의 커다랗고 단단한 책상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창밖으로는 투명하게 푸른 가을 하늘과 그 사이를 돛단배처럼 느리게 유영하는 흰 구름이 보이고, 천장 스피커에서는 귀에 익은 경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아 있는 낯선 이들의 키보드 소리가 듣기 좋다. 공간의 호사스러움과 창작의 결과물은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공공도서관에서 글쓰기 적당한 자리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고 집의 어수선한 식탁도 흔들거리는 좌식 테이블도 일시적으로나마 안녕이다. 공유란 좋은 것이구나 생각하다가, 세상의 좋은 모든 것들을 다 같이 공유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공유’란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뜻인데, 사실 근래의 공유 경제 관점에서 쓰이는 ‘공유’라는 말은 공동 소유의 개념에서 많이 멀어진 것 같다. 공유 숙소, 공유 차량, 공유 자전거, 공유 오피스…. 대체로 개인이 소유한 자원을 불특정 다수에게 단기간 빌려주는 대여업이라고 해야 할까. 공급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가진 자원으로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으니 좋고, 수요자 입장에서는 개개인이 구매하거나 장기간 계약을 하기에 부담스러운 자원을 일시적으로 빌려 쓸 수 있으니 좋은 일 같다. 게다가 기존의 자원을 돌려쓰는 일이니 친환경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용자가 지급해야 하는 비용이 생각보다 저렴하지는 않다. 단어의 의미를 늘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의 ‘공유’라는 말은 좀 기만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결국은 자본을 가진 사람이 그 자본을 이용해 돈을 벌어보겠다는 거 아닌지, 정말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무료로 나누거나 혹은 최소한의 관리비만 받아야 되는 거 아닌지, 다소 삐딱한 생각.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정당한 방법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일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팬데믹 이후로 이용자 수가 급격히 줄긴 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여행자들 사이에서 꽤 활성화되었던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었다. 세계 각지의 여행자들이 서로의 집을 공유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사이트인데, 여기에서의 공유는 꽤 순수한 의미에서의 나눔이었다. 내 집의 작은 여유 공간을 여행객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서로의 문화과 경험을 교류하는 것이다. 물론 그 공간을 청하는 여행자는 자신이 왜 그 집에 머물고 싶은지, 어떤 교류를 하고 싶은지 정성껏 메시지를 남겨야 한다. 그 메시지와 자기소개 글, 그리고 과거 교류했던 이들 간의 댓글 등을 보고 신뢰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한때 그 커뮤니티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 부산에 여행 온 외국인에게 누추하나마 잠자리를 제공하고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우리나라의 문화를 소개했다. 내가 속한 풍물패 연습에도 데려가고 범어사나 동래읍성에도 같이 가고 자갈치 시장에 가서 산낙지에 소주를 함께 먹기도 했다. 아무런 경제적 이익도 없고 오히려 내 시간과 공간을 무상으로 제공해야 하는 일인데 왜 그런 걸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 명확한 이유는 말하기 어려웠지만, 물질이 아닌 감정과 경험을 나눈다는 것, 그 시간 자체에 감동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사실이 좋았던 것 같다. 물론 내가 타국에 여행을 갔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 커뮤니티에서 만난 친구들의 도움으로 현지인들의 삶을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고 작은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대단한 물적 자본은 없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어떤 물질과도 바꿀 수 없는 진심이 있고, 그 진심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짧고도 아름다운 이 계절, 매 순간 흘러가는 가을의 시간을 붙들어 둘 수도 소유할 수도 없지만 우리는 충만함으로 함께 존재할 수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