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돼지국밥집 차린 이유는?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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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의료재단 좋은병원들 구정회 회장은 달변에 관심사가 다양했다. 은성의료재단 좋은병원들 구정회 회장은 달변에 관심사가 다양했다.

“살아 있으니 밥을 먹을 수 있다. 밥 먹는 일 자체가 복이다. 맛있게 먹을 수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우리가 나쁜 감정을 표현할 때 ‘밥맛이 없다’라고 하지 않나. 밥맛이 없으면 인생 조지는 거다. 밥을 맛있게 먹는 순간이 인생 최고의 클라이맥스다.”

밥을 연구한 ‘밥 철학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성의료재단 좋은병원들 구정회 회장은 소문대로 달변이었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 “오만 데 관심이 많다”라고 자인할 정도로 관심사 또한 다양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여전히 직원들과 함께 책을 읽고, 독서토론회를 즐긴다고 했다. 부산지식서비스융합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알고 보니 부산대 학보사 기자 출신에 부대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에서 소설로 수상한 경력도 있었다. 24일에는 대한적십자사 부산지사 제32대 회장에 취임하는 액티브 시니어다.


‘식복’의 돼지국밥 한상 차림. ‘식복’의 돼지국밥 한상 차림.

기자가 구 회장을 만난 이유는 뜬금없게도 돼지국밥 때문이었다. 좋은문화병원을 비롯한 5개의 종합병원과 7개의 요양병원 등 12개의 네트워크 병원을 운영하는 그가 돼지국밥집을 차렸다는 소문이 퍼져서였다. 지난 9월 말에 문을 연 부산 수영구 남천동의 돼지국밥집 ‘식복(대표 이정근)’에서 만난 구 회장은 수육과 돼지국밥을 앞에 두고 그 사연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원래부터 식당 주인입니다.”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설명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구 회장이 운영하는 병원 12곳의 환자를 합치면 3000명가량이 된다. 삼시세끼씩 해서 매일 1만 그릇씩 음식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병원 밥이라 재료 기준이 엄격하고, 위생 기준은 높고, 일제 배식으로 효율은 떨어지는 악조건 속에서 식당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소문의 주인공이 앞에 놓인 수육을 한 점 집어 들었다. 구 회장은 “수육은 식감이 중요하다. 집에서 수육을 하면 이런 맛이 나지 않는 이유는 숙성을 안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돼지고기를 숙성 냉장고에 사흘간 둔 다음에 만들어 쫄깃쫄깃한 맛이 살아난다. 한정식집에서 먹는 돼지고기가 퍼석퍼석한 이유도 전처리를 안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음식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 인상적이었다. 가게 비법까지 거침없이 털어놓는 화법에선 성격이 드러났다.

평생 의술만 펼치던 그가 돼지국밥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수육이었다. 병원 장례식장은 수육을 많이 소비한다. 그동안 수육을 납품받았는데 그 품질이 처음 들어올 때와 자꾸 달라지는 문제가 도저히 고쳐지지 않았다. 수육의 품질이 변하면 병원의 신뢰 또한 손상이 된다고 생각해, 아예 수육을 직접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육의 품질을 높이는 방법은 간단했다. 좋은 고기, 좀 비싼 고기를 쓰니 문제가 바로 해결됐다.

부산 대표 음식 돼지국밥은 이제는 외국인이 즐겨 찾는 관광상품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식복의 개업에는 이 돼지국밥에 대한 평소의 불만이 크게 작용했다. 의사이자 경영자인 그가 보기에 위생상 불결하고, 서비스 철학이 없고, 인공 조미료를 퍼넣는 역전 식당 수준의 돼지국밥집이 너무 많았다. 부산시도 모범적인 돼지국밥집을 가려서 격려하지 않는 점이 아쉬웠다.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그가 수육 다음으로 육수 만들기에 들어갔다. 사골을 고아 뻑뻑하게 만든 뒤 인공 조미료를 퍼넣는 기존 돼지국밥 방식은 처음부터 경계의 대상이었다. 조리 실무자가 인공 조미료를 넣지 않고 맛을 내려면 까다롭고, 비용도 많이 든다고 반대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시원해야 하니까 무, 끈적하고 달아야 하니 대파, 잡내를 없애는 생강, 인공 조미료 대신 마늘을 넣으면 그 맛이 난다”라며 밀어붙였다.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았다. 사골은 하루 전에 물에서 우려내 잡내를 제거하고, 끓이면서 떠오르는 기름을 떠내는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했다. 그렇게 수육 되고 육수 되니, 대중들한테 우리가 양질의 돼지국밥을 선보이자고 의견이 모였다.


식복의 주방을 책임진 이동석 조리기능장. 식복의 주방을 책임진 이동석 조리기능장.

‘부산의 정을 담은, 식복 돼지국밥’이라고 쓴 가게 간판에는 부산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수준급 돼지국밥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실제로 식복의 돼지국밥은 국내산 암퇘지 사골을 12시간 우려 진한 풍미가 나고, 일체의 인공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세제나 이물질을 흡수하지 않는 ‘무흡수 뚝배기’를 사용하는 이유도 건강을 생각해서다. 주방은 조리기능장으로 2002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팀 전속 요리사였던 이동석 총괄 셰프에게 맡겼다. 이렇게 정성이 든 돼지국밥은 때깔부터가 다르다. 만 원짜리 돼지국밥 한 그릇을 먹고 난 손님들은 대접받고 가는 느낌이 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항아리 바베큐. 항아리 바베큐.

구 회장은 돼지국밥과 병원을 연관시켜 다소 의외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돼지국밥집에서는 만 원을 위해서 돼지고기를 삶고, 썰고, 서빙한다. 병원은 이제 너무 독점적인 권한, 지위, 습관, 정서를 가진 게 아닌가 싶다. 서민들이 만 원을 벌기 위해서 어떤 수고를 하는지 알면 병원에서 환자한테 비싼 MRI 비용을 받을 때도 좀 겸허한 마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돼지국밥집은 나한테는 인생의 실험적인 선택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선택에 대해 누군가 입을 댈지도 모르지만, 자영업에 대한 생각도 명확하게 밝혔다.

그는 “우리나라에는 자영업자가 너무 많다. 할 게 없어 음식점 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할 일이 없어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의사도 편해지려고 개업하면 일이 안 된다. 의사의 개업은 자기 인생 최후이자 최선의 선택이어야 한다. 하다가 안 되면 복귀하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라고 일갈했다. 식복에는 ‘배가 고파서, 밥을 맛있게 먹고 싶어서 밥집에 오는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는 그의 철학이 들어 있다. 식복의 대표가 아니라, 컨설턴트를 자임한 그는 낮은 수익성을 높이는 방안들에 대해 오늘도 고민 중이다.


모듬 수육. 모듬 수육.

구 회장의 식복(食福)은 어릴 적 성장 환경에서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경남 함안 군북 출신으로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 정착했다. 부모는 부산으로 공부하러 오는 친척 아이들을 다 받아들였다고 한다. 많은 친척과 한집에서 어울려 살아 아침이면 도시락이 열몇 개가 될 정도였다. 우리 식구끼리만 밥을 먹어 본 적이 없어 어려서는 원망스러웠지만, 커서 보니 그게 너무나 고맙게 여겨졌단다. 일찍 철이 들고 삶을 풍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꾸라지가 든 어항에 천적인 메기를 한 마리 넣으면, 미꾸라지들이 메기를 피해 다니며 더 활발하고 건강해진다고 한다. 어쩌면 ‘식복’이 부산 돼지국밥계의 메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글·사진=박종호 기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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