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누명 벗기고 우주여행 떠나고… 보기보다 큰 '곤충의 힘'

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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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정복자들/에리카 맥앨리스터·에이드리언 워시번


노랑초파리. 곰출판 제공 노랑초파리. 곰출판 제공

2001년 7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한 건물 주차장 쓰레기통 옆에서 신체가 심하게 훼손된 노숙자 시신이 발견됐다. 당시 18세 여성 커스틴 로바토가 1급 살인혐의로 40~10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물적 증거나 목격자는 없었다.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서 큰 논란이 됐다. 법률보호 단체를 비롯해 지지자들이 로바토의 무죄를 변호하고 나섰다. 로바토는 결국 2018년 초 재심을 통해 교도소에서 풀려났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재심에 제출된 핵심 증거는 피해자 시신에 검정파리의 알, 즉 구더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파리 구더기는 외부에 노출된 시신에 꽤 빠르게 침투한다. 검정파리는 낮에 활동하고 밤에 움직임을 멈춘다. 7월 무더위 도심에서 오후 10시에 발견된 시신에 파리 구더기가 없었다는 점은 살인이 밤에 범해졌다는 것을 대변한다. 사건 당일 저녁 시간대 로바토는 확실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었다. 더 이상 계속 감옥에 갇혀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법곤충학자, 정확하게는 검정파리가 억울한 수감자의 무죄를 증명한 사례다.

<작은 정복자들>은 작고 하찮게 보이는 곤충이 사실은 우리 삶에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여러 사례로 보여준다.

인류보다 먼저 우주로 날아간 생명체 역시 곤충이다. 노랑초파리는 1947년 2월 미국 뉴멕시코주의 미사일 기지에서 발사된 V2 로켓에 탑승해 지상 109km 상공을 비행했다. 국제항공연맹은 지상 100km를 지구 대기권과 우주의 경계로 정의한다. 지구 최초의 ‘우주비행사’는 초파리였던 셈이다. 몸길이가 고작 3mm에 불과한 노랑초파리는 어떻게 인간을 대신한 선발대로 나서게 됐을까? 6개의 다리에 별난 눈을 가지고 날개까지 짊어진 외형은 사람과 달라도 너무나 다른데 말이다. 하지만 유전학적으로는 인간과 꽤 가까운 사이라고 한다. 겉모습이 아니라 속을 보라는 게 노랑초파리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작은 정복자들>에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곤충에게 영감받은 과학적 성과들이 가득하다. 재사용이 가능한 의료용 주사기 개발에 응용되는 나방의 천연 빨대, 탄소 배출을 줄이는 대체 식량으로 주목받는 아메리카동애등에, 인명 구조에 투입되는 초소형 로봇 개발에 영감을 준 꿀벌의 지능과 비행 능력, 어느 각도에서나 반짝이는 모르포나비 날개 구조에서 착안해 푸른색만 반짝이는 차량 도색 등 흥미로운 사례들이 이어진다.

곤충은 약 3억 년 전 지구에 등장한 이래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개체로 살아남은 동물군이다. 볼펜 점보다 작은 0.127mm부터 55cm가 넘는 대벌렛과에 이르기까지 크기도 생김새도 다양하다. 종 수는 보수적으로 잡아도 100만 종. 실제로는 500만에서 22억 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책 제목 <작은 정복자들>은 전혀 억지나 과장으로 보이지 않는다. 참고로 사람이 속한 포유류는 6500여 종이다. 지구의 주인은 사람이라고 주장하려면 곤충의 눈치를 봐야 할 것 같다.

영국 런던자연사박물관 수석 큐레이터로 일하는 곤충학자가 쓴 책답게 앞선 학자들의 주요한 발견이나 성과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90여 장의 진귀한 사진은 자연사박물관 전시관 앞에 선 듯 눈길을 사로잡는다. 에리카 맥앨리스터·에이드리언 워시번 지음/김아림 옮김/곰출판/340쪽/2만 3000원.


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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