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생존과 돌봄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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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핏줄만으로 돌봄을 감당할 수 있나?
여성영화제 상영 황슬기 감독 '홍이'
미혼 비정규직 노동자의 일상 통해
여성들이 짊어진 삶 서늘하게 새겨

황슬기 감독의 '홍이' 스틸컷. 에무필름즈 제공 황슬기 감독의 '홍이' 스틸컷. 에무필름즈 제공

나는 작은 영화들을 좋아한다. 여기서 ‘작다’는 말은 단순히 제작 규모를 뜻하지 않는다. 제작비도 관객들의 관심도 상대적으로 낮은 작품들을 뜻한다. 10월 말부터 부산에서는 작은 영화들로 채워진 영화 축제들이 연이어 개최되었다. 부산평화영화제와 부산여성영화제는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다루는 주제의 깊이와 절실함은 결코 작지 않다. 오히려 인파가 덜 붐비는 곳에서 오롯이 영화의 메시지와 마주하는 내밀하고 소중한 발견의 기회를 선사한다.

부산 여성영화제에서 만난 ‘홍이’ 역시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영화이나 진정성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모두에게 선한 미소를 건네지만, 그 미소 뒤편에 불안과 빚의 그림자를 숨긴 채 살아가는 ‘이홍’. 서른을 훌쩍 넘긴 그녀는 불안정한 노동을 전전하며 고군분투하지만,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치매 초기 증세를 앓는 엄마 ‘서희’를 집으로 모셔 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녀가 서희를 데려오는 동기는 따뜻한 혈육의 정이 아니다. 자신의 경제적 위기를 해소해 줄 금전 때문이었다. 간병을 쉽게 여겼던 홍이는 아픈 이를 보살피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곧 깨닫는다. 게다가 서희의 증세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본래 평탄하지 않았던 모녀의 관계는 더욱 냉랭해진다.

황슬기 감독의 ‘홍이’는 생존과 돌봄의 문제를 홍이를 통해 바라보고 있다. 이때 감독은 홍이의 상황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으며, 한국 사회 여성들이 짊어진 무게를 서늘하게 새겨 넣는다. 결국 영화는 미혼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과연 간병을 감당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한글을 가르치는 강사 일과 거친 건설 현장 노동을 오가는 홍이는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불안정한 처지에 놓여 있다. 여유가 생기면 이력서를 쓰며 불안을 지우고자 애쓰고, 또 남들처럼 연애를 꿈꿔보기도 하지만 서희를 돌보기 시작한 이후 개인적인 시간을 갖는 것도 사치가 되었다.

홍이는 일과 연애, 간병을 함께 꾸려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서희가 집으로 온 뒤 홍이의 삶은 막다른 길에 이른다. 그녀는 분명 엄마를 보살피려 했다. 하지만 간병의 책임은 이내 그녀의 삶을 짓누르는 압력으로 바뀐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직 오늘을 살아내는 절박함뿐이다. 엄마의 돈을 훔치고 썸남에게 거짓말을 하는 홍이의 행동은 분명 비도덕적이다. 그러나 이는 그녀가 궁지에서 필사적으로 생존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일 정도다.

영화는 핏줄만으로는 돌봄 문제를 감당할 수 없다는 진실을 고한다. 전통적인 가족 서사처럼 고난 끝에 사랑과 희생으로 갈등이 봉합되는 신파는 없다. 물론 엄마와 홍이가 한강에서 치킨을 나누고, 복잡한 애증 속에서도 서툰 이해를 나누던 찰나의 따스한 순간은 있다. 이는 모녀에게 잠재되어 있던 서로를 향한 연민을 확인시켜 준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벽 앞에 서자 연민은 끝내 힘을 쓰지 못한다. 서희의 치매는 멈추지 않고, 홍이의 빚과 불안 역시 그대로 남아있다. 마침내 홍이는 서희와 자신을 위해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결단을 내린다.

영화는 관객에게 어설픈 위안을 건네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너의 고립과 절망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감독의 서늘하지만 다정한 시선이 존재한다. 물론 홍이의 삶은 여전히 불안할 것이고, 짊어져야 할 빚 또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전의 자신과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홍이는 엄마가 그토록 바르고 싶어 했던 붉은색 페디큐어를 자신의 발톱에 칠해 본다. 엄마를 다시 시설로 보낸 후의 죄책감과 자유로움이 뒤섞인 붉은 발톱은 그녀가 자신의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했음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이 작은 영화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홍이들’에게 짙고 깊은 울림을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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