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옳으려는 마음
김대현 연세대학교 글로벌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젠더 감수성이란 그저 남 듣기에 옳은 소리가 아니라 내 살과 내 샅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의 분별을 뜻한다. 그렇게 여기만은 들어오지 말라고 쳐놓은 사적인 굴레 안에 많은 종류의 폭력과 부정의가 일어나기에 그렇다. 내 결혼, 내 연애, 내 섹스, 내 성욕이 생각하기도 싫은 남의 사연과 남들에게서 온 착각에 연루되었다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곳에서의 일을 분별하자는 말에 대해 때로 강렬한 거부감을 갖고, 그게 왜 정녕 필요한지 스스로 납득하기를 어려워한다.
정의로우려는 마음과 분별하려는 마음은 그것을 품기 쉬워서가 아니라 품기 어렵기 때문에 중요하다. 별다른 노력 없이 쉽게 정의롭고 쉽게 분별되는 것 같으면, 그것이 실은 제대로 된 정의와 분별이 아니거나, 무언가를 놓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나를 경계하고 남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일은 마음의 품이 든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은 올바르려고 하는 마음이 지칠 때를 생각하고, 그것이 자칫 영영 올바르기를 포기하는 데로 치닫지는 않을까 근심한다.
정의와 분별이 고되고 지칠 때는, 부정의와 무분별에 영원히 머물겠노라 마음먹지 않고, 입을 다물고 손을 모은 채로 남 눈을 피해 안전한 곳에서 잠시 쉬면 된다. 무엇이 고되고 힘들다는 것은 때로 정의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증표고, 그럴 때 필요한 것은 가망없는 것으로부터의 단념이 아닌 고요한 휴식이다. 사람은 누구나 지칠 수 있고, 그 때에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 사람은 뭘 알려고 하는 때가 아니라 뭘 그만 알려고 하는 순간에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
그것이 나의 일이든 남의 일이든, 어떤 사람을 변하지 않는 존재로 명토 박는 것은 위험하다. 인생의 변화는 대체로 내 생각과 단념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남이 잘못 얘기하기를, 남이 큰 실수를 저지르기를, 그것이 영원히 남에게 매인 흉터이기를 기대한다. 공격할 명분이 있는 잘못을 공격하는 일은 지고의 재미고, 그 재미가 유지되려면 그 잘못이 변화하지 않을수록 유리하다.
그 때 포기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실수할 권리, 천천히 알아갈 권리, 남의 허물이 스스로 바로잡힐 권리, 남을 예단하는 나를 바꿀 권리. 그것들 모두가 실은 쥐고 있기 힘든 것이고, 그 사람 역시 휴식이 필요할 때 무언가를 영원히 단념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정의로운 것은 대개 피곤한 일이다. 따지자면 그렇게 살아야 할 아무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삶을 살아서 되겠느냐는 목소리가 어디서 들리는 듯했다. 평생을 가난하게 산 내 친족과 이웃의 목소리인가 싶었다. 피로에 지쳐 끝이 갈라진 음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