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큰 어른들이
왜 ‘건담’에 빠지는 걸까
지난해 여름 후쿠오카에 갔다가 실물 크기의 ‘건담’을 처음 만났다. 밤에는 건담에 불도 들어오고 머리와 손도 움직인다고 했다. 이처럼 쇼핑몰 ‘라라포트 후쿠오카’에는 건담 파크가 만들어져 후쿠오카 여행하는 재미를 더해줬다. 건담의 인기는 후쿠오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실물 크기 건담이 오다이바·요코하마 등 일본에만 3개, 중국 상하이에도 있었다.우리나라 남자 연예인 중에는 취미가 프라모델 조립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발라드 황태자 테이는 “건담 조립은 나에게 명상과 같다”라고 말할 정도로 깊은 애정을 보이고 있다. 지드래곤, 데프콘, 장우혁, 지진희 등도 유명한 프라모델 마니아다. 다 큰 어른들이 왜 애들 장난감 같은 건담에 빠지는 것일까. 건담으로 대표되는 프라모델의 세계를 들여다봤다.■‘흑역사’와 ‘나무위키’까지 건담의 힘일단 건담과 프라모델(모형)의 합성어인 ‘건프라’부터 알아야 이 세계 입문이 가능하다. 건프라는 건담 시리즈에 등장하는 로봇을 조립식 모델로 만든 제품을 말한다. 건담은 1979년 일본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47년이나 새로운 작품이 제작되고 있는 현재진행형 애니메이션 시리즈다. 세월이 흐르며 청소년기를 건담과 함께 보낸 어른 세대가 늘어나며 건프라 소비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 1980년 첫 출시된 건프라는 지금까지 누적 판매량이 무려 7억 개가 넘는다.건담은 단순한 장난감을 넘어서 수집형 취미로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특히 고가의 하이엔드 라인업은 성인들의 구매력 덕분에 출시와 동시에 품절 대란을 일으키고 있다. 2022년에는 건담 시리즈 최초의 여성 주인공 작품인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가 방영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진화한 건담이 여성과 Z세대를 공략하며 외연을 더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건담 시리즈의 연간 매출은 1조 3500억 원을 넘었다. 일본 열도의 건담이 전 세계적인 IP(지식재산권)로 성장한 것이다. 특히 건프라 수출 물량 중 30%는 한국에서 소비한다는 뉴스가 나올 정도로, 한국에서 건프라는 인기가 많다.비록 건프라 같은 장난감에는 관심이 없어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건담의 영향권 속에 들어 있다. 언제부터인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역사나 과거를 ‘흑역사’라고 부른다. 흑역사는 1999년 건담에서 처음 사용된 뒤 현재까지 한일 양쪽에서 널리 쓰이는 대표적인 단어다. 중압감을 나타내는 ‘프레셔’도 건담 파일럿이 강한 적에게 느끼는 압박감을 뜻하던 말이었다. 심지어 궁금하면 제일 먼저 찾아보는 ‘나무위키’조차 전신인 리그베다 위키가 건담 시리즈 팬 사이트였던 서브컬처 사이트 ‘NTX’로부터 독립한 것이다.■주 6.5일 일해 성덕한 ‘반도의 중년’부산에는 국내에서 프라모델을 가장 잘 만드는 모델러가 있다. ‘반도의 중년’이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박진 씨다. 박 씨는 2019년 GBWC(Gunpla Builders World Cup) 한국 예선에서 통합 1위를 차지했다. 16개국 예산 통과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일본 도쿄에서 열린 그해GBWC 결승전에서도 상위 입상했다. 지금도 국내 프라모델 콘테스트에서 매년 1위를 도맡아 한다. 해외에서도 주문 의뢰가 많아 2년 치 작업 물량이 쌓여 있는 국가대표 모델러이다.부산대 근처 박 씨의 작업실 겸 개인 갤러리로 찾아가기로 약속한 날 마음이 많이 설렜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은 각종 건담부터 시작해서 드래곤볼, 슈퍼맨, 배트맨 등 영웅들이 모여사는 별세계였다. 스타워즈에 나오는 다스 베이더는 홍콩의 독보적인 피규어 회사 핫토이와의 콜라보 작품이었다. 진열대 위의 건담은 종류가 많고 수채화 느낌을 비롯해 스타일도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애니도색’한 건담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만화를 찢고 나왔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거였다. 대체 어떻게 하면 3D 입체물이 평면의 만화처럼 보일까.앗! 그녀다. 공각기동대의 여주인공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공각기동대는 영화 매트릭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애니메이션이다. 뇌를 제외하고 모두 기계로 바꾼 그녀의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분명 모형인데 너무나도 사람 같은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천차만별인 사람 피부처럼 만드는 게 가장 어렵다고 한다. 원래는 석고 모형 같은 백색의 레진 상태였다. 이걸 깎고, 다듬고, 사포질을 거쳐 도색해서 만들었다니 혼을 갈아 넣은 셈이었다. 그냥 장난감이 아니라 아트 토이나 팝아트 작품으로 생각하면 된다는 말이 맞았다. 고가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투어 사는 이유가 있었다.박 씨는 미대를 나왔지만, 프라모델 도색을 독학으로 공부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성했다. 남에게 배우면 가르친 사람의 스타일이 어쩔 수 없이 묻어난다. 독학으로 일정 경지에 오르면 새로운 기술이 나와도 따로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찾아서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단다. 게임 캐릭터 피규어의 눈 하나 그리는 데 3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덕업일치, 성덕(성공한 덕후)한 전업 작가 모델러 박 씨의 근무시간은 놀랍게도 오전 10시부터 자정까지다. 주 6일 이상 일해 한 달에 보통 4개를 만든다. 이런 생활을 10년을 했다니…. “재능이 있어서 잘하는 게 아니고 많이 해서 실력이 붙었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박 씨는 프라모델이 오타쿠들의 서브컬처에서 양지로 나온 계기를 연예인 관찰 프로그램에서 찾았다. 연예인은 얼굴이 알려져 밖에 나가서 활동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남자 연예인 중에는 프라모델 조립이나 피규어를 수집하는 경우가 많다. 그게 ‘나 혼자 산다’ 같은 프로를 통해 외부로 드러나며 프라모델이 괜찮은 취미라는 긍정적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그는 “프라모델 조립은 1만~2만 원만 주고 사서 혼자 할 수 있는 좋은 취미다. 특히나 우울감이 몰려올 때 해 보라”라고 추천했다. 우울감은 원래 지속성이 그렇게 길지가 않지만, 그 시간을 못 넘겨서 큰 문제가 되곤 한다. 프라모델 조립은 집중해야 하기에 힘이 들고 시간도 잘 간다. 끝나고 나면 피곤해서 잠을 잘 자게 되어서 힘든 시간을 넘기기 좋다는 설명이었다. 이전에 심리치료사로 일했다는 그의 말에 믿음이 갔다. 박 씨는 아마도 혼자 살 거라는 예상과 달리 부인과 아이도 있었다. 오타쿠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 업을 부인에게 어떻게 허락받았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내가 굶기지는 않을 테니까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거 한 번만 해볼게”라고 호소했단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그에게 남은 유일한 목표는 GBWC 월드 그랑프리 세계 1등이다. 그는 “이 대회가 15년이 되어 가는데 세계 1등은 아직 국내에서 한 번도 안 나온 게 아쉽다. 꼭 1등을 해 보고 싶다. 내가 언제 다른 걸로 세계 1등을 해보겠는가”라고 말했다. 궁금해서 대회를 찾아 보니 세계 1등을 해도 상금이 없고 오로지 명예뿐이다. 사실 모형 제작이 너무 좋아 헤어지기 싫다는 그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공각기동대 그녀가 잘 있는지는 지금까지 내내 궁금하다.■건담, 그 다음 타자를 기다리며건담(건프라)의 고향은 어딜까. 일본 전체 프라모델 출하액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세계 모형의 수도’로 불리는 시즈오카다. 시즈오카는 역 앞 포토 존부터 시작해 우체통, 자판기 등을 프라모델 부품 모습의 조형물로 꾸미고 있다. 프라모델을 시즈오카의 상징이자 관광 상품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매년 5월이면 시즈오카 하비 스퀘어에서는 전 세계 모형 제작자들과 기업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세계 최대 규모 모형 박람회 ‘시즈오카 하비쇼(Hobby Show)’가 열린다. 여기서 그해의 신제품이 발표되고, 일본 국내외 일반인 모델러들의 합동 전시회도 열린다. 예술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은 이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별 볼거리가 없는 도시 시즈오카로 몰려온다.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건담이 부럽지만, 꼭 부러워만 할 일도 아니다. 한류는 이미 세계적인 인기 몰이 중이고 우리에게도 다양한 웹툰과 핑크퐁(아기상어), 뽀로로, 오징어 게임 등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단순히 하나의 콘텐츠에 머물지 않고 게임, 드라마, 굿즈 등으로 확장되는 '슈퍼 IP' 전략이 대세라고 한다. ‘원 소스 멀티 유즈’, 사방으로 치고나가는 것이다. 건담의 성공 사례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건담의 뒤를 이을 한국의 다음 타자를 기대한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무심코 넘긴 변비·심한 잠버릇… 질병 시작 신호일 수도
매년 4월 11일은 ‘세계 파킨슨병의 날’이다. 영국 의사 제임스 파킨슨의 이름을 딴 파킨슨병은 뇌의 도파민 신경세포가 서서히 소실되면서 발생하는 대표적인 신경퇴행성 질환이다. 뇌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의 결핍으로 떨림·경직·느린 움직임 등 운동 증상이 주로 나타난다. ■일부선 삼킴장애·인지기능 저하도파킨슨병 환자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국내 파킨슨병 환자 수는 2020년 12만 5927명에서 2024년 14만 3441명으로 약 13.9%가 증가했다. 2021년 기준 전 세계 파킨슨병 환자는 1177만 명에 이르고, 2050년에는 2500만 명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파킨슨병 진료 인원을 분석한 2014년 자료를 보면 성별로는 여성이 남성보다 20% 이상 많고, 연령별로는 60대 이상이 전체 환자의 90% 이상을 차지한다.좋은강안병원 신경과 김선정 과장은 “파킨슨병이 진단된 환자들은 운동 증상이 나타나기 수년 전부터 비운동 증상으로 변비, 렘수면행동장애, 주간졸림증, 후각 저하, 우울증이나 무감동 같은 정신 증상, 기립성 저혈압, 급박뇨·야뇨·빈뇨 등 소변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노화나 피로가 원인일 것으로 생각하며 무심히 넘긴 증상들이 파킨슨병의 시작이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대부분 환자는 운동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쯤에 병원을 찾는다. 처음에는 한쪽 손의 미세한 떨림이나 글씨가 작아지는 증상, 움직임이 느려지는 서동증, 표정이 없어지거나 목소리가 작아지는 증상 등이 나타난다.김 과장은 “초기에는 보행 시 한쪽 팔을 덜 흔들고 걷는 것 외에 큰 이상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라며 “병이 점차 진행할수록 발을 끌면서 종종걸음을 하고, 앞으로 넘어질 것 같으며, 발바닥이 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동결보행이 나타날 수 있다”라고 진행 과정을 설명했다.나중에는 자세 유지가 어려워져 낙상 위험도 커진다. 질환이 진행할수록 약효 지속 시간이 짧아지는 현상이나 이상운동증이 동반될 수 있고, 삼킴장애가 관찰되기도 한다. 일부 환자에서는 인지기능 저하나 환각과 같은 비운동 증상도 함께 나타난다. ■운동치료 초기부터 적극 병행해야김 과장은 손떨림이나 걸음걸이 변화를 걱정하며 진료실을 찾는 환자가 많다고 했다. 그는 “하지만 파킨슨 증상이 있다고 해서 모두 파킨슨병은 아니며, 비슷한 증상 뒤에는 서로 다른 원인이 숨어있을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항정신병약이나 위장관 약물, 항구토제 같은 약물에 의해 파킨슨 증상이 유발되기도 한다. 대뇌피질 아래 깊은 부분에 위치한 신경세포 집합체인 기저핵이나 신경 섬유가 다발로 모인 백질 부위에 반복적으로 뇌경색이 생기며 나타나는 혈관성 파킨슨증도 있다. 혈관성 파킨슨증에서는 보행 불안정 등 하체 위주 증상이 두드러진다. 심한 우울증에서도 표정이 줄고 움직임이 느려지는 증상이 나타나는데 정신과적 치료를 적절히 받으면 회복할 수 있다.파킨슨병과 파킨슨 증후군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진단은 불필요한 치료를 피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김 과장은 “파킨슨병은 특정 검사 하나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동증을 필수로 하면서 떨림이나 강직이 동반하는지를 확인한다. 증상의 진행 양상과 좌우 비대칭성, 약물 반응 등을 종합해서 평가한다.김 과장은 다른 질환을 배제하기 위해서 뇌 MRI 검사를, 도파민 신경의 기능을 확인하기 위해 핵의학 검사를 시행한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이런 영상 검사는 보조적 역할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신경과 전문의의 임상적 판단이다.파킨슨병 치료의 핵심은 도파민을 보충하거나, 도파민 작용을 강화하는 약물 치료이다. 레보도파는 1960년대에 파킨슨병 치료에 도입된 이후 현재까지 가장 효과적이고 많이 사용되는 약제로 알려져 있다. 김 과장은 “초기에는 도파민 작용제나 MAO-B 억제제 등을 단독 또는 병합해서 사용하기도 한다”라고 전했다.약물 치료와 함께 모든 단계에서 중요한 것이 운동 치료이다. 의식적인 보행 훈련, 균형 훈련 등은 증상 진행을 늦추고 신체 기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에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병행하는 것이 좋다. ■낙상 예방하는 환경 만들기 중요지난달 질병관리청 국립보건연구원이 초기 파킨슨병 환자를 3.5년간 추적 관찰한 연구 결과 발표에서 파킨슨병 환자의 시각·공간 인지능력이 먼저 저하한 경우 치매로 진행될 위험이 높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파킨슨병이 단순한 운동 질환이 아니라 뇌의 다양한 영역을 침범하는 전신적 신경퇴행성 질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김 과장은 “인지 기능 저하와 보행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라며 “운동능력이 떨어질수록 기본적 일상 수행에 영향을 주기에 파킨슨병 환자의 인지에 대한 지속적인 평가와 관리가 중요하다”라고 말했다.파킨슨병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병이 아니다. 진단이 내려지기 훨씬 이전부터 환자의 일상에서 조용히 시작된다. 후각이 둔해졌다는 느낌, 이유 없이 지속되는 변비, 꿈속에서 몸을 크게 움직이는 수면의 반복, 설명하기 어려운 우울과 불안 등이 반복된다면 파킨슨병의 초기 단계로 보고 병원을 찾아야 한다.김 과장은 “파킨슨병 환자가 삶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족과 보호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환자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일상 동작이 서툴러도 서두르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또 낙상 예방에 도움이 되는 안전한 집안 환경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식사, 약 복용 시간을 정확히 지키도록 도와주고, 함께 운동하며 환자가 꾸준히 몸을 움직이고 사회적 활동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질환 진행을 늦추는 데 도움이 된다.파킨슨병은 평생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질환이라, 보호자가 신체·심리적으로 지치지 않게 지원 서비스와 제도를 활용하는 것도 추천한다. 김 과장은 “완치가 어려운 병이지만, 증상을 잘 관찰하고 의료진에게 적절한 치료를 받고 관리한다면 오랜 기간 일상생활을 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구포국수, 면면히 이어져 온
음식이자 미래의 유산
‘구포국수’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구포국수는 우리나라에서 지명 자체로 유명 브랜드가 된 최초의 사례다. 구포국수는 국수 공장들이 대부분 구포시장 인근에 있었고, 시장 안에 국숫집들이 많아 ‘시장국수’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구포국수는 현재 체인점으로 서울 등 전국에서 찾아보기 쉬워졌지만 정작 고향에서는 위기에 처했다. 구포시장에 가면 국수 공장은 물론이고, 구포국수를 파는 음식점조차 만나기가 쉽지 않아졌다. 부산근현대역사관이 최근 발간한 학술총서 <구포와 밀의 만남, 구포국수>는 그래서 더 의미 있게 느껴진다. 이 책에 수록된 국수 공장 대표, 노동자, 요리사, 평론가 등이 밝히는 구포국수의 숨은 이야기를 옮긴다. 예로부터 국수는 장수를 상징했다. 구포국수가 국수 면처럼 길게 이어지길 바라는 같은 마음이다.■구포에는 국수 공장 하나만 남아1960~80년대 30여 개나 되었던 구포의 국수 공장이 지금은 단 한 곳만 남았다. 곽조길 대표가 운영하는 ‘구포연합국수’가 유일하다. 곽 씨의 외조모 때부터 시작한 국수 업은 그의 아들 세대까지 4대째 이어지고 있다. 외할머니의 세 딸은 곽 씨의 어머니를 비롯해 모두 국수 공장을 했다니 참으로 끈질긴 국수의 인연이다.곽 씨는 “외할머니의 여동생 부부가 제분공장을 운영했는데 그 시절에는 배를 타고 밀양, 청도, 삼랑진에서 밀을 수매해 제분했다”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여기서 한국전쟁으로 인해 구호물자인 밀가루가 보급되기 전에는 국산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밀로 만든 구포국수 맛이 궁금해진다. 1988년에 시작된 구포국수 상표권 분쟁도 곽 씨의 작은이모부가 거북표 상표권을 특허청에 등록하면서 생긴 것이었다. 오랜 소송이 끝난 몇 년 후 고 씨는 세상을 떠났고, 거북표 상표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말았다.곽 씨는 “국수의 품질은 반죽이 좌우하는데 부드러운 밀가루를 쓸수록 밀 냄새가 덜 난다”라고 털어놓았다. 밀가루에 포함된 밀 껍질의 함양인 회분이 적을수록 식감이 부드럽다. 국수는 그날 날씨에 따라서 반죽을 어떻게 치고 어떻게 건조해야 하는지가 다르다. 그는 “다른 식품은 다 급속으로 말리지만 국수는 그렇게 말리면 다 부서진다. 적어도 24시간은 건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국수를 만들기에 이상적인 환경이 있다. 비가 오고 나서 바닥이나 바깥에 습이 차 있을 때 그 바람에 국수를 말리면 최적의 국수가 된다. 습기로 인해서 국수가 자기 몸의 수분을 은근하게, 서서히 빼면서 말려가는 과정에서 국수가 야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면 식당에서 “국수가 잘 안 삶아진다”라며 말이 많다니, 국수 참 쉽지 않다.■날씨 맞추는 국수 공장 노동자58년 개띠로 김해 대동 출신인 정무수 씨는 열아홉 살에 국수 공장에 발을 들여 국수 외길 인생을 걷고 있다. 오랜 국수 공장 노동자 경험을 살려 지금은 경남 창녕에서 ‘숭어표 국수’를 운영하고 있다. 정 씨가 들어갈 당시에는 국수 공장이 신발이나 섬유 공장보다 업무 환경이 좋지는 못했지만, 숙식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좋은 일자리였다. 일이 힘든 만큼 급여가 높아 타지에서 온 사람도 많았다. 국수 공장은 보통 가족 단위로 운영되었지만 한 공장에 종업원이 한두 사람은 있었다. 숙식 환경이 좋지는 않아서 주로 공장 다락에 있는 숙소에서 생활했다.국수 공장 노동자들은 직업 특성상 별도로 배우지 않고도 하늘을 보고 일기를 잘 맞췄다. 습기가 있는 바람이 불면 비가 올 확률이 높아 생산을 중단하거나 국수를 실내에 들여놓아야 했다. 날씨가 건조한 봄에는 국수가 휘거나 잘 부러지기 때문에 암실에서 조정했다. 암실 주변으로 비닐을 감아놓고 외부 공기를 차단하면 휘어진 국수가 다시 펴졌다.구포국수 관계자들은 공통적으로 구포국수의 특징은 습기를 머금은 낙동강의 바람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정 씨는 “부산 시내 실내에서 하는 공장에서는 샛바람이 불면 ‘똥가리’가 많이 나는데, 구포는 낙동강에서 샛바람이 불어도 습도가 몰려오니까 그런 경우가 드물다. 바닷가도 괜찮다. 바닷바람이 불면 국수가 훨씬 빨리 마른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대개 실내에서 국수를 말리고, 밀폐된 저장실에서 숙성시켜 완제품이 8시간 만에 나온다. 재래식으로 숙성 시간을 거쳐서 완제품까지 24시간이 걸리면 식감이 좋아진다.■구포국수, 나의 운명이었네수많은 국숫집 가운데 단 두 곳이 구포국수와 관련해서 소개됐다. 부산 금정구 남산동의 ‘구포촌국수’와 구포시장의 ‘이원화 구포국시’가 그 주인공이다. 구포촌국수는 김해 대동면 안막마을 장터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노영자 씨가 1969년 간판도 없이 장터에서 국숫집을 열었다. 농민들이 새참으로 즐겨 먹었기에 면이 붇지 않도록 두꺼운 중면을 썼고, 육수를 따로 주전자에 담아 옮겼다. 이 방식은 일반 잔치국수와 다른 대동 안막마을 국수의 상징이 되었다. 영양사로 일하던 손녀 김향이 씨가 2000년에 가게를 물려받으며 부산 금정구 남산동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구포촌국수는 국수 단 한 가지만 고집한다. “다른 메뉴 하지 말아라. 하나만 해라. 이걸 더 잘해라”라는 노 씨의 철학에 따른 것이다. 육수에 쓰는 멸치는 4종류 이상 들어간다. 큰 멸치, 중 멸치, 작은 멸치를 섞어야 조화로운 맛이 난다. 3일 정도 물기를 빼는 전처리 과정도 필수다. 그래야 육수가 텁텁하지 않고 깔끔해진다. 육수 한 주전자가 나오기 위해 12시간을 끓인다.단골이 개발한 구포국수를 맛있게 먹는 방법이 있다. 국수는 삶은 다음에 찬물에 씻기에 면이 차갑다. 여기다 뜨거운 육수를 부으면 국물이 미지근해진다. 면 온도가 상온까지 올라오게 육수를 조금씩 부어 달래주는 게 좋다. 처음에 양념장에 비벼서 서너 젓가락 먹고 그다음에 육수를 부으면 진정한 온국수가 된다. 일단 육수부터 한 컵 따라 마시는 건 기본이다.‘이원화 구포국시’ 이원화 대표의 외할아버지는 구포국수를 만든 1세대다. 이 씨는 외가로부터 독립해 국수 공장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다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국수 공장의 자잘한 일을 도왔고 커서는 제면 공정을 맡기도 했다. 이 씨 가족은 국수 공장 일이 너무 힘들어 1980년에 공장을 닫았다. 이 씨도 수십 년간 다른 일을 하다, 운명처럼 다시 국수 가게로 돌아온 것이다.다른 공장들은 밀가루로 반죽을 해서 면을 뽑아내고 건조해 국수 완제품으로 나오는 데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씨의 아버지는 무조건 3일을 들였다. 반죽의 횟수를 늘리고 숙성 기간을 충분히 가질 때 면발이 더 쫄깃해진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이 씨의 어머니는 국수 포장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손가락 지문이 다 닳았단다. 이 씨는 자신의 국수 레시피를 주고 2006년부터 이원화 구포국시를 공급받고 있다. 완제품까지 3일의 원칙은 무조건 고수한다. 가게에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고, 국수 대신 ‘국시’를 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 씨는 “5000원짜리 국수를 팔지만 5만 원짜리 상품을 제공한다는 마음으로 한다. 손님이 현금을 주시면 거스름돈은 신권으로 나간다. 좋은 재료로 좋은 음식을 대접하자는 생각이다”라고 말했다.■국수 면발처럼 길게 이어지길최원준 음식 칼럼니스트는 ‘부산 국수 문화사’라는 칼럼을 통해 구포국수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대표적인 것이 ‘삯국수 문화’다. 광복 후 부산의 국수 공장들은 서민들이 배급받은 밀가루를 가져가면 공장에서 삯만 받고 국수를 뽑아줬다. 국수가 서민들의 허기를 달래주던 소박한 음식이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는 사례다. 또한 1960~70년대 경부선 기차 안이 구포국수를 받아 김해, 밀양, 청도, 창녕 등 영남 전역으로 팔러 나가는 ‘구포국수 아지매’들로 가득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구포국수 아지매는 ‘재첩국 아지매’, 기장에서 동해남부선 열차를 타고 먹장어를 팔러 다녔던 ‘꼼장어 아지매’와 더불어 부산의 3대 아지매로 명성을 떨쳤다.부산근현대역사관 김기용 관장은 “구포국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근현대 부산 생활사의 중요한 단면이자 지역 정체성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구포국수는 과거의 추억이자 오늘의 음식이며, 앞으로도 이어질 문화다. 이번 총서가 시민들이 구포국수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구포국수는 2022년 부산의 미래 유산으로 선정됐다. 구포국수가 길게 이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시공간 사라진 무념의 세계에
댓잎 소리만 귓가 스쳐
세상이 온통 꽃 천지다. 매화와 산수유꽃. 이제는 벚꽃이다. 봄의 절정을 알리는 꽃 만큼이나 미세먼지가 극성이다. 마음껏 꽃 구경을 하려 해도 미세먼지가 말썽이다. 미세먼지를 피하고, 들뜨고 어지러운 마음을 내려 놓기에 숲 만한 곳이 없다. 화려한 꽃 세상인 요즘 울창한 숲은 또 어떤 모습일까. 부산 기장군 철마면 아홉산숲에 다녀왔다.■소박한 첫인상의 반전, 장엄한 금강송·맹종죽부산 기장군에는 아홉산(361m)이 있다. 봉우리가 9개로 이뤄져 있다고 해서 아홉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아홉산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아홉산숲이다.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부산의 대표적인 힐링 장소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아홉산숲의 첫인상은 소박했다. 매표소를 지나 오른 완만한 능선은 마치 마을 뒷동산 같았다. 능선에서 보이는 도로변 벚꽃나무를 바라보다 바람결에 실려온 향긋한 봄 꽃 향기에 취했다. 장성한 아들이 함께 걷고 있는 나이든 아버지의 옷 매무새를 고쳐주는 모습이 정겹다. 훈훈한 가족의 뒤를 따라 걸으며 “별 것 없는데…”라고 느끼는 순간, 엄청난 반전이 벌어졌다. 향긋한 소나무 향기와 함께 장엄한 금강송 군락지가 눈 앞에 나타났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며 아홉산숲이 미소지었다.성인 한 사람이 안지도 못할 정도로 굵은 금강송. 목을 한껏 꺾어 위를 올려 봐야만 보일 듯한 소나무의 자태가 웅장했다.하늘을 뚫을듯한 기세로 솟아있는 금강송들 밑에는 ‘누운 주목’들이 잔디처럼 깔려 있다. 바닥에 누워 옆으로 자라는 누운 주목과 금강송의 조화는 신비로웠다. 영남 지방에서 보기 힘든 아홉산숲의 금강송들은 수령이 400년을 넘었다. 100그루가 넘는 금강송들은 모두 기장군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금강송 군락지에 잠시 앉았다. 솔향이 코를 스치더니 오랜 세월 한 자리에서 버텨 온 그들의 기운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단전이 묵직해짐을 느끼고 일어서려는데 또 다른 광경이 시선을 압도한다. 맹종죽숲이다. 맹종죽은 키 10~20m에 지름 20cm 정도로 대나무 중 가장 굵다. 200년 전 중국에서 들여와 심어진 것으로 아홉산숲의 대표적인 장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이곳은 과거 마을에서 굿을 하는 곳이어서 지금도 ‘굿터’로 불린다. 안쪽에 공터가 있는데, 번식력 좋은 대나무가 유독 여기만 자라지 않아 신령스러운 땅으로 여겼다. 그러다 2020년 드라마 ‘더 킹:영원의 군주’에 등장하면서 유명해졌다. 이곳에 세워진 돌기둥은 당시 드라마 세트로, 전 세계 관광객이 몰린다. 인도네시아와 미국 등에서 온 관광객들이 이 돌기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곳에서 영화 ‘군도’, ‘협녀, 칼의 기억’, ‘대호’의 명장면이 탄생했다. 기념샷을 남기려다 줄이 길어 포기했다.■피톤치드 가득한 편백숲과 만평대숲굿터를 지나니 왠지 모르게 시원함이 전해진다. 개잎갈나무와 맹종죽이 양쪽에 마주보고 있다. 아홉산숲에서 가장 시원한 곳이어서 ‘바람의 길’로 불린다. 시원한 바람에 봄 기운이 가득하다. 바람의 길 끝에 영화 ‘대호’ 촬영 때 지은 서낭당이 있다.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 길은 편백숲, 오른쪽 길은 평지대밭으로 이어진다.편백숲으로 길을 잡았다. 편백숲에 오면 늘 머리가 맑아진다. 피톤치드 덕분이기도 하지만 곧고 일정한 크기의 편백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안정감이 든다. 편백숲을 지나면 이제 막 꽃을 피우는 진달래 군락을 만날 수 있다. 성급한 진달래는 이미 꽃을 피웠다. 몇 주 뒤면 활짝 핀 연분홍 진달래 무리를 볼 수 있을 것 같다.진달래 군락을 지나면 평지대밭을 만난다. 아홉산숲의 또 다른 맹종죽숲인 ‘만평대숲’이다. 그 면적이 1만 평(3만 3000㎡)에 이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60~1970년대 숲지기가 동래 지역 식당을 돌며 잔반을 얻고 시내를 오가는 분뇨차를 끌고 와 밭에 비료로 주면서 숲을 가꿨다는 일화가 유명하다.만평대숲에 들어서자 자연스레 눈이 감긴다. 도시 소음은 사라지고 바람에 흩날리는 댓잎 소리만 귓가에 스친다.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는 추임새다. 시·공간이 사라진 무념의 세계. 숨소리조차 잊었다.맹종죽 숲을 한 바퀴 돌고 지름길을 따라 입구 쪽으로 내려오면 100년 된 은행나무와 ‘관미헌’이라는 이름의 전통 가옥이 있다. 관미헌은 ‘고사리조차 귀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숲을 지키는 남평 문씨 일가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택 주변에는 거북 등딱지처럼 생긴 대나무 ‘구갑죽’‘이 눈길을 끈다. 구갑죽은 짧고 굵다. 맹종죽이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야 한다면, 구갑죽은 무릎을 굽혀 낮은 자세로 봐야 한다. 겸손해지는 법을 깨우치게 한다. 1950년대 중국에서 일본을 거쳐 들여온 뿌리를 이식한 것이 작은 정원을 이뤘다. 구갑죽을 보면 어느새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 있다. 총 탐방로 3.2km 구간 약 1시간 30분 정도의 숲속 산책이 금방이다.■400년간 고집스레 가꾸고 지켜온 명품숲아홉산숲은 사유지다. 남평 문씨 일가가 무려 9대에 걸쳐 지켜온 숲이다. 금강송, 참나무, 편백, 대나무가 뒤덮고 있다. 숲의 규모는 자그마치 52만㎡(15만 7000여 평)나 된다.이 숲의 시작은 1592년 임진왜란 때로 거슬로 올라간다. 당시 부산에 살던 남평 문씨 일가는 난리를 피해 철마면 웅천 미동마을로 옮겨왔다. 이후 자손이 번창한 문씨 일가는 이 지역에 적잖은 전답과 임야를 소유하게 됐고, 이웃을 도우며 함께 살아 왔다. 문씨 일가는 ‘자연과 인간은 하나’라는 이치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실천하며 400년 전부터 숲을 가꾸기 시작했다. 이곳에 대나무와 금강송·편백·참나무 등을 심으며 자연의 소중함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여러 차례 위기도 있었다. 가장 큰 위기는 일제강점기였다.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집안의 쇠젖가락까지 빼앗아 간 일제가 아홉산숲의 나무를 베기 위해 들이닥친 것이다. 이때 문씨 일가 어른이 일부러 놋그릇을 숨기다 들킨 것처럼 놋그릇을 내주고는 아홉산숲을 구한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해방과 한국전쟁의 무수한 위기를 넘긴 아홉산숲은 또 다른 위기를 맞는다. 1990년대 지자체에서 내건 ‘테마가 있는 임도’ 정책으로 아홉산숲에 행락객들이 몰려들었고, 대나무와 야생난, 희귀식물들이 뿌리채 뽑혀 갔다. 결국 문씨 일가는 아홉산숲을 폐쇄하고 숲 살리기에 나섰다.‘자연과 인간은 하나’라는 집안 신념을 살려야 겠다고 생각한 문씨 일가는 2003년부터 학술적 탐방 등을 위해 부분 개방을 했다. 아홉산숲은 이듬해 산림청으로부터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에도 선정됐다.자연상태 그대로의 숲을 지켜오던 문씨 일가는 영화와 매체 등에서 아홉산숲이 알려지고, 관람객들의 개방 요구가 잇따르자 2015년 3월 일반에 공개했다. 현재 연간 10만 명이 이곳을 찾는다. 남평 문씨 종손 문백섭 대표는 “임진왜란, 일제 강점기, 해방과 전쟁을 거치고 21세기에 들어서도 결코 숲을 개방하지 않았던 고집이 자연 생태를 그대로 살린 지금의 숲으로 지켜졌다”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맑고 건강한 자연을 오롯이 전해주고자 개방했다. 사람보다 훨씬 오래 사는 숲은 사람과 하나다”고 밝혔다.‘자연과 인간은 하나다’는 변화지 않는 진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졌고 누군가에 의해 이렇게 실천돼 왔다.글·사진=김진성 기자 paperk@busan.com
간판 대신 결을 세운 곳,
달맞이길 숨은 보석 ‘에케’
붉은 벽돌 건물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석양 햇살이 긴 그림자를 내는 오후에 방문했더니 붉은 벽돌 위에서 나뭇가지 흔들리듯 일렁이는 빛 그림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여유로웠다. 건물 하부는 붉은 벽돌, 상부는 콘크리트 재질로 지어졌고, 마당 한가운데는 작은 정원을 넣었다. 크지 않은 5층짜리 건물인데 가장 낮은 쪽과 가장 높은 쪽이 10m 정도 차이가 나는, 삼각형 땅을 묘하게 살려서 지은 건물이다. 오죽했으면 건물 이름도 독일어로 모퉁이를 뜻하는 ‘에케’(ECKE)로 정했을까.2024년 10월 문을 열었고, 이듬해 8월 부산시가 발표한 ‘2025 부산다운 건축상’에서 금상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부산 달맞이길의 숨은 보석 ‘에케’(해운대구 달맞이길 117번길 219)를 찾아갔다. 복합상업문화공간 ‘에케’를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하고, 그 안에서 큐레이션 리빙 편집숍 ‘에크루’(ecrue)도 운영하는 이효진 대표를 만나, 일상과 취향을 공유하는 ‘에케’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들었다.■‘느슨한’ 공동체를 꿈꾸는 ‘에케’“‘에케’를 오픈하고 1년까지는 정신이 없었어요. 이제 사계절을 다 지내봤으니까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저는 여길 한 번이라도 찾으셨던 분이, 언제든 다시 찾고 싶은 곳으로 기억되면 좋겠거든요. 어떤 여행지를 두세 번째 간다면 꼭 다시 들르고 싶은 곳이 있는 것처럼요. 온라인 홈페이지 개통과 판매를 주저하는 이유도, 일부러 찾아오고, 온 김에 그 옆 다른 공간에도 들렀다가 가면 좋겠다 싶어서입니다.”이 대표의 말 때문이었을까, ‘에케’는 단순히 상업 공간이 모인 집합체가 아니라, 이 대표와 오랜 인연을 이어 온 사람들이 ‘느슨한’ 공동체처럼 모여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대표는 ‘에케’를 구상할 때 “함께 나이 들고, 오래도록 기억을 쌓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단다.“건축을 처음 해 보는 거니까 엄청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설계부터 오픈까지 4년이 걸렸어요. 처음에는 2층짜리 단층 상가 건물을 생각했는데, ‘나도 함께하고 싶다’는 지인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갑자기 지하도 파게 되고, ‘스테이’까지 들어오면서 복합문화공간으로 점점 규모가 커졌어요. 다양한 브랜드를 한 건물에 담아내려면 전체적인 방향 정리도 필요했어요. 저는 이 안에서 먹고, 자고, 보고, 쇼핑하고, 느낄 수 있는, 오감을 만족시키는 곳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이 모든 것이 한 공간에서 일어나면 시너지도 있을 것 같거든요.”■‘에케’에서 만날 수 있는 브랜드현재 ‘에케’에 입점한 브랜드는 11개. 작게는 여섯 평, 큰 곳은 마흔 평 규모다. A호는 ‘치즈치즈치즈’ 3호점 브런치 카페, 그 옆 B호는 이곳을 설계한 라라호호건축사사무소, C호는 공예 작품과 빈티지 오브제를 다루는 ‘에크루’, D호는 한국인 아내와 일본인 남편 부부가 운영하는 예약제 일식당 ‘오라 스키’이다. 중정을 사이에 두고 E호는 다양한 전시와 팝업을 여는 ‘에임.히어’, F호는 1인 베이크 숍 ‘사이에 베이크’, G호는 아트워크 숍 ‘마니 델 갸또’가 이어진다.층을 달리하면 H호는 미쉐린가이드 그린 스타와 원 스타의 예약제 파인다이닝 ‘피오또’, I호는 일본 세라믹 브랜드 아리타재팬의 한국 공식 판매처 ‘1616 아리타재팬’, J호는 소파 가구의 라이프스타일 서비스를 제공하는 ‘펠리토’, 그리고 K호는 빈티지 가구와 하루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스테이 ‘아파트먼트풀 포룸스’이다. 스테이의 경우, 4개의 방마다 콘셉트를 달리하고, 덴마크, 독일, 프랑스 등 나라별로 다른 빈티지 제품을 만날 수 있다. 일종의 ‘경험’을 파는 셈이다. 간간이 ‘에크루’나 ‘1616 아리타재팬’에서 파는 제품도 놓여 있다.“‘에케’라는 공간의 분위기를 크게 해치지 않는, 결이 맞는 분들이 함께하고 있어요. 사실 월세를 잘 내겠다는 병원 입주 요청도 있었지만, 우리가 그렸던 그림은 아니어서 거절했어요. 예를 들면, H호에 들어온 파인다이닝 ‘피오또’는 직접 운영하는 농장의 채소와 지역 재료를 활용한 코스를 구성하는, 자기만의 철학을 가진 곳이죠. G호의 ‘마니 델 갸또’는 고양이의 손이라는 뜻인데, 이 브랜드를 만든 분이 진짜 손재주가 좋아요. 감각적이고 위트 있는 소품을 참 잘 만들어요.”■아늑하고 힙한, 공간이 주는 힘H와 G, 무슨 암호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공간을 나타내는 호수 표기이다. 그러고 보니 건물 외부, 눈에 보이는 사인물도 콘크리트 담벼락에 써 놓은 ‘ECKE’라는 로마자 알파벳 네 글자가 전부이다.“사실 간판을 크게 하면 인식은 쉬운데, 우리가 생각하는 ‘결’과는 다른 방향이어서 최대한 자제했어요. 사인이 없더라도 모일 수 있는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요.” ‘에케’를 설계한 B호 입주자 라라호호건축사사무소 조호제 건축가의 말이다. 그는 “공간 건축이지만 지역적인 특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고민, 그리고 기존에 있던 주변 사람들과 조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에케’가 부산다운 건축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입체적인 도시경관과 자연 지형을 존중한 설계”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각각의 층이 도로와 직접 연결돼 다양한 방향에서 자연스럽게 진입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특히 중정은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이어주는 공공 계단과 연결돼 지역 공동체(커뮤니티)의 유기적인 흐름을 만들어낸다.이 대표는 “설계를 의뢰할 때부터 가장 먼저 중정을 두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문을 열면 마켓이 펼쳐지고, 사람들이 벤치에 걸터앉아 공간을 즐기는 장면을 상상했거든요.” 작지만, 의미 있는 도시의 새로운 문화적 거점이 탄생한 배경이다.■수시로 열리는 전시·팝업 스토어‘에케’에 입주한 11개의 브랜드 중 대부분은 큰 틀에선 ‘고정’된 형식을 취한다. 공간 플랫폼이라는 성격이 말해주는 것처럼 E호 ‘에임.히어’는 방문할 때마다 ‘콘텐츠의 주인공’이 달라졌다. 그동안 회화, 주얼리와 조명, 디자인, 공예 전시 등을 다양하게 선보였다.지금은 ‘나무, 곁’이란 제목의 김수근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 18일 시작한 이 전시는 부산에서 목선반과 도자기 작업을 하는 부부 공예가 ‘예누하’의 강진주(부인) 작가가 남편 김수근 작가를 위해 특별히 마련해 준 것이다. 강 작가는 “흙을 만지는 사람으로서 저는, 그가 나무라는 생명에 새겨온 고독한 시간을 이해한다”면서 “그는 매일 묵묵히 나무를 깎아 왔지만, 그 가치를 세상에 내놓는 일에는 늘 서툰 사람이었고, 그가 쑥스러움 뒤에 숨겨 두었던 나무의 내밀한 언어를 제가 빚어온 이해의 그릇에 담아보려 한다”고 전했다. 전시는 3월 1일까지로, 오전 11시~오후 5시에 관람할 수 있다.이 대표가 운영하는 곳은 C호 ‘에크루’이다. 그가 여행이나 출장을 다니며 모은 빈티지 가구와 아기자기한 소품,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조명한다. ‘에크루’를 만들기 전에는 생활소품 브랜드 ‘코코로박스’를 만들어 이름을 알린 바 있다. 마지막으로 1년 4개월의 소회와 바람을 들려준다.“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굴러가는 거 같아요. 다만, 이 공간이 널리 알려져 좀 더 많은 사람이 와서 온기가 채워지길 바라요. 사실, 식당도 예약제여서 북적북적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주차 공간도 협소한 편이거든요. 지금 조성 중인 달맞이공원에서 언덕 쪽으로 에스컬레이터가 생기거나 지난해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개최한 ‘2025 행복작당’ 행사 때처럼 해운대 일대 명소를 도는 ‘셔틀버스’를 해운대구청 같은 데서 운영해 주면 참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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