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FF 2025] 체제의 관습 딛고 주체적 삶에 온몸 던지는 소녀들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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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F가 주목한 또 다른 여성의 세계
학교의 전근대적 폭력에 대한 저항
신앙과 성 정체성 사이에서의 고민
가부장제 사회를 향한 당찬 몸부림
다양한 '소녀 서사' 담은 작품 조명

'아메바'의 한 장면.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캡처 '아메바'의 한 장면.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캡처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서 ‘여성 서사’를 넘어선 ‘소녀들의 서사’가 관객의 마음을 붙잡았다. 미성숙하고 혼란스러운 소녀들의 세계에서 다투고 화해하며 성인이 돼 가는 여정을 담은 영화들이 눈길을 끈다.

25일 BIFF에 따르면 싱가포르 출신 여성 감독 탄쓰유의 작품 ‘아메바’는 소녀들이 가진 다양성과 저항의 에너지를 그려냈다. 영화는 변화와 자유를 갈망하는 싱가로프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다. 싱가포르의 권위주의적인 여학교가 배경이다. 학교는 위계질서, 어른에 대한 복종, 순종의 문화를 강요하고 가르친다. 귀밑 3cm 머리, 치마 길이, 브래지어 색깔까지 강요하는 학교의 모습은 한국 관객에게도 익숙한 풍경이다.

갱단을 동경하는 16살 소녀 추는 이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는다. 추는 의문을 제기하고 도전하고, 옳지 않다고 느끼는 것을 바꾸려고 한다. 그녀를 포함한 4명의 친구들은 학교의 규율에 분개하며 한여름의 저항을 벌인다. 영화는 한 학교에서 벌어지는 소녀들의 저항기를 통해 통제 시스템과 제도적 폭력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조명한다.

'지우러 가는 길'의 한 장면.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캡처 '지우러 가는 길'의 한 장면.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캡처

한국 여성 감독 유재인의 첫 장편 연출작인 ‘지우러 가는 길’도 순수하고 낭만적인 학원물과는 거리가 멀다. 고등학교 1학년생 윤지는 담임선생 종성과 비밀 연애를 하다 임신까지 했다. 종성은 연락이 닿지 않고 며칠째 학교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임신 중지를 시도하는 윤지의 여정에 룸메이트 경선이 함께한다.

윤지는 당돌하게 세상에 도전하고 때로는 깨지고 넘어진다. 소녀들은 그 과정에서 유머와 우정을 잃지 않고 삶에 대한 저마다의 결론을 내려간다. 올해 공식 경쟁작으로 초청된 만큼 작품성도 인정받은 영화다.

'또 다른 탄생'의 한 장면.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캡처 '또 다른 탄생'의 한 장면.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캡처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려 길을 나선 소녀도 있다. 올해 공식 경쟁작으로 초청된 ‘또 다른 탄생’은 타지키스탄계 여성 감독 이저벨 칼란다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영화는 타지키스탄 산골 마을에 사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소녀는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그리며 간신히 삶을 이어가는 할아버지와 외로운 삶 속에서 조용히 좌절하는 엄마를 바라본다.

소녀는 시를 읊고 현자를 찾아가고 파리(페르시아 신화 속의 요정)를 쫓으며 아빠를 찾아 할아버지와 엄마의 슬픔을 해결하려 한다. 아빠를 찾는 여정을 떠난 소녀는 길 위에서 인생에 대해 배워나간다.

'리틀 시스터'의 한 장면.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캡처 '리틀 시스터'의 한 장면.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캡처

퀴어 소녀들의 사랑을 다룬 작품도 주목할 만하다. ‘리틀 시스터’는 주인공 파티마가 연인인 지나와 가족과 빚어내는 갈등과 성장을 다룬다. 프랑스 배우이자 감독 합시아 헤지의 세 번째 장편 영화다.

영화는 고등학생 파티마의 삶에 주목한다. 대학에 입학한 뒤로 파티마는 여러 여성과 짧은 만남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중 누구에게도 솔직한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진 못한다. 고등학생 시절 만난 지나만이 그가 진심으로 교감하고 그리워하는 상대다.

알제리 출신의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파티마는 독실한 무슬림이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 성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밖에선 자유롭게 퀴어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욕망을 드러내다가도 집 안에 들어서면 파티마는 규율의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춘다. 영화는 파티마가 겪는 자기 부정과 첫사랑의 균열을 풀어낸다.

주연 배우들도 영화 속 소녀들의 고민에 깊이 공감한다는 뜻을 드러냈다. ‘리틀 시스터’로 올해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주연 나디아 멜리티는 지난 22일 상대역 배우 박지민과 함께한 BIFF 관객과의 대화(GV)에서 “스포츠를 전공했는데, 축구를 하면서 남자들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는지 고민했던 적이 있다”며 “나를 찾아가는 여정은 성별과는 관계없는 보편적인 과정임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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