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12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송지연 기자 sj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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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연 스포츠라이프부장

디지털 콘텐츠 '도파민 개미지옥'
AI기술 결합되면서 더 공고해져

폐해 막기 위한 조치들 각국 확산
이달 호주 청소년 SNS 금지법 시행
활용과 중독 사이 균형에 노력 필요

핸드폰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목적이 있었다. LAFC 손흥민의 올 시즌 마지막 경기를 다시 보는 것.

2025 MLS컵 PO 서부 준결승 경기에서 손흥민의 동점 프리킥 골은 너무나 마법 같았다. 요즘 표현대로 도파민이 제대로 터지는 장면이었다. 공식 중계 쇼츠부터 시작해 ‘야유를 경악으로 바꾼 손흥민골’ ‘동료들 찐 반응’ ‘키퍼 시점 기적의 골’ 등 골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찍은 유튜브 쇼츠 수십 개를 반복해서 보다가, 어느 순간 알고리즘을 타고 뉴욕 추수감사절 ‘케데헌’ 퍼레이드에 누리호 4호 발사, 고 이순재 배우 별세 등을 거쳐 토트넘 팬들 반응, 청룡영화제 시상식 퍼포먼스 관련 영상까지 보고 나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1분도 안 되는 짧은 동영상을 여러 개 봤을 뿐인데, 시간이 ‘순삭(순간 삭제)’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핸드폰을 들었는지 애초 목적이 언뜻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뇌 썩음, 브레인 랏(brain rot) 현상이었다. 브레인 랏은 온라인 콘텐츠의 과도한 소비로 정신이나 지적 상태의 악화를 일컫는 말로, 2024년 옥스퍼드가 선정한 그해의 단어이기도 했다.

올해는 AI 기술의 발달로 디지털 콘텐츠의 ‘도파민 개미지옥’은 더욱 견고해졌다. AI 기술을 이용해 영상 제작이 이전보다 수월해지면서 디지털 콘텐츠 생산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제작 속도도 빨라졌다.

영상 콘텐츠에는 영상 관련 제품의 구매 링크가 자동으로 노출되면서 온라인 쇼핑과 영상 사이를 무한반복으로 오갈 수 있는 환경도 구축되었다. 이제 물건을 사기 위해 검색이라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됐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올 연초 발표한 ‘2025 콘텐츠 소비 전망’에 따르면 한국인의 주당 평균 유튜브 동영상 콘텐츠 소비 시간은 6.88시간으로 전년(6.54시간)보다 늘 것으로 전망됐다. 일활성이용자수(DAU)와 사용 시간을 분석한 한 통계에서는 한국인 5명 중 3명이 하루 2시간 넘게 쇼츠 등 유튜브 콘텐츠를 소비하며, 인스타그램의 짧은 동영상인 ‘릴스’는 1인당 하루 평균 50분을 사용한다는 분석도 있다.

과도한 디지털 콘텐츠 소비에 의한 ‘도파민 중독’의 폐해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최근 AI 기술의 발달은 그 폐해의 속도와 규모를 짐작하게 어렵게 만든다. 이 때문에 디지털 콘텐츠를 술이나 담배와 비슷한 부작용을 초래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최소한 아동과 청소년은 보호하자는 조치들이다.

호주에서는 이번 달 세계에서 처음으로 16세 미만은 부모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SNS 사용을 규제하는 법안이 시행된다. 이 법의 특징은 플랫폼 기업을 규제하는 것으로, 페이스북·인스타그램·엑스(X)·유튜브 등 SNS 및 스트리밍 플랫폼은 16세 미만 사용자의 접근을 차단하는 기술적 조치를 해야 하고, 위반 시 최대 약 5000만 호주 달러(약 480억 원)의 벌금이 부과된다.

덴마크 정부는 15살 미만의 SNS 사용을 금지하는 법을 마련해 의회 상정을 앞두고 있고, 유럽의회도 지난달 말 13세 미만 청소년의 SNS 이용을 전면 차단하자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술과 담배가 과하면 어른에게도 좋을 리 없듯이, 디지털 콘텐츠에 중독된 성인들의 부작용도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인 극단적인 정치 편향성이다. 편향적 디지털 콘텐츠에 과몰입한 나머지 ‘내가 옳다’는 신념에서 느껴지는 안정감과 우월감의 세계에 빠져 상식에 대한 감각마저 마비된 이들을 인터넷 댓글 창에서 수시로 목격한다.

역으로 디지털 콘텐츠 중독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디지털 디톡스’를 실천한다. 모든 앱의 푸시 알림을 끈다거나 스마트폰과 특정 어플 사용 시간을 제한하는 식이다. 유튜브 알고리즘 추천을 피하기 위해 시청 기록을 주기적으로 삭제하는 방법도 있다.

달력을 한 장 남겨 놓은 12월. 2025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돌아본다. 힘겹게 버틴 날들 속에 도파민 분비를 자극하는 각종 디지털 콘텐츠는 일과 후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 같은 소소한 즐거움이기도 했다.

하지만 맥주 한 잔으로 시작했다가 소맥 폭탄주 십여 잔을 들이킨 날처럼, 잠깐만 봐야지 했다가 어느새 정신을 놓은 날도 부지기수다. 정보 습득과 여가 활용 그리고 제어하기 어려운 몰입 사이를 오가며 디지털 콘텐츠를 소비 중인 셈이다. 폭식과 술을 줄이고, 운동과 식단 관리를 하겠다는 내년 새해 다짐에 디지털 디톡스도 추가해 본다.


송지연 기자 sj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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