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꿈에 그리던 ‘평양비엔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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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큐레이터

독일 통일 과정서 미술이 연결고리 역할
6년 전 광주비엔날레 뒤 평양 행사 불발
문화예술 남북 교류·협력 이뤄졌으면

“전쟁 통에 북으로, 남으로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한국 근대사의 예술가들! 북으로 가족을 따라, 미군의 체포를 피해 떠났던 이쾌대 선생, 이석호 선생, 정을녀 선생, 정종여 선생. 그리고 40여 명의 선생들! 또 남으로 가족과 형제를 따라 남하한 원산항에서 출발하여 끝내 터를 잡지 못한 이중섭 선생, 한묵 선생, 장리석 선생, 박항섭 선생, 최영림 선생. 이처럼 훌륭한 선생들이 계셨기에 지금 우리는 성장할 수 있었고, 역사의 흔적을 따라 오늘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문화의 힘을 빌려 그간의 상처와 시간들 그리고 앞으로의 남과 북, 북과 남의 동질성을 이해해 가는 단초로 이 ‘평양비엔날레’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만천하에 우리는 처음부터 한민족이었다는 것을 당당하게 공표하는 것으로 그 서막을 엽니다. 그간 주변 열강의 지정학적 역학 관계 등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오랜 시간 나누어지고, 떨어져 서로 비방하기도 했지만, 굳건하게 견뎌 왔습니다.


오늘은 남과 북, 북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펼쳐 보이는 자리인데 이념을 떠나 한 민족으로서 말과 얼굴 그리고 문화 또한 언제나 하나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간입니다. 오늘 이 미술 잔치가 단초가 되어 더 많은 교류와 연대, 협력의 문화를 통해 통일의 그날이 올 때까지 천천히 갑시다. 그리고 서로를 인정하고 기다려 주는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화해와 공존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서로의 실체를 확인하고 어루만져주며 ‘분단의 미술의 역사’를 한 민족으로 엮어 ‘통일의 미술사’를 재창조해야 하겠습니다. 남의 유채꽃, 북의 진달래가 만발할 때 우리 다시 만납시다. 어디든 어떻습니까. ”

잠에서 놀라 깨어났다. 너무나도 현실 같은 꿈속의 장면이었다. 며칠 전 광복 80주년 광복절 행사는 온 국민과 함께 다시 찾은 민주주의를 확인하며 서로 격려해 주는 축제 한마당으로 펼쳐졌다. 이번 광복절을 특별하게 느끼는 국민이 많을 것이다. 헌정 질서 정상화와 국민주권의 원칙을 재확인하는 자리였기도 한 축제 한마당이었으니 말이다. 뜨거운 그날의 함성과 기운에 힘입어 꿈속에서 ‘평양비엔날레’가 열리고 개막식 개회사가 들려오다니 가슴 벅찬 기분이 든다. 잠시 물 한 사발 마시고 생각해 보니 마냥 낭만적인 꿈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 생겨날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꿈으로 휘발되기 전에 꼼꼼히 기록해 둬야겠다. 제1회 ‘평양비엔날레’ 전시 감독!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다시 통일을 맞이하는 날을 접했다. 그 초석은 수상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또 1977년 ‘카셀 도큐멘터’에서 동독과 서독 미술가들의 불화가 오히려 두 나라가 통일에 대해 숙고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세계 미술사는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세계 3대 미술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카셀 도큐멘터’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해낸 것이다. 1980년대 초 ‘독일적인 미술’의 전통을 잇고자 하는 ‘젊은 야수’ 그룹의 등장과 그 변화를 추적하는 미술사학자들의 연구와 노력은 독일의 통일을 이루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독일 정부는 통일 기념행사로 독일 전역에 예술가들이 설치 작업을 할 수 있게 했으며 대주제를 ‘자유의 극한’으로 정했다. 작가들이 얼마나 통일의 자유를 갈망했는지를 미술로 표현해 주기를 기대했다. 과거에는 정치가 권력의 매체로 미술을 사용하였지만, 매체가 된 미술은 이제 그 매체를 통해 정치와 권력에 대항하고 국민의 자주적 목소리를 연대하는 세월을 맞이하였다. 동독 출신 극작가 하이너 뮐러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의 시간은 정치 또는 역사의 시간과 다른 것이다”라고.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없었던 이야기는 아니다. 2018년 광주비엔날레 섹션 중 하나로 ‘북한미술: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패러독스‘전이 열리면서 세간의 이목을 모았다. 광주비엔날레 재단과 광주시는 다음 해에 평양비엔날레 계획을 추진한 바 있었으나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민간에서도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민예총)이 주축이 되어 남북이 공유하는 기념일인 6·15와 8·15에 맞춰 대규모 전시회를 계획한 바 있다. 성공되지 못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좌초되었고, 불안한 남북 관계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부처의 예산 편성조차 하지 못했다.

이러한 일들을 반면교사 삼아 이번 이재명 정부에서는 문화예술 분야의 남북 교류 협력에 적극적인 실행력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20년 만에 다시 돌아온 통일부 장관의 의지, 부처 간의 협력체계를 강조하는 이번 정권에서 반드시 이를 시도해 보아야 한다. 지금이 적기다. 부산에도 부산비엔날레 조직위가 있고, 그동안 축적한 경험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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