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가장 완벽한 여름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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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소설가

북적거리는 휴양지 대신
책읽기라는 조용한 휴가
시절마다 두고 온 기억들을
가만히 매만지는 시간

어제는 다른 일들을 모두 접어두고 집에서 종일 뒹굴거리며 책을 읽었다. 새로운 일과 환경에 적응하느라 조금 긴장했던 마음도 풀고, 스케줄러에 오늘 해야 할 일 목록을 빼곡하게 적는 아침 루틴도 생략하고, 스마트폰도 멀찍이 두고, 이 하루만큼은 스스로에게 주는 여름휴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름답고 활기가 넘치며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휴양지로 떠나보는 것도 물론 즐겁겠지만, 혼자만의 공간에서 책 한 권을 완독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휴가다운 휴가니까. 준비물은 책과 음악, 선풍기, 씁쓸한 커피와 달달한 복숭아.

라디오에서는 때마침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이 흘러나왔다. 음악은 기억 속의 한 시절을 생생하게 소환하는 힘이 있는데, 〈사계〉를 들으면 언제나 중학교 음악 시간이 떠오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어떤 부분을 무작위로 들려준 다음, 어느 계절인지 맞히게 하는 시험. 교탁 앞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어쩐지 여름 같다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정말 여름에 해당하는 연주였다. 그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여름이라고 말하지 않고도 여름을 표현할 수 있구나. 바이올린 소리가 때로는 여름이 될 수 있구나. 그러면 또 무엇이 여름이 될 수 있을까.

하나의 기억은 또 다른 기억들을 소환했고, 나는 책을 읽다가 깊은 생각에 빠져들기를 반복했다. 집어든 책이 〈두고 온 여름〉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시절에 두고 온 내 마음을 자꾸만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 그 시절의 사람들을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 엎드려서 책을 읽다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조금 울기도 하고, 벽에 등을 기대고 책을 보다가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걸어 들어가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현재의 내가 과거의 그들과 조우하고, 그때는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할 수 있었다. 초현실이라고 해야 할지 몽상이라고 해야 할지, 소설을 읽다보면 그런 신비로운 시간들이 종종 펼쳐진다. 어찌 보면 만취의 순간과도 비슷한 면이 있는데, 다음 날 숙취가 전혀 없다는 점은 독서의 대단한 장점이다.

어딘가에 두고 온 마음들을 돌아보고 돌아보다가, 성경 속 창세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불과 유황으로 파멸된 소돔에서 도망쳐 나올 때 뒤돌아보지 말라던 신의 명령을 어겨 결국 소금 기둥이 되었던 롯의 아내. 종교적인 관점을 떠나서, 나는 그녀의 뒤돌아보는 행위야말로 인간적이며 문학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두고 온 것들을 잊지 않는 사람, 불타는 과거의 흔적을 돌아보는 사람, 그리하여 마침내 소금 기둥으로 굳어져버리는 사람.

뒤돌아보지 말라는 금기의 모티프는 여러 신화나 설화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도 죽은 아내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저승까지 가지만 지상에 도달하기 전에 뒤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어기게 되고, 우리나라의 설화 ‘선녀와 나무꾼’ 일부 판본에서도 나무꾼이 선녀를 되찾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다가 뒤를 돌아보고 만다. 금기를 어긴 대가는 가혹하고 비극적이다. 신화적 시스템 속에서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절대자에 대한 불복종으로 심판받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끊임없이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과거를 기억하고, 지나온 시간들을 되새기고, 거기에 두고 온 마음을 돌아보고, 아프면 아파하고, 후회되면 후회하고…. 고통스러울지언정 지난 일들을 돌아보고 직면할 때에, 제대로 다시 나아갈 힘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책과 함께 수많은 기억과 상념들 속을 유영했던 하루. 시절마다 두고 온 기억들을 매만지고, 그곳에 두고 온 이들에게 마음으로나마 안부 인사를 전했다. 가장 완벽한 여름휴가를 보내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직 남은 여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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