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화의 크로노토프] 도시를 기억하는 소리
피아니스트·음악 칼럼니스트
공연장은 공동체 정체성 쌓는 공간
부산문화회관 기획, 모범 사례 꼽혀
지역 예술 생태계 깊은 고민 담아내
도시는 소리를 기억한다. 삶이 지나간 흔적, 계절이 남긴 여운, 그리고 한 시대를 관통한 음악의 결은 도시의 공기 속에 축적되고,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머문다. 도시의 정체성은 시간과 공간에서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도시는 사람들의 모든 행위가 쌓이는 장소이며, 서로 다른 목소리가 각자의 의미와 엮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음악적 사건도 도시라는 ‘공공의 장’에 고요하면서도 깊은 자취를 남긴다. 그리고 그 흔적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디딤돌이 된다.
부산문화회관이 선보인 상반기 기획 시리즈는 부산 클래식 음악계가 주목할 만한 음악적 사건이었다. 지난 2월 20일부터 7월 25일까지 이어진 ‘사운드 오브 부산: 브람스 교향곡 전곡 사이클’이 바로 그것이다. 얼핏 보면 고전적 레퍼토리의 단순한 재현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실험적 시도가 담겨있었다. 지역에 있는 네 개의 민간 오케스트라가 각각 한 작품씩 맡아 릴레이 형식으로 무대를 이어가며, 그 실험에 참여했다. 유나이티드코리안오케스트라,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 부산네오필하모닉오케스트라, 인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주역이었다. 음악적 지향점, 운영 방식, 심지어 재정적 여건까지 제각각인 단체들을 하나의 기획으로 엮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차이들은 오히려 ‘지역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며, 다층적 소리의 경험으로 통합되었다.
브람스는 교향곡이라는 또 다른 장르에 도달하는 데 20년이 넘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베토벤 이후 교향곡 형식에 대한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채, 선배 음악가들의 유산을 자신만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데 거의 생애의 절반을 바친 셈이다. 그러나 이후에 작곡된 교향곡들은 훨씬 빠르게 완성되어 갔다. 오랜 사유가 풍성한 창작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브람스의 여정처럼, 지역 예술단체들의 브람스 교향곡 전곡 연주는 단순히 위대한 레퍼토리의 재현을 넘어, 지역 예술생태계가 나아가야 할 철학적 방향에 관한 질문이었다. 그것은 ‘브람스를 연주했다’는 결과보다 ‘부산이 예술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묻는 과정이었다.
이번 기획에는 지역 예술생태계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겨있었다. “지역 오케스트라의 중심이 지역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예술의 정체성을 꽃피울 것인가?”라는 질문은 예술가뿐 아니라, 우리나라 공공예술기관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시대적 과제이기도 하다. 지역성은 예술의 부가적 요소가 아니라 출발점이어야 한다. 이는 ‘문화 균형’을 실현하겠다는 정책적 선언을 넘어 ‘공공성’이 실현되는 실천적 원칙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기획은 외부의 유명 오케스트라나 협연자를 초청하는, 이른바 ‘이벤트성 쇼핑형 기획’과 달리, 지역 예술단체들이 주체적으로 관객과 호흡한 ‘과정 중심’의 ‘예술 실천’이었다. 공공극장이 자발적으로 민간 예술생태계를 연대의 틀로 엮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 모범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시리즈는 각 오케스트라가 가진 개성적인 해석을 통해 같은 작곡가의 또 다른 얼굴들을 펼쳐 보였다. 음악은 더 이상 악보 위에 머무는 텍스트가 아니라 도시의 사건이 되었고, 공연장은 감상의 공간을 넘어 도시의 기억이 쌓여가는 사유 장소로 확장됐다. 공연장은 공동체가 가진 기억과 정체성을 무의식적으로 쌓아가는 상징적 공간이다. 부산문화회관의 프로젝트는 공공극장이 단지 물리적 현장이 아니라, 지역 예술의 시간과 정체성을 되새기는 ‘기억의 장소’라는 점을 일깨웠다. 고전적 사유가 지역 오케스트라의 손길을 거쳐 부산이라는 ‘도시의 소리’로 자리매김한 순간이었다.
특히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예술감독 오충근)는 부산 출신 작곡가 김종완의 신작 〈완성의 여정〉을 브람스 〈교향곡 1번〉과 함께 연주하며, ‘공존의 형식’과 ‘부산의 소리’가 병행할 수 있음을 알렸다. 전통과 창작, 고전과 현재, 중심성과 지역성이 하나의 무대 안에서 공존하고 변주되는 방식으로 오늘날 공공극장이 추구해야 할 예술 기획의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공공극장과 민간예술단체가 하나의 무대 안에서 이룬 동등한 파트너십은 부산 예술이 나아가야 할 미래의 모습이다.
모든 기초학문이 그렇듯이, 기초예술도 단기간에 수치화된 성과로 드러나기 어렵다. 특히 클래식 음악처럼 느리고 반복적이며, 즉각적인 결과가 보이지 않는 예술 장르는 행정 효율이나 예산 논리와 충돌하기 쉽다. 그러한 점에서 지역 공공예술기관은 ‘예술의 시간을 함께 견디는 장치’가 되어야 한다. 수치화되지 않는 감각의 축적, 공동체가 함께 쌓아가는 정서적 기반, 반복되는 예술 경험이 만들어내는 도시적 리듬은 더디지만, 반드시 도시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예술적 실험은 지금부터 시작이며, 부산의 크로노토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