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새로운 남성성을 찾아서
변정희 전 (사)여성인권지원센터'살림' 상임대표
육아휴직·가사노동 남성 참여 확대
'폭싹' 양관식 캐릭터 열광하는 풍조
그 속에도 성폭력엔 기존 통념 여전
성폭력은 권력 남용과 관련한 문제
단호한 대처가 추구돼야 할 남성성
양관식 없다고 부상길 될 순 없기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클라우디아 골든 교수는 최근 ‘아기와 거시경제’라는 주제의 연구에서 남성이 가사노동에 덜 참여하는 국가에서 합계출산율이 낮다고 지적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을 지목하며 그는 “한국은 부부 평등 측면에서 과거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부부의 성역할에 대한 인식의 충돌이 출산율의 급격한 하락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골딘 교수는 한국이 얼마나 빠르게 변하는 사회인지를 예상하지는 못한 듯하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육아휴직 사용자 중 남성이 4만1829명으로 최초로 30%를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2015년 남성 육아휴직자 수가 5.6%임을 감안하면 10년 사이에 9배나 증가한 것이다. 여전히 한국 여성은 남성보다 매일 3시간 더 많이 가사노동을 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지만 이 수치는 조만간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을 것이다.
그저 희망회로를 돌리는 것만은 아니다. 2024년 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로 ‘요즘 남편 없던 아빠’가 선정될 정도로 한국의 많은 남성들이 기존의 남성성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통념을 탈피해서 육아나 살림에 적극적인 주체가 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유튜브에서는 대세 이수지와 더불어 ‘아조씨’ 추성훈의 유튜브가 화제였다. ‘강한 남자’의 전형처럼 보이는 추성훈이 아내의 집에 셋방살이 하는 서열 꼴찌라는 반전(?)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크게 호응했다. 조금 맥락은 다르지만 가히 최고의 화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아내와 자식에게 한없이 헌신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 양관식 캐릭터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열광하는 이유도 단지 박보검이 젊은 시절 역할을 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는 인식의 충돌이다. 어쩌면 우리의 통념보다도 더 빠르게 현실이 변하고 있음에도, 남성성을 둘러싼 통념과 갈등은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다. 성착취나 성범죄 가해자를 둘러싼 문제가 범죄와 폭력에 대한 문제와 해결 모색으로 끝나지 않고 소위 ‘성별 갈등’의 문제로 번지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성범죄 피해가 모든 여성이 겪을 수 있는 피해라는 점을 강조한다고 해서, 가해자가 모든 남성을 대변하지 않는다.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성을 비판한다고 해서 그것이 남성성의 유일한 대안이 아님은 더더욱 명백하다. 그럼에도 성범죄 사건에 대한 문제 제기와 비판이 성별 갈등으로 이어지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선 이것은 갈등을 자양분 삼아 권력을 키우고자 한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후보 시절 선보였던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 공약이나 일부 정치인들의 성별 갈라치기 전략은 모두 갈등을 더욱 더 뾰족하게 만들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되었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지역 사회의 유력 정치인에 의해 저질러진 성폭력 사건과 가해자의 죽음 앞에서 정치권이 보여준 기이한 침묵도 비상식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러한 권력형 성폭력 범죄가 한두 번이 아니라는 점에서 반복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시민의 상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진짜 사나이’라는 비영리 단체의 운영자 잭슨 카츠는 미국에서 영향력이 큰 폭력 예방 멘토링 프로그램을 공동 설립한 교육자다. 스포츠계와 군대에서 시행하고 있는 성폭력 예방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그는 성폭력은 힘과 통제, 권력 남용과 관련된 문제라고 지적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성폭력은 여성과 그들을 돕는 몇몇 선한 남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우선적으로 남자들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러한 폭력에 침묵하지 않고 권력 남용에 단호한 대처를 하는 것이 진짜 추구해야 할 남성성이라는 것이다.
지난 4월 4일,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소추 사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선고를 들으면서, 비로소 상식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억지 논리와 억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100일이 넘게 불안과 혼란의 날들을 보냈다. 그러나 그 동안의 극단적인 대립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일상을 회복해가는 시민들을 보면서 우리에게 상식이라는 공통감각이 있었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앞으로도 우리 시민은 변화하는 세상을 상식의 수준에서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고정관념과 편견보다 세상이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고, 최소한 우리의 상식 수준으로 세상이 바뀌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통념과 규범이 변화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미 수많은 지표들이 변화를 증명하고 있는 가운데, 낡은 인식과 통념 속에 갇혀 ‘젠더 갈등’이라는 허상을 좇지 말자. ‘폭싹 속았수다’의 캐릭터에 빗대어 말하자면, 현실에 양관식이 없다고 부상길이 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