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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우크라이나를 망친 젤렌스키
올 것이 오고 말았다. 100만~150만 명의 국민을 희생시키며 3년을 끌어온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의 패전이 굳어져 간다. 나라가 거덜 났다. 국토의 20%는 이미 러시아에 넘어가 버렸고, 우방이라고 믿었던 미국도 등을 돌렸다. 트럼프는 “젤렌스키와는 앞으로 어떤 협상도, 회담도 없다”라며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라고까지 한다. 미국은 100조 원어치를 퍼부었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도 전면 중단했다. 광물 협정이 어렵사리 성사된다고 해도 우크라이나 국민은 앞으로 10세대 250년에 걸쳐 3500억 달러 혹은 그 이상을 미국에 내야 한다.
유럽이 일견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며 젤렌스키를 돕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남을 제물로 자신을 방어하고자 하는 유럽의 ‘술책’이고, 게다가 미국이 빠진 유럽이 무슨 힘이 있을까. 프랑스의 평화유지군 파병, 영국의 4조 원 차관 약속이라는 것도 국제 정세와 역내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지난 2월의 나토 합동 군사훈련에도 32개 나토 회원국 가운데 겨우 9개국만 참가했다.
전황 정보를 종합해보면, 미국의 무기 지원과 정보 중단 훨씬 이전부터 우크라이나의 패전은 명확했다. 살아날 불씨가 없다. 4개의 큰 전선 가운데 북쪽의 루간스크, 동남쪽의 자포리자와 헤르손은 이미 오래전에 러시아에 넘어갔고, 도네츠크, 그중에서도 포크로우스크 전선만 우크라이나군이 겨우 버티고 있을 뿐이다. 이곳은 희토류 등이 많은 광산 지대로 엄폐물이 의외로 많고, 전차전을 펼 수 있는 평야 지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초의 점령지에서 36%만 남은 서북쪽의 쿠르스크에서도 백악관 회담 결렬 이후 러시아 쪽의 공세가 심해졌다. 이러다간 수도 키예프와 서부 등 나라 전체가 없어질 판이다. 경제도 완전히 망가졌다. 그런데도 젤렌스키는 거꾸로 간다. 승산 없는 전쟁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계속 이어가려 하고, 징집 나이도 25세에서 18세로 확 낮추려 한다. 사업가들을 쥐어짜 정치자금을 더 불리고, 전 대통령과 군 최고사령관 등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는 국내 정적들을 미리미리 제거하느라 바쁘다. 거의 내란 수준이다. 이건 지도자가 갈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애초부터 무모하고 잘못된 선택이었다. 작은 나라의 국가 지도자라면 전쟁보다는 균형 외교를 택했어야 했다. 핵 재무장론도 해결책이 아니다. 외세를 끌어들여 강대국과 전쟁을 벌이기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국가 기반이 너무나도 취약하기 때문이다. ‘변방’이라는 뜻의 우크라이나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독립의 역사가 겨우 3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키예프 러시아(882~1240)도 바이킹과 노브고로드 귀족들이 내려와 세운 고대 러시아국가였고, 오랫동안 우크라이나 서부는 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았다. 동부는 세금과 부역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쳐와 살았던 러시아 하층계급 코사크의 자치구역이었다. 돈바스 지역에 지금까지 러시아 뿌리가 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에 맞서 1654년에 러시아 제국에 영토 병합을 스스로 요청한다. 소련이 300년 뒤인 1954년에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서류상으로 할양한 것도 사실은 이 사건을 다시 자축하기 위한 이벤트였다. 1917년 2월의 러시아 부르주아혁명 혼란기에 잠깐 독립을 했다지만, 우크라이나가 실제로 독립한 건 소련 붕괴기인 1991년 8월 24일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고 국력도 약한 나라가 왜 갑자기 한쪽으로 기울며 침몰을 자초하는지, 우크라이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몹시 안타깝다.
지도자의 죄가 크다. 서방은 떡 줄 생각조차 안 하는데 전임자인 포로센코 대통령은 말기에 헌법까지 고쳐가며 유럽연합과 나토 가입을 국가 목표로 설정하더니, 젤렌스키는 더했다. 2019년 5월 집권 초기엔 균형 외교를 잠깐 취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미군을 국토로 끌어들여 포 사격 등 도발을 먼저 감행하고 아예 중립과 등거리 외교를 포기해버렸다. 물론 우크라이나 비극이 젤렌스키 탓만은 아니고, 1990년 10월 독일 통일 때의 부시-고르바초프 약속을 어기고 미국이 계속 동진해오고 러시아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2022년 2월에 사방에서 내려온 탓도 크다. 그러나 지도자가 잘했으면 우크라이나가 오늘날의 이런 꼴은 당할 리 만무하다.
탄핵 정국이 올봄에 어떻게 정리되어 대한민국호가 어떤 새 출발을 할지 모르지만, 우리도 앞으로 국가 지도자를 잘 세워야 한다. 국가와 국민에 대한 충정보다 권력욕, 모험주의, 화려한 언변을 앞세우는 자들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엔 젤렌스키 동정론이 의외로 강한 듯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당하는 비극을 보면서 그저 약소국 지도자의 비애, 비정한 국제관계만 읽는다면 숱한 희생을 치른 비극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지혜가 아닐 것이다.
2025-03-1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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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2기 트럼프 미 행정부와 한국 외교 안보 정책
지난 1월 2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제47대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했다. 워싱턴의 아웃사이드로 제45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트럼프는 제46대 대통령직을 민주당의 조 바이든에게 내준 뒤, 2024년 11월 대선에서 역사적 승리를 거두고 백악관에 재입성했다. 트럼프에서 바이든으로 그리고 다시 트럼프로 이어지는 미국 정치의 변화는 미국의 외교 안보 정책에 그대로 반영된다. 즉 이익, 거래, 양자주의에 집중하는 트럼프의 외교 정책이 바이든의 이념, 규범, 다자주의로 이행했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트럼프의 대통령으로의 귀환과 함께 출범한 2기 트럼프 행정부는 대통령 당선인 시절 트럼프의 파나마 운하도 그린란드도 미국 땅이며 합병을 위해서는 군대 투입도 가능하다는 발언에서 볼 수 있듯이 1기 트럼프 행정부 이상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면서 미국의 국익을 추구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에 대해서는 한미동맹을 흔들면서 막대한 방위비 인상을 요구하고,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는 직접 협상을 재개할 가능성이 크다. 이렇듯 한반도에 트럼프 폭풍이 밀려오고 있지만 ‘12·3 비상계엄 사태’가 초래한 국정 공백의 장기화와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정치 세력 간 대립 격화를 배경으로 한국의 외교는 거의 식물인간 상태에 빠져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냉전 붕괴 이후 30년 가까운 패권 유지 과정에서 소진된 미국의 국력과 국민들의 피로감을 회복시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고자 한다. 이것이 2017년 제45대 대통령 취임사와 2025년 제47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변함없이 ‘미국 우선주의’를 천명한 이유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절체절명의 과제인 미국의 재건을 위해 미국 우선주의 외교 안보 정책을 추진한다. 구체적으로는 미국의 경쟁국인 중국을 압박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 온 일련의 국제기구에서 탈퇴하며, NATO를 포함한 동맹국들에게 방위비 증액을 강요하면서, 미국의 군사력은 한층 강화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강한 미국의 힘을 이용해 협상에서의 우위 확보, 정상 대 정상에 의한 톱다운 결정 그리고 불확실성을 극대화해 유리한 거래를 확보하는 ‘미치광이 전략’을 빈번히 사용한다.
2기 행정부 출범 직후부터 트럼프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 기간 자신이 호언장담했던 가자지구 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을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해 추진하고 있다. 사실 두 지역은 지리적으로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와 지정학, 지경학적으로 연계돼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의 경우 북한이 러시아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러시아 쿠르스크 지역에 군대를 파병한 상황이기 때문에 미국의 대북 정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지난 2월 4일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가장 먼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백악관에 초청해 정상회담을 행했다. 그리고 미국이 가자지구를 장악해 소유하고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킨 다음 지중해 휴양지로 개발하겠다는 이른바 ‘가자 구상’을 제시했다. 1기 행정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영토 제국주의적 양태를 나타낸 것이다. 이어 같은 달 28일에는 러시아와 3년 이상 전면전을 행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불렀다. 그리고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우크라이나의 안전 확보를 명시적으로 약속하지 않은 채 종전협정 및 미국과의 광물협정에 서명할 것을 종용했다. 미국의 국익과 무관한 유럽의 전쟁에 바이든 행정부가 과도하게 개입했다고 인식하는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이 낭비이며 이미 제공한 지원을 우크라이나로부터 회수하고자 한다. 이에 더해 트럼프는 젤렌스키 대통령보다 강력한 권력을 소지하고 장기 집권을 행하고 있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친밀감을 표명해 왔다.
가자지구 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단락되면, 트럼프 대통령은 1기 행정부에서 실패했으나 지속적으로 우호 관계를 과시해 온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협상을 재개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트럼프는 김정은이 지난 10년간 공을 들여온 강원도 원산 갈마해안관광지구에 대한 자본 투자권과 광물 채굴권을 확보하고 김정은은 부분적 비핵화를 행하는 스몰딜부터 북미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는 빅딜까지도 이루어질 수 있다. 한국이 소외되지 않고 안보와 국익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국의 실익에 근거한 한국의 전략적 가치와 한미 공조의 중요성을 설득해야 한다. 더 나아가 2기 트럼프 행정부 다음까지 염두에 둔 장기적 관점에서 한미동맹과 함께 한국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외교적 시야와 공간을 확장해야 한다. 이를 위한 전제 조건이 정치 세력들과 국민들의 국익과 안전 보장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라는 점은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2025-03-10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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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미국의 가상자산 비축 선언과 금융 질서 변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전략적 비축 자산 목록에 가상자산을 포함하겠다고 발표해 금융 시장과 경제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리플(XRP), 솔라나(SOL), 카르다노(ADA)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비트코인(BTC)과 이더리움(ETH)도 전략적 비축 자산의 중심에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결정은 그동안 가상자산에 대해 거리감을 두어왔던 미국 정부의 입장이 전향적으로 변화한 것을 의미하며 가상자산의 위상이 미국 정부 차원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공식화되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앞으로 글로벌 경제와 금융 질서에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전략적 비축 자산이란 국가가 경제적, 안보적 이유로 비축하는 필수 자산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로 원유, 천연가스, 금, 일부 농산물 등이 있으며 이러한 자산은 시장 변동성이나 외부 충격으로부터 국가 경제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들은 전략적 비축을 통해 국제 분쟁, 공급망 교란, 금융위기 등의 위기 상황에 대비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가 실제로 정책에 반영된다면, 가상자산은 전통적인 전략적 비축 자산의 역할을 보완하거나 대체하는 새로운 축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우선, 기존 금융 시스템 내에서 가상자산의 법적 지위가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정부 차원의 대규모 매입이 이루어지면 비트코인, 이더리움, 리플 등 전략자산으로 특정된 가상자산의 가격이 급등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연기금, 은행, 대형 자산운용사 등 전통적인 금융 기관들의 가상자산 시장 진입이 가속화될 것이다. 기존 전략적 비축 자산은 대부분 실물 자산 중심이었으나 가상자산의 포함으로 국가 간 경제적 역학 관계가 변할 수 있다. 요컨대 미국이 대규모 가상자산을 보유하면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 달러의 패권과 함께 가상자산의 패권까지 차지할 수도 있다. 중국과의 패권 전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미국 입장에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던 가상자산 시장에서 주도권을 가져오고 금융 분야에서 절대적인 통제권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가능성은 더욱 커 보인다.
가상자산은 가격 변동성이 극심해 안정적인 가치 저장 수단으로 보기 어려워 그동안 전략적 비축 자산으로 고려되지 않았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각국 정부는 오랜 기간 가상자산을 법적으로 어떻게 다룰지 고민해 왔다. 금융 자산인지, 상품인지, 화폐인지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상자산은 비축 대상에서 제외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가상자산을 전략적 비축 자산으로 지정하겠다고 밝힌 것은 이제 이러한 문제들이 점차 해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블록체인 기술의 발전으로 보안이 강화되고, 각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규제 체계를 마련하고 있으며 금융기관도 가상자산 시장에 참여함으로써 인프라가 마련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2024년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 시행에 이어 금융위원회가 지난 2월 14일 법인의 가상자산 시장 진입을 단계적으로 허용한다는 로드맵을 발표한 것도 이러한 세계적 흐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제일의 패권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미 공화당이 상원과 하원까지 장악한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는 이제 미국 정부가 가상자산을 본격적으로 비축할 것이라는 보증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미국이 먼저 전략 자산 비축에 나서게 되면 중국, 유럽연합(EU) 등 주요 국가들도 경쟁적으로 가상자산을 비축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의 성장과 함께 관련된 금융산업의 발전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 발행에 반대하는 트럼프 정부 입장에 비추어 본다면 가상자산 외에 달러 기반의 스테이블코인도 급격하게 성장하게 될 것이다.
달러 기반 스테이블 코인은 결국 미국 국채 매입 수요 증가로 이어져 가상자산으로 인해 위축되었던 미국 달러화의 위상을 강화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앞서 언급된 가상자산들과 함께 국제 무역과 금융거래에서 새로운 결제 방식의 등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는 가상자산의 시세 변동에 관심을 두었던 투자자뿐만 아니라 각국 정부와 기업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디지털화된 새로운 유형의 자산이 출현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한 각종 금융 서비스와 거래가 기존의 금융 시스템을 혁신할 것이다. 이제 가상자산에 대한 시각이 어떤지는 부수적인 문제다. 우리는 글로벌 금융의 거대화 변화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우리 인생에 한 번 볼 수 있을지 모를 엄청난 변화에 벌써 흥분된다.
2025-03-0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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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직업에 귀천이 없을까
‘노동(勞動)’이라는 낱말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몸을 움직여 일을 함’이라고 되어 있다. 몸을 움직여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기 위해서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다름 아닌 먹고 사는 수단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가끔 머리를 어지럽게 할 때가 있다. 이 간결한 단어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가 첨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은 단순히 몸을 움직여 일을 하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생활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이자 사회적 지위를 암시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개인적인 이름인 동시에 매우 사회적인 명칭이라는 뜻이다.
노동은 사회적 지위 드러내는 지표
직업에 따른 귀천 없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차별 의식은 엄연히 존재
삶의 다양한 층위는 구조적 문제
사회가 나누는 기준에 따르지 말고
자기 일의 소중함 느끼는 게 중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서울’ 명문대 학생들을 볼 때면 이상한 감정이 밀려왔다. 예컨대 ‘나보다 더 노력했으니까 저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겠지’ 혹은 ‘저들은 선망받는 직업에 금세 올라서겠지’, ‘내가 그렇게도 갖고 싶어 했던 이름들을 갖게 되겠지’ 같은 생각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감정이 이렇게 불거지곤 한다. 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그런데도 종종 나보다 잘난 것 같은 이를 보면 이렇듯 부끄러운 생각에 빠지는 것이었다.
나는 자립할 만한 임금을 받으며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내가 서 있는 사회적 위치를 조금 부끄러워할 때가 있었다. 어릴 때는 ‘이곳은 한시적인 직장이고 아직 장래를 고민하는 중’이라는 핑계로 내 노동의 가치를 폄훼했다. 현재 내 위치를 자꾸 타인에게 설득하려 한다는 건, 내가 나를 떳떳하게 여기고 있지 못하다는 걸 방증한다. 그런가 하면 대학생 때의 아르바이트 경험은 잘도 늘어놓았다. 과거의 아르바이트 경험은 어린 나이에도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내려 했다는, 자랑할 만한 훈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이 말은 어쩌면 엉터리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면 아파트 경비원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은 무엇인가. 음식점에서 종업원에게 진상을 부리는 사람은 또 뭔가. “직업에는 귀천이 없는데, 계급을 나누는 사람들이 문제야!” 이런 말은 형식적이고 겉치레의 말일 뿐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도덕책에나 있을 법한 이 문구는 세상에서 어떠한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악착같이 살아서 성공해야지’, ‘더 열심히 공부해서 취직해야지’라는 생각을 한다. 여기서 자유로운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대한민국의 입시, 취업, 결혼, 노후 등 모든 것이 그렇다. 삶 전체가 계급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언제까지 구조가 아닌 개인의 탓을 할 수는 없다.
한편으로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때 묻은 양심을 덜어내고 싶을 때 자주 인용되는 듯하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처음 이 개념을 배웠다. 생각해 보면, 귀천이 없다는 관념을 아이들에게 학습시키려 한다는 건 오히려 직업의 귀천이 엄연한 지금의 현실을 부정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학교라는 곳부터가 직업에 귀천 의식을 부여하는 대표적인 사회조직이었다. 선생님들은 윤리 시간에 노동의 평등함을 가르치면서도 댄서를 꿈꾼다는 아이는 은근히 괄시했다. 의대에 진학할 거라는 아이에게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관심과 애정을 쏟았다. 학교 현장이 이러니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어떻게 하면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
개인의 계급적 상황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고 괄시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면죄부도 너무 많다. 모두가 기를 쓰고 위로 올라가려 하는 모양을 보고 있자니 살아남으려는 모든 행위가 어떨 때는 다 가엾게 여겨지기도 한다.
모든 노동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의 ‘이상’이다. 이런 이상이 실현되는 그런 때가 오기는 할까. 어쩌면 나도 지위나 신분의 상승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직 지위랄 것도 없는 나는 오늘 깨끗하고 순수한 내 스펙을 조금 부끄러워하면서도, 잔인한 세상의 기준에 혼란을 겪는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일기장에 ‘되고 싶은 게 너무 많다’며 수많은 꿈들을 적는다. 어린 시절에는 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중 몇 가지를 이루어가고 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나는, 요령이 없어서 힘들었지만 여기저기 부딪히니 이제야 내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알 것 같다. 이제 나는 되고 싶은 것은 없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게 많아졌다. 꿈이란 건 반짝하는 순간이 아니라, 내가 계속 써 내려가야 하는 역동적인 드라마 한 편임을 깨닫는다. 더이상은 사회가 나누는 기준으로 나의 직업을 규정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껴갈 뿐이다.
2025-03-0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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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 관광에도 봄이 오려나
최근 몇 차례의 비가 내리더니 봄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 소식을 들으면 요즘의 관광 경기가 떠오른다. 통계청 데이터에 따르면 부산의 소상공인 및 자영업 지표는 여전히 부진하다. 이를 반영하듯, 매년 2월 14일이면 초콜릿 판매로 활기를 띠던 거리가 올해는 유난히 조용했다. 해운대나 광안리를 둘러봐도 예전만큼 관광객이 보이지 않는다. 관광 경기가 얼어붙은 듯했지만, 얼마 전 방문한 포항과 경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부산에서 사라진 관광객들이 경주에 몰려 있는 듯했다.
포항에서 우연히 방문한 딸기 체험 농장은 겉보기에는 한산해 보였지만, 예약 앱을 통해 끊임없이 체험객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 농장은 아들이 아버지의 여덟 동 딸기 하우스를 물려받아 열두 동으로 확장했다. 주요 체험 방문객인 어린이들을 고려해 재배시설을 바꾸고, 인건비 절감을 위해 자동화 시설을 도입하며 안정적인 운영을 이어가고 있었다. 또한,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활용한 홍보 전략을 통해 직거래 판매를 활성화하며 인기 체험농장으로 자리 잡았다.
경주 또한 놀라운 변화를 보였다. 기존의 유명한 황남빵과 경주빵 가게들이 식품 공장으로 이전하면서, 그 자리는 새로운 경주빵 가게들이 차지했다. 평범했던 골목들은 활기찬 상권으로 변모했고, 주막처럼 꾸며진 술집, 소담스러운 밥집,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기념품 가게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방문하려던 식당에 전화했더니 예약 앱을 통해 예약하라고 안내를 받았다. 이 앱은 대기 팀 수와 예상 대기 시간을 상세히 알려주며, 대기자 수가 줄어들 때마다 알림을 보내주었다. 덕분에 줄을 서지 않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경주의 거리에는 한복을 입은 외국인 관광객, 삼삼오오 모여 다니는 여행객,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까지 활발하게 오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돌담집을 개조한 한 점집을 발견했는데, 점괘를 봐주는 사람이 아닌 자판기가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방문객들은 오늘의 운세부터 재물운, 학업운, 취업운, 연애운 등등 다양한 고민거리마다 버튼을 누르도록 되어있는 자판기에서 운세를 뽑고, 고민과 결심을 메모지에 적어 벽에 붙였다. 아마도 이곳은 점괘를 통해 자신의 고민거리를 털고 말 못 하는 사연을 여기 벽에다 붙여놓는 소통방식으로 MZ세대들에게는 먹히는 핫플이 된 것 같았다. 부담 없는 500원의 가격으로 초등학생부터 청년들까지 사로잡으며 인기 명소가 되었다. 관광지가 젊은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얼마나 창의적으로 변화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오십 대인 나는 경주 관광지에선 보기 드문 ‘노땅’이었다.
경주가 젊은 여행객들로 가득 차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 경주는 낮은 집들과 전통 한식 위주의 메뉴가 전부였지만, 이제는 퓨전 음식부터 스테이크, 화로구이, 파스타, 피자까지 다양한 메뉴를 제공한다. 게다가 맛집을 도착 전에 예약하여 대기 시간을 줄이고, 주변을 구경하다가 알람이 울리면 식당으로 이동하는 시스템 덕분에 더욱 편리한 여행이 가능해졌다. 맛집 식당에 줄 서다 하루를 허비할 뻔했지만, 예약 앱 덕분에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관광과 미식을 동시에 즐길 수 있었다. 이렇게 경주는 통일신라시대를 넘어 현대적인 관광지로 변모하고 있었다.
한편, 부산의 숨겨진 노포 맛집들도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비대면 기술을 익히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웠던 시기에, 2세대들이 1세대와 함께 배달앱을 도입하고 포장 기술을 개발하며 살아남았다. 그 결과, 현재는 SNS 홍보와 함께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반면, 2세대가 가업을 이어받았지만, 과거의 명성으로만 유지될 뿐 대표메뉴는 정체성을 잃고, 유행하는 메뉴로 바뀌면서 다른 식당의 맛이 더 낫다는 혹평을 받으며 경쟁력을 잃어가는 맛집들도 있다.
오늘날 소비 트렌드는 효용 가치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서울에서 부산, 부산에서 강릉까지 당일치기 여행이 가능할 정도로 교통 인프라가 발전한 상황에서, 관광객들은 이동 시간보다 체류 시간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관광지에서 불필요한 대기 시간을 줄이고, 효율적인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디테일한 기술의 접목이 필수적이다. 단순한 정보 검색을 넘어 실질적인 생활 기술로 관광의 세부적인 부분을 개선할 때, 부산 관광도 명품 관광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부산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새로운 시각에서 분석하고 개선해 나가야 한다. 이제 관광에도 디테일한 기술을 적용해야 할 때다. 생활 속 기술이 세밀하게 적용될 때, 부산 관광은 다시 명품 관광으로 태어날 것이다.
2025-02-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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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별이 된 아이
얼마 전 대전의 한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초등학생 피살 사건은 대한민국 전체를 충격에 빠뜨렸다. 무엇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은 가해자가 그 학교의 교사이며, 아이들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라 여겨졌던 학교에서 범죄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평범한 하루를 시작했을 유가족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었을 학급 친구들과 돌봄 교사를 비롯하여 동료 교사와 학교 관계자들이 겪었을 트라우마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꿈도 많고 명랑했던 한 아이가 겪어야 했을 고통을 차마 다 헤아리지 못해 며칠 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초유의 일이자 예외적인 범죄 사건이지만 한편으로는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의 중심 화두가 되었던 초등교육 현장의 총체적 위기가 또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교육 현장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한 서이초 교사 순직 사건이 불과 2년 전이었고 그 전후로도 초등교사의 죽음이 이어져 왔다. 한편 정부는 늘봄학교 등 돌봄교실을 확대해 왔지만 어느 돌봄 교사의 지적처럼 텅 비어 있는 학교 내에서 유일하게 운영되는 돌봄교실은 안전의 사각지대에 있었다. 가장 약한 존재가 가장 큰 피해를 입고야 마는 비극 앞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모두의 책임감이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피해 아동의 이름을 딴 ‘하늘이법’ 마련을 위해 정치권이 전에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교육부도 강력한 재발방지 대책을 약속했다. 가칭 ‘하늘이법’에는 교원에 대한 정기적 심리검사 시행, 직무수행이 어려운 교원에 대해 직권으로 휴·면직을 권고할 수 있는 질환교원심의위원회 법제화, 교내 폐쇄회로(CC)TV를 확대 설치해 사각지대를 없애는 내용이 담길 전망이다.
그러나 사건 발생 직후부터 가해자가 우울증을 오래 앓아 왔다는 언론 보도가 이어지고 법제화와 대책 마련이 교원의 정신 건강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모양새에 우려의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정신 건강 전문의들은 우울증과 범죄를 연관 짓는 언론 보도가 편견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면서 문제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한다. 나종호 미국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우울증을 앓는 사람 중 고작 10%만 치료받는 우리의 현실은 큰 문제”라며 “정신 건강에 대해서 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 아픈 사람들이 편견과 차별 없이 공개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권명환 해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부장 역시 우울증이 이와 같은 폭력과 인과관계가 없음을 강조한다.
전교조와 교사노조에서도 사안의 중대성이 큰 만큼 대책 마련에 있어 충분한 논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교원들은 고위험 교원과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교원을 구별해낼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정기적인 심리 검사는 오히려 자신의 증상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결과를 낳거나 필요한 경우에도 질병 휴직을 선택하지 못하는 등 교육 현장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교사노조연맹이 교원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응답자의 90.7%는 하늘이법의 초점은 ‘위중한 폭력적 전조 증상을 보이는 학교 구성원’에 맞춰져야 한다고 봤다. 또 97.1%는 정신질환에만 초점을 둔 법을 제정하면 교육활동 중에 발생한 심리적 어려움을 드러내기가 어려워 오히려 문제가 커질 것이라고 답했다.
점진적 사회의 발전을 주장한 철학자 칼 포퍼는 “추상적인 선의 실현을 위해 힘쓰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한 바 있다. 위중한 폭력적 전조 현상이 행위로 드러난 학교 구성원에 대한 긴급한 분리 조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 사건의 핵심이라는 교사노조의 지적에 공감이 가는 이유다. 가정폭력이 방치될 경우 심각한 강력범죄로 이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교 현장에서 발생하는 폭력이 방치될 경우 상상하지 못할 강력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문제 해결의 초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또한 정규수업과 돌봄교실, 귀가로 이어지는 아이들의 안전 문제는 보다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과제로서 돌봄 교사를 비롯하여 관련 주체들의 참여 속에 정책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사회해체 이론에서는 범죄 예방의 주요한 접근 방법으로 지역사회의 ‘집합적 효율성’을 강조한다. 지역 주민들의 총체적인 교류, 유대 관계가 범죄 감소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학부모, 학생, 교사가 그동안 쌓아 온 신뢰가 무너지지 않고,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에 힘을 합쳐나갈 수 있도록 교육부와 정치권이 힘써 주길 바란다. 아이들의 환한 얼굴이 별이 되는 세상, 아이들의 비극이 법이 되는 세상은 너무 가슴이 아프지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으로 우리를 이끈다. 하여, 소망한다. 예쁜 별로 간 하늘이가 우리를 비추는 작은 빛이 되기를.
2025-02-2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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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잠재적 범죄자' '극우' 매도에 분노하는 2030 남성들
2030 남녀의 갈등이 본격화한 건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다. 한 20대 여성이 서울 강남역 인근 빌딩 화장실에서 일면식 없는 남성의 흉기에 찔려 사망한 사건이다. 이 안타까운 사건이 남녀 갈등으로 비화한 건 범죄의 원인을 둘러싼 시각 차이 때문이었다. 2030 여성들은 이 사건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여성혐오 범죄’라고 보았다. 남성들은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살인사건’이라고 했다. 갈등은 정치권으로 비화했다. 진보 진영에서 ‘남성은 잠재적 범죄자’라는 구호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2030 남성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더불어민주당·자유한국당 등 거대 양당은 조금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정의당·녹색당 등 진보 정당들은 이 논쟁으로 큰 홍역을 치러야만 했다.
‘남성은 잠재적 범죄자’라는 구호는 청년층 여론 지형을 바꾸는 발단이 됐다. 그전까지만 해도 청년들은 남녀 불문 대체로 진보 성향을 띠었다. 그런데 이때를 기점으로 중도에서 온건 진보를 아우르는 남성들의 진보 이탈이 시작됐다. 극우 성향의 ‘일베저장소(일베)’ 대 ‘나머지 다수’ 구도로 대립하던 온라인 커뮤니티 지형도 남성 대 여성으로 바뀌었다. 이 구도는 문재인 정부에서의 여러 남녀 갈등 사건을 거치며 더욱 공고해졌다.
박구용 전 더불어민주당 교육연수원장은 얼마 전 한 유튜브 채널에서 2030 남성들이 “사유하지 않고 계산만 하는 세대”라며 “스스로 말라비틀어지게 만들고 고립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해 물의를 빚었다. 이 발언은 2030 남성들이 자주 이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등지에서 큰 공분을 샀다. 이번 일은 과거 “60대 이상은 곧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들이니까 투표 안 해도 된다”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던 정동영 의원의 사례와는 다르다. 정 의원의 ‘노인 비하 발언’이 즉흥적으로 답변하다가 나온 말실수였다면, 박 전 원장의 설화는 길게는 ‘잠재적 범죄자’ 논쟁 때부터 계속된 갈등 구도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남성 청년들은 보수의 핵심 지지층이 된 듯 보이나 사실 이들의 국민의힘에 대한 충성도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이번 정부 내내 바닥을 기었던 2030 남성들의 대통령 지지율은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제20대 대선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2021년 12월엔 ‘이대남’들의 이재명 민주당 후보 지지율이 한때나마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를 앞서기도 했다. 당시 이재명 후보는 ‘탈모약 건강보험 적용’ 등 민생 공약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었던 데 반해 윤석열 후보는 “극빈층은 자유를 모른다”거나 “앞으로는 구직앱이 생길 것”이라는 등의 발언으로 논란을 자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지부진하던 그의 2030 남성 지지율은 2022년 1월 들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다시 손잡고 ‘한 줄 공약’을 쏟아내면서 급증했다. 그 기세에 놀란 민주당은 반대편에 있는 2030 여성들을 호출했다. ‘N번방 제보자’로 유명한 박지현을 영입해 전면에 내세웠다. 이때부터 대선은 본격적인 2030 남녀 대결 양상을 띠게 되었다.
문제는 이 시기부터 진보 진영 내에서 2030 남성들을 조롱, 비하하는 문화가 확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민주당 주요 스피커들과 지지자들은 소위 ‘2번남’, ‘2찍남’(모두 2번에 투표하는 남성이라는 뜻) 등의 단어를 만들고 확산시켰다. 요컨대 “국민의힘에 투표하는 젊은 남성은 못 배우고 지질한 남성”이라는 내용이었다. 본인들 딴에는 “우리를 찍어야 세련되고 배운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려는 심산이었겠으나 결과적으로 패착이었다. 정치 성향을 이유로 유권자를 조롱하고 배척하는 태도가 가운데서 관망하고 있던 2030 남성들조차 돌아서는 계제로 작용했다.
최근 양상도 비슷하다. 탄핵 촉구 집회가 한창이던 지난 연말, 적극적으로 거리에 나선 청년 여성들과 달리 남성들은 좀처럼 현장에 나오지 않았다.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면서도 그 성과를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가 챙기는 데에는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은 제도권에서의 해결을 기다리며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진보 진영 일각에서 “2030 남성이 극우화해서 탄핵에 반대하고 서울서부지법 난동을 일으켰다”는 비난이 터져 나왔다. 집회에 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극우’로 명명된 2030 남성들은 반발했다. “예전엔 우리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더니 이제는 극우라고 매도하느냐”라는 것이다. 물론 이 집단에서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 찬성 여론은 여전히 높다. 하지만 어느새 민주당을 훨씬 앞서게 된 국민의힘 지지율은 정치권이 유권자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낙인과 배제’ 전략이 더 많은 유권자를 끌어들일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2025-02-1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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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 지산학 협력,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지난달 성황리에 막을 내린 미국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2025에서는 인공지능(AI), 사물 인터넷(IoT), 지속 가능 기술이 산업 혁신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글로벌 기업들은 AI 기반 자동화, 친환경 기술, 초연결 네트워크를 활용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했다. 기술 혁신이 산업 구조를 빠르게 바꾸는 가운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지역과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부산도 예외가 아니다. 부산 역시 이러한 기술을 활용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고 새로운 가치 창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부산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부산의 지자체와 기업, 대학이 협력하는 지산학(地産學) 협력은 지역 산업의 생존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핵심 전략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조선·해운, 자동차 부품 산업 등 전통 제조업 중심의 부산은 이제 AI를 비롯한 첨단 기술 혁신과 글로벌 경쟁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직면해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금까지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고, 지자체와 공공기관, 대학은 다양한 정책과 지원 사업을 펼쳤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이 과연 지역 산업의 체질을 얼마나 바꾸고 또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냈는지에 대해선 아쉬움이 남는다. 현재까지의 성과를 되돌아보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는 단순한 연구와 개발(R&D)을 넘어 실질적 경제적 가치 창출과 상용화(R&BD)를 목표로 지산학 협력의 틀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개념이 바로 TRL(기술 성숙도 수준)이다. TRL은 기술이 초기 연구 단계에서부터 상용화에 이르기까지의 성숙도를 평가하는 체계로, 1단계(기초 연구)에서 9단계(완전 상용화)까지로 나뉘며, 각 단계는 기술 개발의 진행 상황과 필요 요소를 명확히 구분한다.
대학은 TRL 1~4단계에서 기초 연구와 기술 개발을 담당하고, 기업은 TRL 7~9단계에서 상용화에 집중한다. 문제는 TRL 5~6단계, 즉 기술 검증과 초기 실증 단계의 공백이다. 이 단계는 연구실에서 검증된 기술을 실제 환경에서 테스트하며, 상용화 가능성을 평가하는 시기다. 이 과정이 부족하거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학의 연구 성과는 경제적 가치로 전환되지 못하고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로 발전하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질 위험이 크다.
TRL 5~6단계의 공백을 해소하기 위해선 대학과 기업을 연결하는 전문 코디네이터와 중재 조직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들은 기술 실증을 위한 테스트 베드 환경을 제공하고, 초기 상용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줄이며, 기술 성능 테스트와 개선을 지원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존 인프라와 관련 기관을 적극 활용하고, 산업별 특화 조직을 설립해 지역 내 대학과 기업 간 협력을 촉진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창업 생태계 활성화 역시 지산학 협력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탠포드대와 영국 케임브리지대는 대학과 기업이 초기 단계부터 협력해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기술을 상용화하는 협력 모델을 보여줬다. 올해 신설 예정인 부산기술창업투자원은 이러한 창업 생태계 활성화의 중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실증 연구 지원과 투자 생태계 구축, 창업 초기 단계부터 성장까지 이어지는 원스톱 지원 체계를 마련한다면, 부산은 창업과 기술 상용화의 선도 지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도 이제는 산학 협력을 대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학문적 성과에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산업과 시장의 요구를 반영해 실질적인 기술로 발전시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기업과의 협력이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거나 경제적 기여로 이어지지 못했던 기존 관행은 지역 산업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앞으로 대학은 기술 검증과 상용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산학 협력의 중심에서 책임 있는 주체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결국, 부산의 지산학 협력이 실질적인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보여주기식 행사나 단발적인 지원 프로그램을 넘어, 기술 상용화 가능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협력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지자체, 기업 그리고 대학은 각자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긴밀히 협력하는 체계를 구축해야만 한다. 부산은 이러한 협력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 잠재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는 혁신적인 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 이제는 기존의 관행과 한계를 넘어, 지산학 협력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도시로 나아가야 할 때다.
2025-02-1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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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트럼프 시대, 부산이 이끌 디지털 르네상스
대통령 탄핵 정국으로 흔들리는 대한민국 경제에 새로운 도전이 덮치고 있다. 트럼프 2.0 시대에 본격화되고 있는 보호무역주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다수 국가를 상대로 전방위적인 ‘상호 관세’ 부과까지 예고하며 동맹국도 예외 없이 강경한 통상정책을 펼치겠다는 입장이다.
이런 도전에도 우리는 새로운 기회를 마주하고 있다. 바로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미국의 새로운 디지털 금융 전략이다. 이는 AI와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미국을 글로벌 디지털자산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트럼프는 이미 대규모 AI 인프라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미국의 인프라 기업 오라클이 기반을 구축하고, ‘챗지피티’로 주목받은 오픈에이아이가 운영을 맡으며, 일본 소프트뱅크가 자금을 지원하는 초대형 프로젝트가 그 시작이다. 주목할 점은 트럼프가 자신의 가족재단을 통해 직접 디지털자산 시장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트럼프 일가는 ‘월드 리버티 파이낸셜’(WLFI) 설립을 통해 암호화폐 사업에 진출했다. 이더리움 기반의 디지털자산 사업 확장도 준비 중이다. 백악관에 디지털자산 정책을 총괄할 직책을 신설하고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규제 재검토를 선언한 것은 이러한 변화의 신호탄이다. 미국이 디지털 금융 혁신에 본격적으로 나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부산은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다. 블록체인 특구로 지정된 부산은 이미 디지털자산 허브도시로서의 탄탄한 기반을 갖추고 있다. 동북아 최대 규모의 항만 인프라, 국제 해저케이블의 기착지, 최신 데이터센터가 그것이다. 블록체인 특구 지정 이후 관련 기업의 진입도 시작됐다. 이미 블록체인 기반의 모바일 신분증, 투명한 온라인 투표 시스템 등 혁신적인 서비스가 시민의 일상에 스며들고 있다. 이제 부산은 한 단계 도약해야 한다. AI와 블록체인, 두 기술의 융합은 새로운 디지털 혁신의 기폭제가 될 것이다. 세계적 수준의 통신 인프라와 데이터센터는 AI 발전의 토대가 되고 있으며, 블록체인 특구로서 쌓은 경험과 전문성은 디지털자산 생태계의 든든한 기반이 되고 있다.
부산의 도약을 위해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핵심 사업은 바로 현재 베타 서비스 단계에 있는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다. 이는 단순한 거래 플랫폼을 넘어 디지털 금융 혁신의 거점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최고 수준의 보안 시스템 구축과 함께 기존 금융권과의 협력 체계가 필수적이다. 특히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는 실물자산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자산 거래에 NFT(대체불가능토큰)를 접목하고, DeFi(분산금융) 서비스를 다각화함으로써 글로벌 디지털자산거래소들과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이러한 실물자산 기반의 혁신적 디지털 금융 서비스는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만의 독보적인 강점이 될 것이다. 글로벌 디지털 자산 거래소들과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그 경쟁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
규제 혁신도 시급하다. 개인정보보호법의 유연한 적용으로 AI 학습용 데이터 확보를 쉽게 하고, 블록체인 기술 스타트업에 대한 지원도 강화해야 한다. 동시에 디지털자산 거래의 투명성과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금융 중심지 정책과 디지털 전환의 연계도 중요하다. 문현금융단지를 중심으로 한 전통 금융과 디지털 금융의 융합은 부산만의 차별화된 경쟁력이 될 수 있다. 여기에 항만물류 디지털화까지 더해지면, 부산은 독보적인 경쟁력을 가진 디지털 금융의 허브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인재 양성과 유치도 핵심 과제다. 부산시는 지역 대학들과 협력해 AI와 블록체인 분야의 전문 교육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실무 중심의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국내외 우수 인재 유치를 위한 파격적인 지원책도 필요하다. 쾌적한 정주 여건 조성부터 연구 지원까지, 다각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년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다. AI와 블록체인 분야는 고급 인력에 대한 수요가 많고 처우도 우수하다. 부산시는 혁신 기업 유치와 스타트업 육성을 통해 청년들이 떠나지 않고 꿈을 펼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야 한다. 나아가 전국의 젊은 인재들이 모여드는 혁신의 중심지로 거듭나야 한다.
중앙정부의 혼란 속에서도 부산은 흔들림 없이 전진해야 한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에서 부산은 제3의 축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위기의 시대, 기회는 준비된 자의 몫이다. 글로벌 디지털 금융의 새로운 중심지를 꿈꾸는 부산의 도전은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경제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 디지털 혁신의 시대, 부산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차례다. 중앙정부와 부산시, 기업, 시민 모두가 힘을 합쳐 이 역사적인 도전에 동참해야 할 때이다.
2025-02-10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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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적전분열(敵前分裂)
1592년 음력 4월 13일. 부산포와 다대포, 서평포가 함락되면서 조선이 경험한 가장 비극적인 전쟁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전쟁을 미리 감지할 수 있는 징후는 얼마든지 있었다. 1589년 당시 실질적인 대마도주였던 소 요시토시가 승려로 위장해 조선을 찾아오면서 몇 정의 조총을 갖고 왔다. 자세한 내용이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소 요시토시는 당시 일본에서 전쟁의 총아로 자리 잡은 조총의 위력을 조선에 알리려고 하였던 것 같다.
조총은 이미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직한 조총 부대는 다케다 가쯔요리가 거느린 일본 최강의 기마 군단을 궤멸시켰다. 전쟁의 패러다임이 극적으로 바뀐 것이다. 어릴 때부터 말을 타고 활 쏘는 훈련을 거듭한 기마 무사가 잠시 조총 훈련을 받은 일반 백성에게 힘을 못 쓰게 됐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50만 정의 조총을 보유했는데, 이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이었다. 즉 일본군은 세계 최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은 승자총통이라는 산탄과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개인 화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의 주력 무기인 조총의 위력을 과소평가했다.
그러나 승자총통이 분대 화기라면, 조총은 개인 화기였고, 전 병력이 조총을 사용한다면 그 위력을 가늠하기 어렵다. 당시 조총은 50m 거리에서 70%, 100m 거리에서 10%의 명중률을 보였고, 장전하는 데 30초 정도가 걸렸다. 기마 무사가 전력으로 말을 달리면 50m는 4초, 100m는 7초에 주파할 수 있었다. 이론상으로 기마 무사가 조총을 가진 보병에게 우위를 점할 수도 있지만, 조총의 숫자가 많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3000명이 한꺼번에 조총을 쏘면 일시적으로 화망이 형성되면서 명중률은 급격히 높아진다. 서너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교대로 쏘면 재장전의 약점도 무의미해진다.
1575년 나가시노 전투의 재판이 바로 신립 장군의 탄금대 전투였다. 말을 타고 달리는 상태에서 쏘는 활의 유효사거리는 20m에 불과하다. 이미 조총으로 기마 무사를 무력화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일본군 앞에 신립의 기마 부대는 추풍낙엽이었다. 부산포가 함락된 지 불과 보름 만의 일이다.
조선은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소 요시토시가 한양에 온 지 다섯 달 만에 조선은 황윤길·김성일·허성 등을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들의 정세 보고는 서로 달랐다. 서인인 황윤길과 허성은 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동인이었던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이 쥐같이 생겨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심각한 적전분열 상태였던 것이다.
이들이 일본을 왕래하는 데엔 1년이 걸렸고, 교토에는 적어도 3개월 이상 머물렀다. 김성일은 산에 올라 일본의 도성을 보았고 한시도 지었다. 고매한 학자이기도 한 김성일은 왜 일본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까. 그뿐만이 아니다. 통신사가 귀국할 때 회례사로 겐소라는 승려가 따라왔다. 그는 임진왜란 전부터 조선을 왕래하였으며, 조선과 일본의 국교 회복 과정에서도 활약했다. 겐소는 김성일에게 히데요시가 중국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까지 거듭 밝혔다. 그렇게 많은 전쟁의 징후를 접하면서도 왜 김성일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 그런 김성일이었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최전선에서 활약하였고, 결국 1593년 진주성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극좌와 극우의 대립은 조선 시대 동인과 서인의 대립보다 더 심각하다. 조선에서는 군자와 소인의 다툼이었다면, 지금은 서로를 ‘빨갱이’라고 부른다. ‘종북 빨갱이’에 이어 ‘내란 빨갱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말로만 싸우는 게 아니라, 폭력도 난무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엄혹하고 위태롭기 짝이 없는데, 우리는 서로 빨갱이, 파시스트라고 부르며 서로 타협할 의사도 없다.
일부 정치인들은 이러한 분열과 대립을 부추기고 있고, 돈을 목적으로 하는 탐욕스러운 유튜버들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보다 더한 적전분열이다. 우리는 400년 전 우리 조상보다 더 못났고, 더 모진 사람들이 되었다. 그때 조상들은 전쟁이 일어나자 동인, 서인이 하나 되고 관민이 뭉쳐 국난 극복에 노력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마치 현재의 평화가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내부의 치졸하고 소모적인 싸움에 골몰하고 있다. 나라가 없으면 국민도 없다. 오랜 주입식 교육의 부작용일까. 정보와 선동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거짓 정보나 왜곡에 휘둘리지 말고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력을 회복해야만 할 때다.
2025-02-05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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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대한민국 법치, 어디로 가는가
변호사들은 법정에 들어갈 때나 재판 종료 후 법정을 나설 때, 문 앞에서 재판부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한다. 판사가 보든 안 보든, 이는 사법 정의가 실현되는 공간인 법정에 대한 존엄과 재판부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오래된 관행이다. 때로는 재판 결과가 예상치 못하게 불리하거나 우리의 주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고 느껴, 재판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해도 결국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 판단을 존중하고 수용한다. 그것이 법치주의다.
그러나 최근 벌어진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 사태는 법치주의의 근본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에 반발한 지지자들이 법원을 습격하고 시설을 파괴하며 폭력을 행사했다. 마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무법천지의 혼란 속에서 법의 권위는 짓밟혔다. 이에 대해 대법관들은 긴급회의를 열어 “법치주의에 대한 전면 부정”이라며 경고했고, 이러한 극단적 행위가 반복된다면 대한민국의 존립조차 위태로울 것이라 우려했다.
일각에서는 법원 침입 폭동 사태는 법치국가에서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입을 모으면서도, 그 뒤에 “오죽하면” “그렇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이며 그간 사법부가 그러한 빌미를 제공했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야당 대표라고 영장을 기각하던 법원이 왜 대통령에게는 영장을 발부하냐, 누구는 왜 항소심 실형 선고를 하고도 법정구속을 하지 않아, 국회의원까지 하도록 내버려뒀냐, 누구는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도록 재판을 질질 끌어줬냐는 등, 법원의 형평성 없는 판단에 사람들이 “오죽하면” 그랬겠냐는 말을 덧붙인다. 사법부의 개별 판단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다. 이는 헌법상 보장된 권리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얼마든지 토론할 수 있는 주제다. 그러나 법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 판결을 했다고 해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싸움에도 룰이 있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이러한 사태를 두고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교묘히 정당성을 부여하고 두둔하는 논리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고, 결국 법과 질서를 무너뜨릴 뿐이다.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여소야대 정국에서 극한의 정치적 대립이 이어졌고, 이는 결국 12월 3일 계엄선포라는 초유의 사태로까지 치달았다. 그날 밤의 충격과 불안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연이어 벌어지는 사건과 비극적인 참사 속에서 매일 혼란을 겪고 있다.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체포되고 구속 기소되면서, 공수처·경찰·검찰 간의 갈등이 법원 폭동 사태를 거쳐 헌법재판소까지 확산되고 있다. 지난 주말 부산역에서는 대규모 탄핵 반대 집회가 개최되면서 국민도 반으로 나뉘어 극단적인 대립 양상을 보이고, 음모론까지 더해져 상대 진영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는 더욱 거세지고 있다.
특히 형사재판을 받고 있는 야당 대표의 출마 문제를 둘러싸고, 조기 대선을 추진하려는 세력과 이를 막으려는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헌법재판소의 판단에까지 정치적 논란이 번지고 있다. 중심을 잡고 법을 해석해야 할 법조인들이 오히려 정파적 입장에 따라 교과서에서도 보지 못한 논리를 동원하며 아전인수격으로 법 해석을 하는 모습을 보니 앞날이 캄캄하다. 심지어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임명 부작위 사건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다 해도, “권고적 효력”에 불과하다며 최상목 권한대행이 마은혁 후보를 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이대로라면 헌법재판소와 법원이 그 어떤 결정을 내놓아도 수긍하고 갈등이 가라앉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러나 이제는 법의 시간이 왔다. 대한민국은 헌정 국가이자 법치국가다. 헌법재판소와 사법부의 판단은 존중되어야 하며, 이는 그 결정이 항상 옳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법치주의를 기반으로 사회를 운영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법은 그 자체로 힘이 없다. 사회 구성원들이 이를 지키기로 하고 실천할 때 비로소 힘을 갖는다. 법의 권위를 공격하고 헌법재판소의 정당성을 의심하면서 흔들기가 계속된다면, 결국 법치주의는 붕괴하고 법은 정치적 무기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헌정질서의 근본이 위태로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법과 원칙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순간적인 분노와 정파적 이해에 휩쓸려 헌정의 질서를 허물 것인가. 우리가 지난 수십 년간 쌓아온 민주 헌정에 대한 신뢰와 합의를 믿고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그 근본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 이는 여야, 보수와 진보를 떠나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자, 우리 사회의 근본 가치다. 헌법재판관들은 법대 위의 존엄을 상기하며,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떠나 오직 헌법과 법률에 따라 독립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2025-02-0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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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트럼프와 머스크의 자유민주주의
대선부터 취임까지 도널드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가 보여주고 있는 끈끈한 정경유착을 두고 그들의 만남을 “혁신”이라 부르며 선망하는 시선도 생겨난 것 같다. 미국의 정치는 기업이 정치인에게 거액을 공개 기부하는 사례가 흔하고 총기협회와 같은 로비단체의 활동도 강력하기에 정경유착을 꺼려온 우리에겐 낯설다.
소위 근대화를 이뤘다고 평하는 대다수 국가는 사회를 지탱하는 두 축으로서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나란히 자리한다. 한국은 기적과도 같은 경제성장과 함께 민주화를 성취해 내며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이룩한 국가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조선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사회라는 것은 좌우파를 불문하고 동의하는 부분일 것이다. 대부분의 비서구권 국가에게 근대화는 과거사와의 단절로 인식된다.
서양사에서도 근대는 중세와의 선명한 단절로 이해되곤 한다. 신 중심 세계관에서 인본주의 세계관으로의 이행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유럽의 근대화는 내재적이라는 점에서 비서구권의 근대화와 다르다. 서양 근대사는 중세와 완전히 결별하지 않았다. 반면 비서구권의 근대화는 마치 유성과 충돌한 사건처럼 내재적이기보다 외재적인 충격으로 보인다. 이는 비서구문명이 지체된 사회였기 때문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서양사에서 중세와 근대는 연장선에 있다. 이는 ‘중세-신-성경-기독교-구원’과 ‘근대-자본-헌법-민주주의-자유’라는 나란한 병렬관계로 정리된다. 거친 도식화지만 살을 발라내고 뼈대만을 남겨 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서양 중세의 정치권력은 왕과 영주에게 세속권력이, 교황과 성직자에게 도덕권력이 분리된 세계였다. 세속권력과 도덕권력은 종종 갈등을 빚더라도 교황이 우위에 있었다.
종교개혁 이후 근대는 종교의 자리를 경제로 대체했다. 상이해 보이지만 도덕(좋음)의 가치가 기독교 교리에서 양적 공리주의와 자유방임주의로 바뀐 것이다. 구도의 핵심에 놓인 성경과 헌법은 인간에 의해 구성된 것이지만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며 신과 자본을 지탱한다. 신과 자본은 실재적으로 감각될 수 없기에 그를 대표하는 사람, 교황과 자본가, 더불어 성경과 헌법에 접속할 수 있는 성직자와 법률가가 정치권력집단이 된다. 자본이 시공간에 구속되지 않는 신과 같은 지위를 누림과 동시에 인간처럼 권리주체가 되는 것은 ‘법인격’ 개념에서 비롯된다.
서양의 정치사상은 중세 정치신학에서 근대 정치경제학으로 변환되었다. 철학적으로 빈곤한 정치는 괄호 쳐두고 신학과 경제학이 핵심적이다. 민주주의를 ‘민심이 천심이다’와 같이 해석할 수 있지만 사실 그러한 말씀의 모토는 헌법이 담당한다. 성경 말씀처럼 헌법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순종은 필수적이다. 말씀의 실천은 다수결이라는 덕을 고정시켜 놓고 이를 선거라는 ‘훌륭한’ 행위를 통해 품성으로 습관화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실천과 닮았다.
이제 트럼프와 머스크 관계로 돌아가 보자. 쿵짝이 잘 맞던 왕과 교황이 있던 것처럼 대통령과 자본가로 연상할 수 있다. 이 같은 이원적 세계관은 유럽문명에서 나타난 매우 독특한 형태였고 조선을 비롯한 한국사에서 또한 동아시아 정치사상에서 존재를 상상하기 어렵다. 현세를 부수적으로 취급할 수 없는, 치(治)와 덕(德)의 영역은 분리가 아닌 통합된 일원적 세계관이었기 때문이다.
머스크의 화성 이주 계획과 테라포밍(환경 개조)은 제국주의 시기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를 개척하고서 행했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 예컨대 브라질산 고무나무를 말레이시아로 가져와 국토 전체를 고무판으로 만들어버린 생태재앙적 프로젝트를 동일한 발상으로 화성에 위치만 옮겼을 뿐이다. 그가 지구를 넘어 화성을 노래하는 것 역시 현상계 밖의 초월계를 갈망했던 서양 지성사의 이원적 사고에 기인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트럼프 당선과 머스크 합체는 현대 미국 ‘덕치’의 논리적 귀결로 보인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의 도덕은 이기적 개인의 효용 극대화여서 타자에 대한 윤리가 없다면 승자 독식과 불평등 심화를 수반하며 이는 자국과 세계 정치 위험과 혼란의 부메랑이 된다. 물론 정치의 최우선 덕목인 청렴함과 이타심을 추방시킨 윤리 상실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종속적 친화성은 당위적 주장이 아니다. 윤 대통령과 극우 세력이 특히 찬양하는 미국식 민주주의에서 정부는 자유시장경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비판에 가깝다. 그럼에도 계엄사태로 민생과 국가경제를 박살 낸 현 정권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는커녕 오히려 그 사상적 토대에 따르면 가장 부도덕한 최악의 정치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 걸까.
2025-01-22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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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발 글로컬과 퐁피두
‘부산 인문연대’라는 이름의 시민학술단체가 부산에서 5년째 활동하고 있다. 다른 지자체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경우다. 부산 시내 7개 대학의 연구소와 학술원, 시민인문교육기관, 문화공간 등 18개 단체가 그 안에 들어 있다. 인문연대가 표방한 지난해의 대의제는 ‘글로컬 시대의 인문학-지역과 세계의 만남’이었다. 초국가적인 경제·문화적 지배 체제와 서울 일극 중심의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 공동체의 인문정신을 살려낼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였다.
지난해 9월에는 처음으로 공동 학술행사를 기획하여 ‘동북아 지역의 글로컬 현황과 과제’라는 주제로 부경대에서 이틀간 행사를 했다. ‘글로컬 시대의 보편적인 삶과 철학’ ‘부산발 글로컬 문화콘텐츠 육성 방안’ ‘한류의 새로운 방향성’ ‘바람직한 다문화사회 형성을 위한 상호 문화교육’, 이렇게 4개의 방향이었는데, 일반 시민이 의외로 많이 참여하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로컬의 시선으로 본 세계문학’이라는 별도의 국제 학술포럼도 열렸다.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문학적 성과를 부산 문학과 접목하는 자리였다. 개별 단체들도 자기 단체의 전문성과 개성을 고민하며 1년 내내 분주하였다. ‘서사와 기억장치로서의 문화 비교’ ‘청소년 비평 공모’ ‘한자의 문화 편력’ ‘창작곡 연주회’ ‘시네마 수필-일상으로의 초대’ ‘찾아가는 해역 인문학’ ‘배 위에서의 문화유산 아카데미’ ‘금요 인문학’ ‘지역성의 혁명: 지역 도시 주권 확립의 문제’ ‘시각 콘텐츠와 지역주의’ 등이 지난해의 주요 프로그램이었다.
진정으로 지역 쇠락 멈추려면
주체적·중장기적 안목 통해
개성 있는 부산문화 지켜내야
거창한 외국 권위 기댄다고
문화도시로 탈바꿈하진 않아
지역 예술 집중 지원 더 중요
이런 노력은 하나의 초점과 방향을 향하고 있다. 올해의 의제도 ‘부산발 글로컬의 모색과 탐구’,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 지역의 문화력과 인문정신을 지켜내고, 우리만의 개성 넘치고 독특한 문화콘텐츠를 만들어가지 않으면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에 흩어져있는 인문 역량, 문화 잠재력을 정비하고 조직화하여 부산만의 주체적이고 개성 있는 글로컬 문화를 만들어나갈 때 우리의 ‘정신 주권’이 바로 서고, 부산의 쇠락도 진정으로 멈출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퐁피두 사태는 대단히 유감이다. 부산시와 시의회는 1000억 원의 공공 건설비와 120억 원의 연간 운영비를 들여 프랑스 퐁피두 미술관의 부산 분관을 꼭 짓겠단다. 수억 년 동안 형성된 천혜의 이기대 해안공원 일대를 허물고 기어이 거기에 서구 미술관 분관을 유치하겠다는 모양이다. 중국 상하이에도 있고 서울 63빌딩에도 들어선다는 퐁피두 분관을 굳이 부산에 여분으로 또 지어야 할까. 게다가 이 엄청난 사업을 밀실에서 비공개로, 단 한 번의 이렇다 할 시민 공청회도 없이 밀어붙이고 있다고 한다. 5년간 운영 뒤에는 미술관 처분권을 전적으로 프랑스 측에 넘기고, 재개발 비용까지 100% 부산시가 떠안는 악조건을 감수하고서 말이다. 프랑스 법에 따라 프랑스어로만 작성한 비밀 계약서도 문제이다. 소싯적에 기자 생활을 해본 필자의 개인적 공상일 수 있는데, 그 어떤 세력과 ‘뒷배들’ 사이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슨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이럴 수 있을까 싶다.
돌아가는 일이 이렇다 보니 문화예술계는 물론이고, 경제와 관광 분야 등의 일부 단체를 제외한 다수의 시민사회단체와 지식인들이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퐁피두 분관 부산 유치 반대 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도 ‘퐁피두 분관 반대 대학교수 성명서’에 150여 명의 동료와 함께 이름을 올렸다. 부산에는 이미 부산시립미술관과 부산현대미술관이 해운대와 을숙도에 있다.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부산을 글로컬 도시로 만들려면 막대한 예산을 들여 훌륭하게 지은 이런 공공미술관을 잘 키우고 육성하는 일이 더 급하다고 생각한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외국계 대형 명소 유치보다는 지역 화가와 문화인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게 더 중요하다.
부산의 자매도시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 가면 예카테리나 2세가 서유럽 회화와 조각을 잔뜩 사서 모아놓은 유명한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있다. 그러나 정작 러시아인들은 ‘이동파’를 비롯한 자기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미술관’과 페테르부르크 ‘러시아미술관’을 더 아낀다. 서유럽에서 각종 예술사조를 늦게 받아들였어도 자생력을 키우는 노력 덕에 그 나라는 지금 세계적인 예술의 나라가 되어있다. 외국의 권위에 굴종적으로 기댄다고 부산이 하루아침에 고급의 문화도시로 탈바꿈하진 않을 것이다. “전국 어디에도 없는 김소월문학관을 부산에 먼저 짓자”라는 제안을 여기저기 수년째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지역의 유력인사들이나 공무원들에게서 듣는다. “소월이 이북 출신이지 부산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러면 묻고 싶다. “프랑스인 퐁피두는 부산 사람인가요?”
2025-01-2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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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윤 대통령의 '자유와 연대'의 귀결점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7분께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내 정치와 관련해 그는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해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최대 업적으로 자평해 온 외교와 관련해서는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책임과 기여를 다한다는 대외 정책 기조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고 했다. 비상계엄은 시민들의 반대 시위와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통과로 6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국민의 자유를 짓밟은 윤 대통령의 행위가 국내 정치와 대외 정책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윤석열 정부는 약 2년 반 전인 2022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여덟 번째 정부로 출범했다. 검사 출신의 정치 신인 윤 대통령이 국정철학으로 제시한 것은 다름 아닌 ‘자유와 연대’였다. 자유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연대를 실천 수단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는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을 시작으로 무수한 역사적 사건과 격변의 계기를 거치며 긍정적인 의미로 자리매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체와 방식에 따라 역설적인 상황을 초래했다. 또 연대의 대상에 따라 편 가르기식 대결 구도를 고착시키는 논쟁적 개념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예로는 자유를 강조하고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국민의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탄압했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권위주의 정권을 들 수 있다.
어쨌든 본인의 가치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책으로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를 꼽았던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를 무려 35번 언급한 것을 시작으로 역대 대통령들이 식민지 역사를 돌아보면서 국가의 미래상을 국민에게 제시해 온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일관되게 자유를 강조했다. 취임 후 처음 행한 2022년 경축사에서는 자유를 33번 언급하면서 독립운동이 세계 시민의 자유를 지키는 것으로 발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2023년 경축사에서는 27번 자유를 말하면서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을 공산 전체주의자나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고, 자유민주주의의 승리에 대한 믿음과 확신으로 이들에 대항하는 연대가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모두 50번 자유를 언급한 2024년 경축사에서는 국민들에게 자유를 위한 투쟁을 요구하는 한편, 자신과 정부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선언했다. 비상계엄 선포는 이렇게 진화해 온 윤 대통령의 자유와 연대의 귀결점인 것이다.
물론, 자유와 연대는 대외 정책에서도 강조되었다. 자유, 평화, 번영에 기여하는 글로벌 중추 국가를 외교 안보 비전으로 제시한 윤 대통령은 미국 뉴욕의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도 가치를 공유한 국가 간의 연대 필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나아가 2023년 3월 한국이 주최한 제3회 민주주의 정상회의에서는 권위주의 세력들의 진영화에 더해 반(反)지성주의로 대표되는 가짜 민주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고개를 들고 있다며 자유·민주 진영 국가 간 연대와 협력에 의한 ‘민주주의를 위한 위대한 여정’을 강조했다. 이러한 진영 논리에 입각해 윤 정부는 한미동맹을 보편적 가치로 맺어진 평화의 동맹이자 번영의 동맹으로, 일본을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로 격상시켰다.
반면 지리·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중국과 러시아를 잠재적 적성국으로 취급해 불필요한 긴장을 조성했다. 또 통일의 대상이자 안보 위협인 북한을 비이성적인 정치 세력으로 간주하고 “북한이 핵을 사용할 경우, 한미동맹의 압도적인 대응을 통해 북한 정권을 종식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이와 같은 윤 정부의 외교 안보 결정판이 바로 2023년 8월 19일 윤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한미일 3국 안보 협력의 인도·태평양 지역으로의 확대를 선언한 캠프 데이비드 선언이었다.
그러나 비상계엄 선포는 자유를 토대로 한 한미일 연대의 기축을 흔들었으며, 한국 대외 정책의 국제적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렸다.
자유와 연대를 내세워 추진해 온 윤 대통령의 국내 정치와 대외 정책은 본인의 12·3 비상계엄으로 종말에 처했다. 만약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다면 그 정부는 후과를 잘 정리해 민주주의 국가로서 대한민국을 재정립하고, 안정된 국내 정치를 기반으로 국익과 실용에 입각한 한반도 평화 확보와 국제사회에 공헌하는 외교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그날이 조속히 오기를 바란다.
2025-01-1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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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디지털 자산’ 전통 금융시장 본격 진입 원년
블록체인 기술은 4차 산업혁명과 웹 3.0의 핵심 기술로 주목받으며 전 세계적으로 큰 기대를 모았다. 이에 따라 코인과 토큰은 주요 투자 대상으로 떠오르며 대규모 자본이 유입됐다. 코인을 거래할 수 있는 거래소가 생겨나면서 블록체인 기업이나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는 프로젝트들은 주식 대신 코인 발행을 통해 자본을 조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신기술을 일찍 접한 젊은 투자자들이 열광했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 세계가 디지털 자산에 눈뜨게 되었다.
하지만 블록체인에 대한 거품이 꺼지면서 부작용이 발생했고 투자자 보호를 위한 규제 도입이 요구되었다. 폰지 사기와 같은 극악무도한 사례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며 피해를 입은 투자자들의 호소도 이어졌다. 이에 각국 정부가 적극 개입하면서 강력한 규제를 시행했다. 그런데도 천문학적인 자금이 코인 거래에 유입되고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일일 거래량이 주식시장을 초과하는 상황까지 생겼다.
투자를 강요받거나 누군가에 의해 등 떠밀리지 않는 한 투자로 인한 모든 책임은 투자자 자신에게 있다. 이제는 코인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자산을 단순히 실체가 없다거나 사기적이라고 치부하기보다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경제적 현상이며 거대한 흐름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됐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의 이익을 극대화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 관점에서 2025년에는 디지털 자산과 관련해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예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스테이블 코인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 가능성을 확장해 나가는 한편 실물 자산을 블록체인 기반의 디지털 자산으로 변환시키는 작업, 즉 자산 토큰화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이 24시간 국경 없는 거래와 더욱 효율적인 거래를 위해 발전해 왔는데 이런 흐름에서 스테이블 코인과 토큰화는 그동안의 난제들을 해결해 줄 것으로 보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은 금융 분야에서 적극 채택돼 전통 금융시장에 디지털 자산을 융합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전통 금융시장에서 그러했듯이, 디지털 자산 시장에서도 보다 정교한 규제가 생겨나고 ‘거래-청산-결제’ 과정에 참여하는 각 주체의 기능이 분화되고 전문화될 것이다. 일본은 스테이블 코인을 위한 규제를 이미 마련해 시행하고 있고 유럽은 MiCA(가상자산시장 규제안)를 도입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토큰증권과 관련된 법률 개정을 준비 중이고 가상자산 2단계 법안도 논의 중이다. 현재 주식시장만 보더라도 거래가 일어나는 거래소 외에도 증권사, 예탁결제원, 은행 등이 각자의 역할을 나눠 수행하고 있듯이 거래소에 집중돼 있던 기능들이 커스터디 등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즉, 2025년은 디지털 자산이 전통 금융시장에 본격적으로 편입되는 해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내 시장에서도 법인의 디지털 자산 투자가 허용될 전망이다. 사실 디지털 자산 투자를 제한하는 법률은 없지만, 금융당국의 보이지 않는 규제로 기관투자자가 시장에 진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로 인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개인들만 디지털 자산 투자가 가능한 기이한 모습을 띠게 되었고 ‘김치 프리미엄’과 같은 시장 왜곡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단계적으로 기관투자자의 진입이 허용되면서 전문가를 통한 투자가 가능해져 개인 투자자 입장에서는 리스크 관리 등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또한 디지털 자산을 기반으로 한 현물 ETF와 같은 새로운 상품 출시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해외에서는 현물 ETF뿐만 아니라 선물, 옵션, 지수펀드 등 다양한 금융상품이 출시되었고, 국내 투자자들도 상당한 규모로 해외 업체를 통해 투자하고 있다. 이 때문에 현물 ETF 허용은 오히려 뒤늦은 조치로 여겨지며 국내 증권사들은 이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증권사뿐만 아니라 시중은행들도 디지털 자산 시장으로 보폭을 확대할 것이다. 결국 국내에서도 디지털 자산의 금융시장 진입이 가속화되고 투자자 확대와 상품 다양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산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 등 관련 분야를 담당하는 부산시 과장급 실무자가 바뀌어 추진력이 저하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부산·경남 기반의 은행이나 금융기관도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디지털 자산 거래는 정부기관, 관공서, 학교, 비영리법인 등에서 이미 허용돼 있다. 부산시는 부산에 본사를 둔 공기업을 비롯해 법원, 검찰, 세무서 등 관공서에도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요청하고 협력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부산이 금융 중심지, 나아가 허브도시로 성장하는 데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특별법이 제정되어도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2025-01-13 [1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