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의 생각의 빛] 폭풍의 계절에 읽는 한 권의 세계
문학평론가
가볍고 빠르며 잇속 몰두하는 세태
떨어져 시든 꽃잎 닮은 지친 사람들
시간 멈춘 풍경서 꿈과 용기 얻기를
이사한 동네에 오래된 미장원이 있다. 들어보니 40년가량 영업을 해오셨다. 한창 젊었을 적 개업한 모양으로 일흔을 넘긴 듯한 주인에게 미장원 상호와 똑같은 이름의 목욕탕이 마주하고 있어서 그 ‘선후관계’가 어찌 되냐 물으니, 목욕탕이 먼저라 한다. 미장원 맞은편에 2층 주택을 리모델링한 듯 1층에는 맥줏집이, 목욕탕은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지만 그 목욕탕은 시내에 있는 큰 규모의 대형 목욕 및 사우나 시설과는 비교할 수도 없게 조그맣다. 앙증맞은 크기의 목욕탕과 미장원을 사이에 둔 골목을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재잘거리면서 지나간다. 문구점, 안경점, 미장원, 분식점, 편의점 등의 가게들이 오밀조밀 밀집해 있는 골목을 지나면 더러 30여 년 전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봄도 한복판이 거의 지나 이제 여름 초입에 들어선 이때, 최근 1~2년 사이에 우리가 경험한 세계를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하루도 쉴 새 없이 숨 가쁘게 들썩였던 나날이었다. 잊을 만하면 터지곤 하는 대형 사고를 비롯하여 진영 간 끝없는 모략과 비난으로 잠잠할 날이 없는 정치권, 기득권 세력의 만연한 탈세 및 불법행위와 계층·지역·신분·성별·세대에 따른 배타주의가 여전한 요즘이다. 게다가 선거가 다음 달 초에 예정되어 있어서인지 오전부터 교차로나 인파가 붐비는 공간에서 선거에 입후보한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공약과 정책을 호소하는 풍경까지 더해 시내 곳곳은 어수선함과 괜한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부쩍 늘어난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는 국제시장을 비롯하여 자갈치시장이나 부평깡통시장 등의 되살아난 활기도 한몫해서인지, 눈뜨고 집을 나서면서부터 밤에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세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한다.
이렇게 왁자지껄한 도심에서 사람들과 얽혀 살아가는 일은 여러 체험을 할 수 있어서 삶의 공부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백척간두에 놓인 듯 언제 진창 같은 세계의 바닥으로 추락하거나 휩쓸릴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먼 나라에서 진행 중인 여러 전쟁 소식과 이에 영향을 받아 기름값이 치솟는 현실에 정부의 대책과 위정자들의 낙관적인 호소에도 마냥 안심할 수 없는 듯한 시민들의 표정이 봄바람에 떨어지는 시든 꽃잎처럼 그을려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내 주식 시세가 올라야 한다, 몇 번을 찍어야 한다, 그 집 돼지국밥이 제일 맛있더라, 어느 병원에 가면 싸게 진료받을 수 있다, 그 사람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다,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등등.
한없이 가볍고, 재빠르고, 요령을 부리면서 잇속을 챙기고, 티 나지 않게 생활하면서 은근히 자금을 불리고, 집값과 주식에 몰두하면서 교양을 두르려 하고, 온 데 간 데 모르는 마음이면서 확신과 맹신을 일삼고, 모자란 게 없는데도 욕심을 내면서 타인을 질시하고 스스로를 높인다. 편리해진 기술의 사용에 여가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기면서 마음의 평화와 고요를 견디지 못하는 우리 자화상을 떠올린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다르게 지나가 버린 시간이 옛날이야기처럼 여겨질 때가 잦다. 언제 우리가 그런 시간을 거쳤는지 까마득하게 멀어진 세계를 뒤로한 채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속의 불안과 기대에 온 정신을 내맡기기 일쑤다. 이런 모든 게 변화와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익숙해지고 단련된 현대인의 마음 풍속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몸에 각인된 면역체계처럼 환경과 시대조류에 관계없이 그 맷집을 유지할 것이다.
일과가 끝나 어스름이 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생각한다. 나와 한 버스를 탄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방향과 목적으로 혼란스러운 이 세계 모퉁이에서 무늬를 그리고 있는지 말이다. 뜬구름 같은 말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한없이 가볍고 힘겨운 마음으로 걸어가는 이 길 위에서도 아름다움은 곳곳에 스며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대체로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하면서 평온함을 지속적으로 불어 넣는 것은 바다와 산과 강과 도시와 길과 골목과 사람이 예전부터 뒤척거리고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잃어버리지 않고 지키려 했던 ‘항상심(恒常心)’이라는 이름의 선물 때문이지 않을까. 변하는 속에서도 꾸준히 간직하면서 지키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의지는, 요즘처럼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 든든하면서도 은은한 등불처럼 늘 꿈과 용기를 안긴다. 오랜 항구를 낀 바다와 발전소를 지나, 마치 시간이 멈춰 선 듯한 우리 동네에 내리면서 올라가는 골목을 들여다보면 책을 읽듯 담벼락이나 길바닥에 흘러 지나갔던 시간의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혼란스럽고 시끌벅적한 이 시대에도 언제든 돌아가서 뒤적거리면서 배워야 할 진실이 있는 손때묻은 책처럼, 새로운 ‘한 권의 세계’는 사실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