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왜 우리는 파멸하는 사랑에 끌리는가
영화평론가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컷.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왜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사랑에 이토록 쉽게 매혹될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언제나 비극을 갈망한다. 금지된 관계에 숨을 죽이고, 파멸로 치닫는 선택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정작 내 사랑은 평온하길 바라면서도, 이야기 속 사랑만큼은 처절하게 앓기를 기대한다. 도대체 사랑 때문에 인간은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잔인하고도 아름답게 표현하는 작품이 바로 ‘폭풍의 언덕’이다.
에밀리 브론테의 고전 소설 ‘폭풍의 언덕’은 이미 수차례 영화화되었다. 그럼에도 이 오래된 서사가 여전히 소비되는 이유는 사랑을 집착과 소유의 감정으로 그려내기 때문일 것이다. 에머럴드 피넬 감독도 ‘폭풍의 언덕’을 영화화하면서 낭만적인 사랑 따위 없다는 듯 집요한 사랑으로 우리를 옭아맨다. 그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불편하지만 동시에 강렬하다. 어쩌면 이 양가적 감정이야말로 작품의 힘일지 모르겠다.
에머럴드 피넬 감독 '폭풍의 언덕'
낭만적인 사랑 따위는 없다는 듯
파국의 그림자 들이미는 오프닝
원작 답습 피하려는 감독의 선택
영화는 요크셔의 황량한 저택 ‘워더링 하이츠’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느 날 저택의 주인 언쇼가 술에 취해 고아 소년을 집으로 데려온다. 하녀들은 가난한 가문에 입이 하나 더 늘었다며 달갑지 않아 하지만, 언쇼의 딸 ‘캐서린’만이 친구가 생겼다며 기뻐한다. 이름 없는 소년에게 죽은 오빠의 이름까지 지어주며 환하게 웃는 캐서린. 난생처음 ‘히스클리프’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이 아름다운 소녀를 눈에 담는 건 당연하다.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에게 강하게 끌린다. 이때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만 캐서린은 끌리는 마음을 외면한다. 몰락했음에도 귀족이라는 신분 의식과 화려한 상류 사회를 동경하는 욕망이 그녀를 억누른다. 그러는 사이 캐서린은 부유한 자산가 에드가의 구애에 흔들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히스클리프는 깊은 오해를 품은 채 저택을 떠나고 만다. 이 비극적인 엇갈림은 언뜻 흔한 멜로드라마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이를 전형적으로 풀어내지 않는다. 감독이 원작을 답습하지는 않겠다고 말한 것처럼 감정을 설명하기보다는 체험하게 만든다. 달콤한 서사를 쌓아 올리는 대신 사랑이 닿게 될 파국의 그림자를 먼저 들이미는 식이다. 이러한 태도는 오프닝에서부터 분명하게 표현된다.
영화는 암전으로 시작한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낮은 신음이 새어 나온다. 잠시 사랑의 유희라 오해했던 그 소리는, 곧 교수대에 매달려 서서히 죽어가는 남자의 고통 섞인 비명임이 드러난다. 복면을 쓴 남자가 마지막 숨을 붙잡고 몸부림치는 순간, 이를 지켜보던 군중은 기다렸다는 듯 환호하며 즐거워한다. 죽어가는 자의 신음과 구경꾼들의 환희가 뒤섞이는 이 기이한 시작은 영화에서 중요하다. 사랑이 순수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 폭력과 욕망, 집착과 파멸이 뒤섞여 있음을 감각적으로 예고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처럼 사랑과 파국을 한 기운 속에 묶어둔다. 또한 그 분위기는 화면을 끊임없이 메우는 안개와 비, 바람으로 구체화된다. 짙은 안개는 저택과 황야를 뒤덮으며 시야를 가릴 뿐 아니라, 인물들이 선 감정의 경계마저 흐릿하게 만든다.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모호한 풍경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두 사람이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에는 어김없이 장대비가 쏟아진다.
결국 영화가 도달하는 것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다. 서로를 파괴함으로써 증명되는 사랑임을 황량한 풍경과 걷히지 않는 안개, 그칠 줄 모르는 비를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사랑과 죽음이 교차하는 자기 파괴의 서사는 역설적이게도 지독히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남는다. 파멸할 것을 알면서도 끝내 눈을 떼지 못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비극에 매혹당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