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만점 일곱가지 상권, 상인이 만들고 시민이 채우다 [도시 부활, 세계에서 길 찾다]
④ 겐트 ‘퓨어 겐트’ 전략
시는 제도 마련, 상인은 상권 운영
활성화 전략도 상인이 직접 기획
시청은 예산 지원… 개입 최소화
상인·시민 회의서 모든 의사 결정
창의적 상점으로 ‘도시 매력’ 더해
벨기에 겐트시에서는 시청과 상인이 함께 참여하는 비영리조직 ‘퓨어 겐트’를 통해 상인이 상권 활성화 방안을 직접 결정하고 시청은 이를 지원하는 역할에 집중한다. 지난 5월 퓨어 겐트가 기획한 브라데리 푸블리크 행사 모습. 겐트시청 제공·탁경륜 기자
지난 5월 퓨어 겐트가 기획한 브라데리 푸블리크 행사 모습. 겐트시청 제공·탁경륜 기자
벨기에 겐트시에서는 시청과 상인이 함께 참여하는 비영리조직 ‘퓨어 겐트’를 통해 상인이 상권 활성화 방안을 직접 결정하고 시청은 이를 지원하는 역할에 집중한다. 시내 상점에서 휴식을 취하는 시민들. 겐트시청 제공·탁경륜 기자
벨기에 겐트시는 수도 브뤼셀에서 북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인구 30만 명 규모의 소도시다. 겐트시는 2010년대 초반부터 도심 상점의 공실이 늘고 거리의 불빛이 하나둘 사라지는 침체기를 맞았다. 여기에 획일적인 대형 쇼핑몰의 입점과 온라인 상거래 확산이 겹치면서 지역 상권은 한층 더 위축됐다.
겐트시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지역 상권이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해법을 모색했고, 그 결과 2015년 비영리 조직 ‘퓨어 겐트’(Puur Gent)가 출범했다. 시청과 상인이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거버넌스 구조로, 시는 제도와 재원을 마련하고 상인들은 직접 상권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일곱 개 생활권으로 개성을 살리다
겐트시는 도심을 지역 특성에 맞게 일곱 개 생활권으로 나누고, 각 지역 상인조직이 직접 상권 활성화 전략을 기획·실행하는 구조를 마련했다. 도시 경쟁력이 개성과 다양성에서 나온다고 판단한 겐트시는 개별 점포 지원보다 지역 전체가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도시 중심가에 위치한 ‘겐트 센트럴’(Gent Central)은 카페와 서점, 공연장이 모여 있는 지역 상권의 핵심 공간이다. 관광객과 시민이 하루 종일 뒤섞이며 가장 활기가 넘치는 지역으로 꼽힌다. ‘소고’(SoGo)는 고급 부티크와 유명 브랜드 매장이 자리한 럭셔리 쇼핑 거리로 알려져 있다. ‘링커뢰버’(Linkeroever)는 예술가와 미식가가 찾는 감성적인 거리로 조성돼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생피터르역 주변의 ‘쿼티에 생피터르’(Quartier Sint-Pieters)는 젊은 층이 많은 쇼핑 중심지로, 수공예품과 창의적인 상점들이 성장하며 도시의 활력을 불어 넣는 모습이다. 중고 서점과 빈티지 브랜드가 공존하는 ‘론트 생야콥스’(Rond Sint-Jacobs)’는 오래된 골목의 멋을 유지하며 지역의 개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듯 각각의 생활권이 저마다의 개성을 지키며 도시 의 매력을 더한다.
■행정, 지원은 하되 개입은 최소화
겐트시는 각 상권이 스스로의 개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행정 개입을 최소화했다. 대신 상권 간 교류와 협력 네트워크를 촘촘하게 구축해 각 상권이 경쟁 대신 협력하도록 유도했다. 지역 교류 행사, 상인 포럼, 시민 공개회의 등을 통해 서로의 전략을 공유하고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은 곳이 바로 퓨어 겐트다. 퓨어 겐트는 일곱 개 상권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구로, 행정 관계자와 상인이 동등하게 참여하는 구조를 갖춘 것이 특징이다. 총회와 이사회, 집행위원회 등 주요 의사결정 기구에는 시청 관계자와 시의회 인사, 지역 상인 대표, 외식업 종사자가 함께 참여해 도시 운영 전반에 적극 관여한다.
거리 조명 설치, 행사 기획, 간판 정비, 홍보까지 모든 결정은 상인과 시민 회의를 거쳐 이뤄진다. 시청은 기본 예산을 지원하고 조직 운영을 돕는 역할을 맡을 뿐, 일방적인 지시는 하지 않는다. 겐트시 관계자는 “예산을 지원하지만 의사결정에는 최대한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각 지역이 스스로 정체성을 만들어가도록 돕는 것이 행정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퓨어 겐트는 겐트시로부터 지난해 기준 약 95만 유로(약 14억 원)의 예산을 지원받았다. 매년 14억~16억 원 규모의 예산이 꾸준히 투입되고, 이 재원은 일곱 개 상권 조직에 분배된다. 각 지역 조직은 이를 바탕으로 자체 계획을 세우고 축제·조명·홍보 캠페인을 직접 집행한다. 시청은 재정 투명성과 공공 목적만 점검할 뿐, 세부 사항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도심 중심가에서 열리는 ‘브라데리 푸블리크’(Braderie Publique) 행사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800여 개 상점이 참여하는 대규모 축제로, 축제 기획부터 홍보물 디자인, 공연 섭외까지 상인 조직이 전담한다. 겐트시는 이 행사에서 약 6만 5000유로(약 1억 원)의 지원금을 지원하고 교통·보안 업무만 맡는다. 퓨어 겐트는 이 과정을 총괄하며 상권 간 협력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밖에도 신생 상점을 홍보하는 ‘오픈샵데이’(Open Shop Day), 지역 공방 중심의 ‘로컬 메이커스 위크’(Local Makers Week) 등 다양한 행사가 연중 이어진다.
■겐트만의 ‘가치’로 관광객 유혹
겐트시는 상점가 회복을 넘어 지역 브랜드 구축에도 힘을 쏟고 있다. 퓨어 겐트는 상권 활성화 전략으로 ‘Only in Ghent’(‘겐트만의 브랜드’를 의미)를 내세우며, 겐트만의 로컬 음식, 패션, 공예 문화를 강조해 상인과 관광객을 연결한다. 디지털 전략도 확대 중이다. 온라인 상거래 시대에 소상공인이 뒤처지지 않도록 각종 세미나를 진행하며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퓨어 겐트 제도는 지역 소상공인이 도시를 직접 가꾼다는 만족감을 갖는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지역 발전을 위해 스스로 고민하고, 그 결과가 다시 도시 변화로 이어지는 경험이 상인들의 참여를 더욱 끌어올린다는 설명이다. 협력 모델은 실제 성과로도 나타나고 있다. 겐트시에 따르면 주말 체류형 방문객이 늘고 신규 창업률도 꾸준히 상승세다. 지난 5월 나흘간 열린 브라데리 푸블리크 행사에는 도시 인구와 맞먹는 27만 명이 찾았다. 겐트시 관계자는 “시민과 상인이 주체가 된 운영 방식이 지역 상권을 활성화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겐트(벨기에)=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탁경륜 기자 tak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