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개미의 숙제
신호철 소설가
독립 생물은 기생체 극복 노력
일부 인간 기생 생물 삶 살기도
기생체 점령당해도 본인 몰라
오히려 기생체 두둔하기도
본질 보는 눈 가질 수 있어야
어릴 적에 오래된 기와집에 살았었다. 마당이 있고, 화초가 밀림처럼 우거진 정원도 있었다. 어린 내 눈으론 그렇게 보였었다. 밀림 속엔 개미가 많았다. 옆집 담벼락에 붙은 사철나무 아래엔 꽁무니가 길쭉한 개미가, 대청마루 앞의 천리향 나무 아래엔 엉덩이가 반짝이는 개미가 살았다. 그 외에도 모양이 조금씩 다른 개미가 저마다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유흥거리가 없던 그 시절엔 개미가 만만한 구경거리였다. 개미는 제 덩치보다 큰 과자 조각을 옮기고, 하얀 알을 물고 줄지어 이사하기도 했다. 가끔은 전쟁도 벌였다. 나는 쪼그려 앉아 새카맣게 동원된 두 왕국의 전투를 구경하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개미라는 곤충이 나름 친숙하다. 그들 왕국에 관해 알면 알수록 인간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담흑부전나비’라는 나비가 있다. 이놈은 일본왕개미가 다니는 길목에 알을 놓는다. 길목이라 해봐야 진딧물이 많은 나무줄기다. 알다시피 개미는 진딧물이 내는 단물을 좋아한다. 담흑부전나비 알이 부화하고 애벌레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이놈도 배에서 단물을 낸다. 우연히 애벌레와 마주친 일본왕개미는 이 달콤함에 흠뻑 빠진다. 적당히 즐기면 될 터인데 더 욕심을 부린다. 집안에 두고 언제든 단맛을 즐기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애벌레를 집으로 물고 간다. 그런 개미가 한 둘이 아니다. 단맛에 중독된 일개미들은 자신의 애벌레처럼 그들을 돌봐준다.
이제 애벌레는 아무 거리낌이 없다. 개미 집안을 활보하며 고치와 알들을 잡아먹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개미는 담흑부전나비 애벌레에게 정성껏 영양분을 먹인다. 대신에 달콤한 분비물을 얻어먹는다. 결국, 개미 알들로 살을 찌운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어 우화를 준비한다.
더 극적인 사례도 있다. 가시개미는 독자적으로 왕국을 만들 능력이 없다. 그래서 일본왕개미 둥지로 침입한다. 그녀는 먼저 정찰 나온 일개미 하나를 물고 늘어진다. 그리고 일개미의 페로몬을 몸에 묻힌다. 감쪽같이 변장한 가시개미는 일본왕개미 집으로 침투하고, 이번엔 일본왕개미 여왕을 노린다.
기회를 노려 여왕을 덮친다. 목덜미를 물린 여왕개미는 서서히 죽어가고 그동안 페로몬을 복제한 가시개미는 드디어 새로운 여왕으로 등극한다. 일개미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저 익숙한 페로몬을 풍기는 새 여왕을 핥고 양분을 먹여준다. 한 계절이 지나, 일본왕개미 굴속엔 가시개미 일족으로 가득 찬다. 몇 남지 않은 일본왕개미 일개미는 노예처럼 가시개미의 애벌레를 돌본다.
모든 독립 생물은 기생체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이로 인해 진화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질병을 일으키는 각종 기생 생물은 차치하고, 분명 인간이지만 기생 생물의 삶을 답습하는 부류도 있다. 어찌 보면 숙명적 현상인지도 모른다. 인간도 독립적으로 양분을 얻지 못해, 남의 살과 땀을 섭취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중요한 가치로 보는 부류가 다수를 차지한다.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두려운 것은 일본왕개미처럼 기생체에 점령당했어도 정작 본인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저 원하는 단물만 있으면 주변 상황엔 눈길을 두지 않는다. 냄새만 맡고도 자기편이라 믿어버리는 판단은 또 얼마나 위태로운가. 그렇기에 나 자신이 얼마나 편취당하는지, 혹은 일방적으로 얻어내고 있는지 모르고 오히려 기생체를 두둔하고 있을까 싶어 두려운 것이다.
누구를 탓하는 건 의미가 없다. 어차피 기생 본능을 가진 이는 그에 관한 어떤 자책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걸 자연의 섭리라 한다면, 기생 당하지 않기 위한 삶의 지혜 또한 섭리다. 본질을 보는 눈, 이것은 독립 생물의 영원한 숙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