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 주민들 함께 채소·벌 키웠더니 “살맛 납니다”

김준현 기자 jo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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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 상리마을 행복PLUS 효과
고립 가구 발굴 취지 사업 시행
주민 설문 통해 18개 과제 고안
최근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추진
친목 돈독 마을 공동체 형성 기여

지난해 12월 부산 영도구 동삼동 상리종합복지관에 있는 상리카페에서 동네 주민들이 자서전을 작성하는 모습. 상리카페 역시 이번 사업으로 동네에 처음 생긴 카페다. 상리종합복지관 제공 지난해 12월 부산 영도구 동삼동 상리종합복지관에 있는 상리카페에서 동네 주민들이 자서전을 작성하는 모습. 상리카페 역시 이번 사업으로 동네에 처음 생긴 카페다. 상리종합복지관 제공

동네 사람끼리 ‘동삼 주공’이라 부르는, 부산 영도구 동삼동 주공아파트단지 주민들 표정이 요즘 한결 밝아졌다. 마을에 재미난 일들이 많아진 덕분이다. 주민들끼리 모여 채소를 기르고, 양봉에 도전해 꿀도 생산한다. 내친김에 채소와 꿀을 판매할 계획도 짜고 있다. 주민 7명이 모여 만든 자서전 출판기념회도 곧 열린다. 주민들 사연이 담긴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에도 나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여느 주공아파트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1993년 준공된 이 단지는 5만~6만 원 월세를 내면 살 집을 구할 수 있다 보니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이 몰렸다. 세월이 흐르며 동네 분위기가 가라앉았고 ‘누가 고독사 했다’는 소문도 바람결에 얹혀 나돌았다. 거동이 쉽지 않아 집 안에서만 머무는 주민도 적지 않다. 현재 동삼 주공에 거주하는 1700여 세대 중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비중이 70%가량일 정도다.

동삼 주공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 건 지난해 상리종합사회복지관에서 주민들과 함께 프로젝트 ‘상리마을 행복PLUS’ 사업을 시작하고서다. 사업은 주공아파트 2단지를 중심으로 고립 가구를 발굴해 보자는 취지로 시작됐고, 보건복지부와 부산시에서 예산 9억 8000만 원을 댔다. 사업 주관은 영도구청과 복지관 측이 맡았다.

영도구청과 상리종합복지관은 18개 세부 과제를 고안했다. 국화행복마을 마을협동조합, 마을장인사업단, 스마트팜, 도시양봉, 건강안부 순찰단, 우리동네 문화예술단, 반려동물 보호자 모임, 상리마을 건강 캠페인, 주민 자서전, 영화 제작…. 사업은 여러가지였지만 목표는 다양한 공동체 사업으로 주민 관계를 강화, 주민들이 이웃 주민을 돌보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고무적인 부분은 주민들이 18개 세부 과제 대다수를 제안했다는 사실이다. 통상 주민이 ‘사업 수혜자’에 머무르는 다른 사업과의 차별점이다. 상리종합복지관 측은 “주민 427명이 참여한 설문조사 등 이 사업은 애초부터 주민이 참여한 형태로 시작했다”며 “스마트팜, 반려동물 보호자 모임 등은 주민이 제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상리종합복지관은 주민들 참여부터 이끌어내기로 했다. 사업 취지가 고립 가구 발굴이었고 실제로 이웃이 누구인지 모른 채 살아가는 주민들도 상당했다. 상리종합사회복지관 윤승기 과장은 “지난해 복지관 측이 아파트에서 고독사 시신을 발견한 게 3건”이라고 전했다.

주민들도 처음엔 변화를 꺼렸으나 아파트 동마다 배치한 순찰단이 주민들 설득 역할을 주도했다. 이들은 15층 아파트에 있는 모든 세대를 돌며 건강을 확인하고 고립된 가구를 발굴, 문밖으로 끌어내는 역할이다. 순찰단 소속이자 주공아파트에 31년을 거주한 강태름(79) 씨는 “위암에 걸리거나 허리 디스크 등으로 거동이 불편해 집에만 있는 사람이 많다. 수십 번 냉대에도 계속 찾아가는 게 핵심”이라며 “내가 사랑하는 동네를 위해 봉사할 수 있어 보람차다”고 말했다.

도시양봉과 스마트팜은 특히 주민들에게 인기다. 주민들이 모여 농작물을 재배하면서 친목이 깊어졌다. 스마트팜 농작물은 유러피언 샐러드 등으로 지난해 5월부터 31차례 재배됐고, 양봉은 벌꿀 통이 도착하는 다음 달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할 예정이다. 복지관 측은 한 발 더 나가 꿀과 채소 판매도 추진 중이다.

오정희(71) 씨는 “집에서 식물을 키우기 너무 어려워 곤란하던 차에 스마트팜 사업을 접하게 됐다. 새로 보는 기계에서 식물들이 쑥쑥 자라서 몹시 신기했다”며 “스마트팜에 참여하면서 모르는 동네 사람을 많이 알게 됐다. 길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이라고 자랑했다.

마을 역사를 기억하고 담는 ‘마을 기록화’ 사업도 성과가 기대된다. 그 하나가 주민 자서전 제작이다. 자서전 제작 사업에는 올해 주민 7명이 참여했다. 15살 때 한국전쟁이 발발,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형제와 연락이 끊겨 아직도 생사조차 모른다는 87세 할머니 이야기 등 150페이지 분량 단행본 출판기념회가 다음 달 열릴 예정이다. 자서전 내용을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도 추진 중이다. 상리종합복지관 이일록 팀장은 “주민들이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생전에 고독하지 않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며 “국비 지원이 중단돼도 주민들이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모델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김준현 기자 jo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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