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한강 작가 <소년이 온다> 일본어로 옮긴 이데 슌사쿠 번역가를 만나다
“번역 때 많이 울어… 국경 초월하는 보편성에 세계가 공감”
타인 고통에 공명 ‘측은지심’ 일관
폭력에 고통받는 인간 실존 탐구
시대 상황·언어 넘는 문학적 성취
“언젠가 노벨문학상 받을 것 예감”
기자 정년 후 늦깎이 번역가 변신
한승원 작가 취재 인연 딸 작품 옮겨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작가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를 요약하는 한 구절이다. 작가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다루면서도 고발하거나, 투쟁하지 않는다. 대신 살아남은 자들의 트라우마를 드러낸다. ‘내 삶이 장례식’이라는 짧은 표현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는 독후감이 많다. 스웨덴 아카데미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선보였다”는 선정 사유에 부합하는 구절이다.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를 쓰는 동안 거의 매일 울었다”고 회상했다. 번역가라면 어땠을까? 일본어판을 맡은 이데 슌사쿠(76·井手俊作) 번역가 역시 “번역하다가 울고, 그래서 쉬었다가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이데 번역가는 한강 작가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꼽았다.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는 인간의 심성은 인류에 보편적이다. 시대적 상황과 언어, 국경을 넘어서는 데 한강 작가의 문학적 성취가 있다.
일본 후쿠오카에 본사를 둔 〈서일본신문〉 기자 출신으로 2009년 정년 퇴직 후 본격적으로 한국 문학 작품을 일본에 소개하고 있는 이데 번역가를 화상으로 만났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전문 번역가의 세계에 발을 내디뎌 지금까지 최인호, 한승원·강 부녀 작가의 작품 4권을 일본에서 출간했고, 번역을 마친 미발표 작품도 몇 권이 있다. 그는 왕성한 활동의 비결을 묻자 “한국어가 평생의 애인”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 “한강 작가, 섬세함과 강인함 겸비”
한강 작가는 연세대 동문 선배인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과 〈병원〉을 좋아한다고 했다. 일본의 여류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윤동주 시어에 감동해 번역·출판을 자처했다. 그는 ‘겉으로 약해 보이면서 피아노선처럼 팽팽하게 튕겨진 투명한 서정성’에 주목해 윤 시인을 일본에 알렸다. 이데 번역가는 “한강 작가도 겉으로는 상냥하고 섬세한 듯 하지만 피아노선처럼 투명하고 강인한 서정이 관통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섬세함과 강인함. 이 이율배반적인 요소를 겸비한 한강 작가는 감성이 풍부한 소설 언어가 특징적인데, 이 점이 다른 한국 작가와 차별화된다고.
또 한강 작가의 가계에 흐르는 시혼도 빼놓을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한강 작가뿐만 아니라 아버지 한승원 작가도 시인으로 활동했다. 아버지 한 작가의 〈저녁 노을〉을 사례로 들었다.
‘너,/ 가버린 사랑 때문에 오늘 / 하루 내내 슬픔 / 울분 못견디고 / 혀의 입술 깨물어 뜯어 / 머금었던 피 / 한꺼번에 뿜어 / 뿜어 놓았구나.’
슬픔, 울분, 체념 등 마음 속 응어리가 풀리는 서정이 붉은 석양에 겹쳐 선명한 이미지로 떠오르는 시다. 이런 부친의 시혼을 딸이 계승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데 번역가는 한강 작가의 서정과 문체에 주목해 “언젠가 노벨상을 받을 거라 예감했다”고 밝혔다. 한편, 한강 작가가 노벨상 수상이 정해진 뒤 축하 행사나 기자 회견을 자제한 것을 두고 한강 작가다운 선택이라고 했다. 부조리한 폭력에 고통받는 인간의 본질을 파고든 작가로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 ‘소년이 우리에게 와 주었다’
〈소년이 온다〉는 2015년 한국문학번역원의 응모에 뽑혀 이듬해 일본에서 출간됐다. 응모 때 나이는 67세. 대다수 번역가가 한국 유학 경력이 있는 비교적 젊은 여성인데 반해 은퇴한 남성 번역가는 전례가 없다. 한강 작가와의 나이 차이도 무려 22세다. 응모 심사의 조건은 책의 4분의 1 분량을 번역해서 제출하는 것이다. 경력은 감안되지 않은 채 오로지 번역문 심사로 통과했다. 그의 후배 기자들은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는 동안 정평이 난 수려한 문장이 통한 것”이라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이 온다〉 번역 초기엔 궁금한 게 있으면 한강 작가와 이메일로 소통했지만 이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이상하게도 일본어로 옮기는 데 그리 어렵지 않게 됐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원문이 지극히 명징해서 번역의 선택지가 달리 없었다”는 것이다.
번역 과정은 한강 작가와의 텔레파시 공명이었다. 한강 작가는 ‘이 세상에 왜 폭력이 있는가’라는 질문의 끈을 놓지 않으며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집필 과정을 인내했다. “세 줄 쓰고 한 시간 울었다”는 한강 작가의 경험을 이데 번역가도 겪었다. “국경을 초월하는 보편성”일 텐데, 이 점이 한강 작가의 문학이 전 세계적인 공감을 얻는 대목이라고 덧붙였다.
사람의 기억은 쉬이 휘발되기 마련이다. 희생자의 아픔이나 원통함도 결국 잊힌다. 하지만 때로는 기억해야만 하는 고통이 있다. 〈소년이 온다〉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마법 상자라는 게 이데 번역가의 생각이다. “40년도 더 된 사건의 주인공인 소년의 영혼이 지금의 우리 곁으로 와 준 것이 아닐까요?”
■ 부산, 윤동주, 한강 작가와의 인연
이데 번역가는 15살 까까머리 소년일 때 부산 라디오 방송의 단골 청취자였다. 일본 후쿠오카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의 월경 전파가 쉽게 잡히던 시절이다. 중학교 과학반에서 만든 자작 진공관 라디오가 밤마다 미지의 세계로 가는 문을 열었다. 한 여성 아나운서의 미려한 음색은 소년을 짝사랑에 빠뜨렸다. 종결 어미 ‘~입니다’의 ‘다’가 가슴 깊이 울렸다. 일본어 종결 어미 ‘타’와 느낌이 달라 “한국어는 아름다운 언어”라는 인식을 남겼다.
미지의 언어를 본격 배운 건 그가 볼혹에 접어들 때다.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한 1974년 서일본신문사 수습 기자로 입사한 그에게 한글을 익힐 기회가 찾아왔다.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취재가 필요하자 사내에서 한국어 학습을 독려했던 것. 한글을 깨친 다음 한국 문학을 지면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1994년 ‘빼앗긴 시혼 - 윤동주의 삶과 죽음’ 15회 연재가 출발점이었다. 윤동주 시인이 옥사한 후쿠오카형무소가 그의 집에서 지척이었다. 윤동주 기획은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가책 때문”이었다. 당시 언론이 한국 문학에 주목하지 않던 분위기 속에 고군분투했다.
2009년 정년 퇴직 후 늦깎이 번역가로 변신했다. 한국문학번역원의 공모에 최인호의 〈타인의 방〉과 〈몽유도원도〉가 연거푸 선정돼 일본 독자에게 소개됐다. 2014년 전남 장흥에서 열린 이청준문학제를 취재해 ‘한(恨)과 생(生)-장흥, 한국 문학의 수맥’ 연재를 〈서일본신문〉에 게재했다. 이때 한국 작가들을 두루 만났는데 그중 한승원 작가 인터뷰가 인연이 됐다. 아버지 한 작가가 자신의 모친을 모델로 쓴 〈달개비꽃 엄마〉를 번역하게 된 것이다. 100세를 앞두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질긴 생명력과 사랑에 대한 서사다. 당시는 딸의 〈채식주의자〉가 국내외에서 주목받던 때다. 이때 이데 번역가는 ‘승어부’(勝於父), 즉 아버지를 넘었다는 말을 듣고는 딸 한 작가의 작품에 파고들게 된다. 그 결과 부녀 작가의 작품을 일본어로 옮긴 번역가가 됐다.
틈틈이 번역한 작품 몇 점을 서랍 속에 묵히고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일본 독자들에게 꼭 선보이겠다고 다짐했다. 힘 닿는 데까지 한국 문학을 더 번역하고 싶다고 되뇐다. 한국어를 평생 사랑했기 때문이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