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빙벽(氷壁) / 박영근(1958~2006)
겨울산은 나뭇잎 하나 붙잡을 것이 없다
침묵의 저 가파른 칼등
바람에 끌려다니던 눈송이들이
일제히 머리를 풀고
바위절벽에 얼어붙는다
어떤 생애의 화살이 날아와 깨뜨릴 수 있을까
흉터와 외침 위에
얼음 저며드는 벽화(壁畵)여
바람도
눈송이도
스스로 부딪쳐 불타올라
온몸으로 절벽이 된다
오오 고통만으로
저를 지키고 있는
저 겨울산
-시집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1997) 중에서
마음만은 차디찬 상태에 두기로 한다. 연일 불볕더위가 자심한 8월의 마지막 주간, 한겨울의 얼음산을 부른다. ‘바람에 끌려다니던 눈송이들이
일제히 머리를 풀고
상상력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시인도 겨울산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무정하고 무심한 세월 속에서 ‘
바람도
눈송이도 스스로 부딪쳐 불타올라 온몸으로 절벽이 되’는 상상은, 그것도 오직 ‘고통만으로 저를 지키고 있는 겨울산’을 떠올려 보는 것은 완벽한 세계를 품어보고 싶다는 의지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 강인하고 올곧은, 그러면서 칼날같이 엄정한 상태에 이르고 싶다는 마음의 표상. 하여 ‘빙벽’은 영혼의 ‘가파른 칼등’이 된다.김경복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