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일의 곰곰 생각] '87년 체제', 이제 역사로 보내자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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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6월 항쟁 후 직선제 개헌 6공화국 출범
37년 흘러 정치 양극화, 극단 대치 만연
시대 변화 걸맞게 권력 체제 변화해야

제왕적 대통령 아닌 행정부 수반으로
중앙 정부 권한, 지방에 대폭 이양
분산·협치 분권형 7공화국 준비해야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Cincinnati)시는 로마 정치인이자 군인 킨키나투스(Cincinnatus)의 이름에서 따왔다. 기원전 460년 로마 공화정은 외침을 당해 위기에 처한다. 원로원에서 은퇴하고 농사를 짓던 킨키나투스는 원로원의 구원 요청을 받자 즉시 독재관(dictator)직을 수락한다. 침략을 물리치고 개선장군으로 돌아온 그는 독재관 지위를 내려놓고 표표히 농장으로 돌아갔다. 원로원의 집단 지도 체제가 복귀됐고, 민회는 행정관을 선출했다.

미합중국 설계자들은 로마 공화정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원로원과 민회를 본뜬 상원, 하원이 예다. 독립전쟁을 이끈 뒤 낙향해 농사를 짓던 조지 워싱턴을 소환한 것도 닮았다. 워싱턴은 공직을 거부하며 완강히 버텼지만 집요한 설득을 이기지 못해 초대 대통령이 된다. 4년 단임 후 낙향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세상에 없던 삼권분립 제도의 신산함이 그를 놓아주지 않은 것. 연임 횟수에 제한이 없었지만 두 번의 임기를 마친 워싱턴은 퇴임을 결행했다. "능력 부족을 절감"했고 "무능에 연유한 과오가 잊히기를 바란다"는 겸양 가득한 고별사를 남긴 채 그 역시 표표히 떠났다.

미국에서 고안된 프레지던트(president)는 일본 메이지유신 시절 대통령(大統領)으로 번역된다. 대만 총통(總統)도 같은 맥락이다. 모두 '크게 거느리고, 다스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president는 '회의를 주재하다' '의장석에 앉다'는 의미이지 통치, 군림과 동떨어져 있다. 단적인 예로 EU(유럽연합)에는 수많은 president가 있다. EU의 각료 이사회(정상회의), 의회, 집행위원회, 중앙은행, 사법재판소, 감사원의 대표 직함은 모두 president인데, 이를 한국어로 표기하면 의장, 위원장, 은행장, 재판소장, 감사원장이 된다.

어감의 차이는 이 단어가 동아시아에 유입될 때 '왕이 통치하지 않는 나라'를 상상할 수 없었던 시대적 한계 때문이다. 워싱턴 고별사의 시작을 보자. '행정부를 관리할 한 시민을 선출할 시기가 머지않았는데….' 삼권분립 체제에서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일 뿐이라는 관념이 뚜렷하다. 애당초 제왕적일 수가 없는데 태평양을 건너오면서 왕에 버금가는 권력자로 변질된 것이다.

미 대통령은 국방과 외교 권한을 갖고 있으나 개전과 종전 권한은 의회에 있고, 조약 체결도 상원 동의가 필수다. 장관과 대법관 지명도 상원을 통과해야 한다. 의회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고 예산 승인을 미뤄 정부를 폐쇄(셧다운)할 수도 있다.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인 2018~2019년 연말연시에 민주당 다수 의회는 무려 35일이나 행정부를 마비시킨 적이 있다. 의회가 견제하면 대통령은 옴짝달싹 못한다. 영국의 왕에 맞서 독립을 쟁취했으니 제왕의 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장치인 셈이다.

한국은 제헌의회 때부터 미국식 대통령제를 도입했지만 부침을 겪었다. 쿠데타로 헌정이 중단되고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만들어 장기 독재를 펼쳤다.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하지 못하고 체육관에서 간접선거로 뽑은 시절도 있었다. 대통령 중심제가 오용된 탓에 입법·사법부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국민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1987년 6월 간선제 헌법을 유지하려는 정권을 규탄하는 '호헌 철폐' 시위가 벌어졌다. 6월 항쟁의 결과 직선제 헌법 개정이 이뤄져 6공화국이 열렸다. 헌법 개정을 주도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들은 각자의 정치적 야망을 헌법에 새겼다. 중임제와 정·부통령제가 부상했으나, 5년 단임 대통령제로 낙착된 것은 대권을 쥐려는 각자의 셈법이 절충된 결과다. 결국 6공화국 헌법을 주도한 이들은 순차적으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이른바 '87년 체제'로 불리는 6공화국 출범 이후 37년이 흘렀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문턱에 진입한 그 세월에 무수한 개헌 논의가 있었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그 결과가 작금의 정치 양극화다. 대통령과 의회 사이에 탄핵 엄포와 법안 거부 무한 도돌이표, 국회에서의 여야 극한 대치가 그것이다. 연금·노동개혁 등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민생은 실종되고 22대 국회는 개원식도 열지 못한 채 꽉 막혀 있다.

해결책은 권력의 분산과 협치 구조다. 대통령은 유신헌법에서 도입된 '국가 원수'에서 내려와 행정부 수반으로 돌아가고 국방·외교 이외 상당수 기능을 지방 정부로 이양하는 권력 분산이 필요하다.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줄이면서 지방을 살리는 이른바 분권형 개헌이다. '87년 체제'는 쓰임새를 다했다. 분권형 협치 국가인 제7공화국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댈 때가 됐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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