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팔만대장경, 차이와 반복이 만들어낸 미학적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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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해인사 장경판전. 사진은 Bernard Gagnon, Wikimedia Commons. 팔만대장경, 해인사 장경판전. 사진은 Bernard Gagnon, Wikimedia Commons.

5월 24일, 음력 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경남 합천 해인사를 찾는다.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된 세계기록유산, 국보 제32호 ‘팔만대장경’. 금강경, 반야심경, 화엄경, 법화경, 아미타경 등 불교의 핵심 경전이 집대성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완전한 불교 경전의 보고(寶庫).

그러나 이 거대한 유산에서 미학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은 따로 있다. 무엇이 새겨져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새겨졌는가가 바로 그것이다. 팔만대장경의 또 다른 감동은 바로 텍스트 이전의 형식에, 의미 이전의 감각에 있다. 팔만대장경은 정확히 8만 1258판의 목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슷한 크기, 엄정한 배열, 끝없이 이어지는 문자들.

그것은 완벽한 동일성의 세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그 질서는 조용히 흔들린다. 여기서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 떠오른다. 반복은 동일성을 복제하는 일이 아니라 차이를 생성하는 사건이다. 나뭇결은 저마다 다르고, 칼끝의 떨림도 다르다. 새겨진 획의 깊이와 번짐, 글자의 미세한 균형 또한 조금씩 다르다. 각각의 목판은 저마다 다른 시간을 품고 있다. 대장경의 장엄함은 이 무수한 차이가 거대한 반복 속에서 이루어내는 질서에 있다.

수백 년 전 몽골 침입 이후 국가적 위기 속, 장인의 손끝에 일었을 망설임, 한 자를 완성하고 다시 다음 글자 앞에 앉았을 그 인내와 집중. 그 마음은 나라의 안녕을 비는 서원,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구도적 염원,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기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장경의 숭고함은 단지 규모에서 오지 않는다. 그 위대함은 내용만으로도 다 헤아릴 수 없다. 끝내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 끝없는 손길의 염원, 바로 그것이 숭고를 만들어낸다. 자연통풍과 습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장경판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읽기보다 먼저 멈추게 된다. 끝없이 이어진 목판 서가는 그 자체로 거대한 설치 미술이라 하겠다. 오래된 나무 향은 서늘한 공기와 섞여 천천히 코끝에 스미고, 낮게 스며든 빛은 목판 위를 고요히 흐른다. 발걸음은 느려지고, 말소리는 낮아진다. 생각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바빴던 시간, 흔들리던 생각들, 쉬이 지치던 날들이 잠시 멈춘다.

판각을 새기는 수백 년 전 장인들의 모습, 한 자 한 자 새기며 붙들었던 집중과 인내 속의 그 염원이 떠오른다. 머릿속에서 문득 반가사유상의 고요한 미소가 떠오른다. 팔만대장경은 단지 경전을 새긴 목판이 아니다. 인간의 기다림과 기도, 그리고 끝내 무너지지 않으려 했던 마음을 나무 위에 새긴 시간의 숲이다. 초파일을 앞두고 다시 생각한다. 수없이 반복된 손길이 어떻게 아름다움이 되는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어떻게 위대한 미학적 형식이 되는지를. 미술평론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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