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만세와 천세
만세(萬歲)는 오래도록 살기를 바라는 뜻이다. 만수(萬壽)도 마찬가지. 둘 다 윗사람이나 귀한 손님에게 올리는 축원의 말이었으나, 이후 쓰임이 갈라졌다. 만세가 황제 숭배와 국가 질서를 상징하는 말로 굳어진 것이다. ‘황제 폐하 만세’는 ‘오래 사세요’가 아니라 ‘황제의 통치 질서가 영원하라’는 정치 구호다. 송나라 때 술자리에서 함부로 만세를 외쳤다가 불경죄로 곤장을 맞고 죽는 사람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만큼 사용이 엄격했다.
만세의 위계질서는 중국 밖에서도 위력을 발휘했다. 명나라 사신이 세종대왕에 올린 인사를 보면 수직적 세계관이 뚜렷하다. ‘황제는 만만세하고, 전하(세종)는 천천세, 세자(문종)는 천세 하소서.’ 조선왕조실록에는 즉위식과 왕실 경사 때 신하들이 ‘주상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를 함께 외쳤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조선에서도 만세는 금기어였던 것이다.
중국 황제의 전유물이었던 만세는 근대에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3·1운동 때의 ‘대한독립 만세’는 획기적인 구호였다. 황제가 독점하던 상징 체계를 민중이 무너뜨리고 스스로 역사의 주체임을 선언한 것이다. 독립 선언문에 없는 만세삼창이 방방곡곡을 뒤덮은 것은 기존 질서를 깨뜨리는 민중의 집단적 열망의 분출, 오늘날 표현으로 하면 ‘집단 지성’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의 역사 왜곡 논란이 만세, 천세를 소환했다. 21세기 입헌군주제 한국을 배경으로 한 국왕 즉위식에서 신하들이 천세를 연호한 것이다. 주권 국가 시대에는 맞지 않는 오류다. 디즈니+에서 방영돼 세계적인 팬덤을 얻었기에 자칫 중국의 역사 가로채기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에 빌미를 줄 우려도 나온다.
만세와 천세는 영어 자막에서 똑같이 ‘Long live~’로 번역된다. 군주제에서 비롯된 이 표현은 3·1운동 이후 완전히 다른 정서를 획득한 ‘K만세’의 느낌과 동떨어져 있다. 스포츠 경기에서, 촛불 집회에서, 아이가 태어날 때 모두가 함께 외치는 기쁨과 연대의 감탄사이기 때문이다. 외국어로 오롯이 전달되지 않는 ‘한(恨)’과 ‘정(情)’처럼, 만세는 한국인의 기억과 감정이 응축된 고유 명사로 봐야 한다. 드라마 제작진은 문제의 장면을 수정하겠다고 약속했다. 해당 장면을 만세로 바꿀 때 번역 없이 만세(Manse) 그대로 두면 어떨까. K콘텐츠의 선한 영향력에 힘입어 ‘K만세’의 정신이 전 세계에 각인되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
김승일 수석논설위원 dojune@busan.com
김승일 수석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