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원픽]이노우에 다케히코의 ‘공백(空白)’
목지수 ‘집앞목욕탕’ 발행인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공백>.
몇 년 전, 예고 없이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열정을 쏟아 발행하던 잡지도 결국 휴재에 들어갔다. 세상의 속도에 맞추려 애쓰던 엔진이 꺼진 듯한 시간이었다. 그때 책장에 오래 꽂아두었던 한 권의 책을 꺼내 들었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공백>이었다.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슬램덩크>로 잘 알려진 만화가다. 그는 <배가본드>를 연재하던 중 돌연 휴재를 선언한 적이 있다. 매주 일본 주간 만화 잡지의 연재 시스템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 쉼은 500일이나 이어졌다. 작가 자신도 이토록 긴 공백을 예상하지 못했고, 연재 중단설이 돌 만큼 그의 건강 역시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그는 사찰의 거대한 병풍을 그리고, 김포공항 통로 벽면에 그림을 남기는 등 만화의 프레임을 벗어난 대형 작업에 몰두했다. 이는 더 고된 육체노동이었고, 재미있는 건 그곳에도 여전히 마감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이노우에는 그렇게 또 다른 방식으로 무기력증의 시간을 건너갔다. 그리고 이 시기를 ‘내압(內壓)을 높이는 시간’이라 불렀다.
우리는 흔히 ‘쉼’이나 ‘공백’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이해한다. 물론 소진된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한 휴식은 필요하다. 하지만 이노우에의 경우처럼, 더 깊은 몰입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시간 또한 공백일 수 있다. 공백은 멈춤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그는 이 과정에서 ‘몸’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머리와 상상력만으로 삶의 벽을 넘으려 할 때 우리는 쉽게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나 자연의 일부인 몸을 깊이 이해하고 사용하는 순간, 비로소 이전에 닿지 못했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머리로만 해결하려던 인생의 벽을 몸의 감각으로 마주할 때 미지의 문이 열리곤 한다.
인생은 매 순간이 결전인 <슬램덩크>와 다르다. 오히려 <배가본드>의 주인공 무사시처럼, 길 위에서 주춤하고 좌절하며 때로는 혼잣말을 내뱉는 일상의 반복에 가깝다. 이노우에는 이러한 모든 분투의 과정을 냉소 없이 바라보는 관조의 태도를 가질 때, 삶이 비로소 사랑스러워진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공백이 필요하다. 다음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충분히 내압을 높인 사람만이, 다시 일상이라는 전장으로 돌아가 자신만의 붓을 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나의 무기력증이 끝났는지는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목지수 <집앞목욕탕> 발행인. 본인 제공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