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내 곁에 있어 줘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신호철 소설가

여러 동물 기르며 얻은 행복감
함께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기뻐
이젠 결핍 채우기 위해 동물 필요
동물 그 자체 존재로 사랑해야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부터 꽤 많은 동물을 길렀던 것 같다. 첫 경험은 병아리였다. 아마 내 또래 유년의 공통된 경험일 것이다. 초봄의 하굣길, 학교 앞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에서 삐악거리는 소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기어코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집으로 왔었다.

병아리가 담긴 종이상자는 따뜻한 아랫목에 자리 잡는다. 경험상 병아리는 무조건 따뜻하게 해주면 되었다. 배추 잎을 연필 칼로 잘게 썰어주고, 파리채로 파리를 잡아줬다. 벌레를 잡아 톡톡 신호를 주면 저만치서 놀다가도 솜털 날개를 파닥이며 달려왔다. 보름쯤 지나면 솜털 끝에 하얀 깃털이 나온다. 이제부터 확연히 달라진다. 화단 흙을 헤집어 지렁이를 잡아내고, 장에 가두려 쫓으면 쏜살같이 도망친다. 병아리는 어느새 벼슬이 늠름한 닭이 되어 있다.

하굣길 문방구에서 뽑기를 하고 돌아온 어느 날, 마당 어디에도 닭이 없음을 알게 된다. 할머니께 닭의 행방을 물으면 대뜸 이런 지청구가 나온다. “꽃이고 이파리고 다 쪼아대서 화초가 남아나길 하나. 온 마당에 똥은 싸놓지.”

그렇다고 저녁 밥상에 닭고기가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할머니는 어느 맘씨 좋은 할아버지께 닭을 줬다고 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었다. 다른 집으로 간 닭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건 그보다 한참 뒤였다.

토끼도 키웠었다. 털이 부드러워 소위 밍크 토끼라 불리던 렉스 토끼 한 쌍을 삼촌께 얻었다. 나는 틈만 나면 시장에 가서 배추 겉잎이나 자투리 푸성귀를 잔뜩 주워왔다. 토끼 사료도 있었지만, 배추 잎을 입에 물고 아삭아삭 갉아 먹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좋았었다.

추운 겨울밤, 토끼는 새끼를 5마리 낳았고, 나는 다음 날 아침, 차갑게 굳은 5마리 새끼를 발견했다. 털 하나 없는 벌거숭이였다. 아기 손가락 같은 것을 편지봉투에 담아 사철나무 아래에 묻었다. 나는 어미 토끼가 새끼를 밴지도 몰랐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뭔가 예쁘고 귀엽다면 내 곁에 두려는 마음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잉꼬, 십자매 같은 애완조류를 길렀고, 수족관을 마련해 열대어를 길렀다.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 그리고 돌봄의 노동, 그리고 죽음에 대한 자책이 요구되었지만, 그들과 함께함으로 행복을 느꼈다. 함께하는 기쁨이란 건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먹이를 먹는 모습, 조금씩 자라는 모습, 그리고 새끼를 낳아 생명이 이어지는 광경을 보는 것. 어쩌면 어린 마음이 가장 먼저 접한 생명에 대한 순수한 감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생명은 책 안의 개념이 아니라, 눈앞에서 숨 쉬고, 자라나며, 어느 날 예고 없이 아파지는 존재였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것은 사실, 바라보고 기다리고 아파하는 행위라는 것을 배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 사람은 사랑한다는 자체에서 큰 위안을 얻는다. 그래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애정이 얼마나 평화로운지도 안다. 그래서 그저 내 곁에 있어 달라고만 한다.

하지만, 내가 기르던 동물의 죽음은 단지 자연의 이치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들의 죽음은 늘 나의 책임과 죄책감을 일깨운다. 설사 내 잘못이 아니었더라도, 애초부터 내 곁에 두고 싶다는 이유로 자유로웠어야 했을 생명을 소유했으니 말이다.

한때, 애완동물이라 불리던 존재가 반려동물이라 불리고, 더 나아가 가족의 자리에까지 올라섰다. 이것은 생명을 소유물로 여기던 시대에서 벗어나는 진전일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동물에게 사람의 결핍까지 대신 메워주기를 기대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동물에 대한 사랑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동물이라는 존재를 인간으로 취급하는 게 아니라, 그 존재를 그 존재답게 사랑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