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철의 사리 분별] 인간답게 산다는 것에 대해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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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발전 이뤘지만 지구촌 갈등 심화
대량 살상·폭력·반지성적 행태 일상화
헬조선 곳곳서 고통 호소 아우성 만연
냉소·기만·국가 이기주의·거짓 기승에
인간 선의 믿는 휴머니즘 가치관 위기
인간다움 사수할 다양한 정책 절실해

세계는 점점 더 뒤틀려 간다. 균열로 인한 날카로운 파열음이 지구촌 곳곳에서 울리고 있다. 최근 이란 반정부 시위로 1만 8000명이 사망한 데 이어 4년째로 접어드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10만 명 가까운 군인과 민간인이 숨졌다. 가자 지구 누적 사망자도 6만 명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지만 평화 협상은 지지부진하다. 살상과 폭력, 반지성적인 행태들이 일상처럼 반복되는 상황에서 센카쿠 열도, 그린란드 등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 미국과 유럽연합 등의 날선 대립까지 이어지면서 국제 정세는 연일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이런 소식에 점점 둔감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애써 외면한 채 무덤덤한 일상을 이어간다고 하더라도 뒤틀림과 균열은 어느새 깊고 깊은 틈을 만들어 구조를 약화시킨다. 방치한 채 시간만 흘려보낸다면 붕괴라는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도 ‘헬조선’이라는 뒤틀린 상태를 유지한 채 2026년을 맞았다. 청년 일자리 부족,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비정규직 고용의 일반화, OECD 국가 1위인 자살률, 노후 대책 없이 막막한 노년층,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영업자들…. 너무 힘들다는 아우성과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절규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경제 상황과 살림살이가 나아지면, 좋은 직장이나 대학에 가면 그때부턴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갈등과 분쟁의 악순환, 약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구조는 인간 내면을 끊임없이 할퀸다. 내면 상처는 우리 사회의 희망인 청소년들까지 직격한다. 서울 지역 자살 학생은 2021년 28명에서 2023년 36명으로, 2025년엔 51명으로 각각 증가했다. 지난 5년간 극단 선택을 한 185명 가운데 명문 고교와 학원이 몰린 강남 서초와 강동 송파, 목동이 포함된 강서 양천 지역 학생이 44.9%인 83명에 달한다는 것은 무한 경쟁으로 인한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대한민국 10대들의 현주소를 드러낸다. 이런 안타까운 소식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이젠 임계치를 넘었다는 의심마저 들게 한다.

지구촌 국가들은 그동안 경제 발전에 방점을 찍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80여 년의 시간 동안 인류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뤘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기후 위기와 지정학적 마찰과 충돌, AI 패권 경쟁 등 갈등이 만연한 지구촌을 날마다 목도하고 있다. 양극화가 초래한 사실상의 계급 사회 도래, 포퓰리즘에 따른 민주주의 후퇴, 권위주의 재부상 등 후유증도 만만치 않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휴머니즘의 퇴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인류는 문명화 이후 인간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을 유지하려는 인본주의적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진리에 대한 사랑, 정의에 대한 동경, 지적이고 도덕적인 교육이 인간에게 미칠 영향력에 대한 낙관적인 자세 등은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는 것은 물론 자유와 평등 등 다양한 가치관의 확산에 기여했다. 더 좋은 세상을 일구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휴머니스트들이 꿈꾸는 더 좋은 세상은 사랑, 존중, 공감, 자유, 평등, 진리, 진보 등에 기반한 이성적 가치관의 세상이었다. 그동안 ‘인간답게’라는 말은 이런 가치관에 기반한 인간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면 ‘인간답게’라는 말에 담긴 휴머니즘적 가치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까. 지구촌에 만연한 거짓과 기만, 폭력, 냉소주의, 국가와 개인 이기주의 등은 인간에 대한 선의와 낙관적 시선을 철회하라고 종용하는 듯하다. 더욱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같은 반지성적 유형의 지도자들은 휴머니즘에 기반한 인류의 가치관을 거침없이 훼손하고 있다. 인류가 모더니즘을 거쳐 포스트모더니즘까지 힘들게 쌓아 올린 다양성 등의 성과는 물론 다자주의 등 국제 질서까지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오로지 욕망과 감정에 충실한 경제적 만족 상태를 일컫는다는 오도된 가치관마저 급격히 확산 중인 상황이다.

국가의 정책 방향은 다양해야 한다. 인간의 삶은 경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치열하게 곱씹어야 할 때다. 이 땅의 사람들이 인간다움을 유지하면서 충분히 가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교육과 복지 등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사회 구성원들 내면의 덧난 상처를 치유하려는 발 빠른 노력도 절실하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빚어지는 대다수 문제들은 과거에서 방치·이월한 각종 병폐들의 총합이다. 우리가 이 긴박한 문제들에 대해 최소한의 긴급 처방도 내리지 않은 채 다시 이월시킨다면 머잖아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동물 본능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로 완전히 변질될지도 모른다. 바로 지금이 ‘인간다움’을 사수할 골든타임이라는 절박한 공감대가 확산되길 기원한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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