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쉬었음'이라는 응답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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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은 공모 칼럼니스트

일·구직도 않는 20~30대 70만 명
관련 통계 작성 2003년 이후 최대

불안정한 고용·생계 위협 임금 수준
'일단 들어가라'는 조언 설득력 없어

청년 이탈, 개인 선택으로 축소 금물
'공동체 해결' 구조적 신호로 읽어야

영화 ‘노매드랜드’에는 일자리를 잃은 중년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스스로 유랑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선택지가 사라진 끝에 도로 위로 밀려난 사람들이다. 주인공들은 “자유로운 삶”이라는 말로 자신을 설명하지만, 그 이면에는 해고, 구조조정, 자동화, 그리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사회의 냉정한 판단이 자리한다. 최근 대한민국의 청년 현실을 다룬 몇 가지 뉴스를 읽다가 이 영화가 떠올랐다.

지난해 20~30대 ‘쉬었음’ 인구가 7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국가데이터처가 지난 14일 발표한 ‘2025년 12월 및 연간 고용동향’ 조사를 보면 그렇다. 여기서 ‘쉬었음’이란 건강 문제나 학업, 육아 등의 명확한 사유 없이 ‘그냥 쉬었다’고 응답한 경우를 의미한다. 이 수치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보다도 많으며, 관련 통계 작성을 시작한 2003년 이후 역대 최대치라고 한다. 단순한 경기 침체의 여파로 보기에는 설명되지 않는 숫자다. 일자리가 부족한 수준을 넘어, 청년층의 구직 의욕 자체가 꺾이고 있다는 점에서 이 현상은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정부는 청년층의 노동시장 진입을 돕기 위해 맞춤형 고용 매칭, 진로 상담 강화, 청년 고용 지원 정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쉬었음’ 인구의 급증은 이미 청년 비활동이 더 이상 개인의 선택이나 일시적 방황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구조적 현상이며, 사회가 청년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신호다.

그렇다면 청년들은 왜 쉬어야 했을까? 전문가들은 여러 이유를 제시한다. 경력과 스펙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용 구조,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부족한 일자리,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극단적인 격차,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환경. 어떤 분석을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문제는 이 모든 조건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년들은 ‘노력하면 된다’는 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장에 던져졌다.

‘쉬었음’은 흔히 의지의 문제로 오해된다. “눈을 낮추면 일자리는 있다” “힘들어도 버텨야 경력이 된다”는 말은 여전히 쉽게 던져진다. 그러나 청년들이 마주한 현실은 그보다 훨씬 복합적인 양상이다. 청년들은 낮은 임금과 과도한 노동 강도를 감수하며 시작한 일자리가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목격했다. 어쩌면 선배 세대의 좌절을 보며, ‘일단 들어가면 된다’는 공식이 깨졌음을 배웠을지도 모르겠다. 그 결과, 불안정한 일을 붙잡기보다 차라리 멈추는 선택을 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혹은 기성세대가 생각지 못한 다른 복합적 문제로 인해 청년세대의 사고방식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안타까운 사실은 청년들의 ‘쉼’은 회복이 아니라 유예에 가깝다는 점이다. 사실, 쉬는 동안에는 불안이 쌓이고, 시간은 스펙 공백으로 환산된다. 냉정한 취업시장은 이 공백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곤 한다. 그러나 정작 진지하게 질문해야 할 것은 ‘왜 이토록 많은 청년이 동시에 멈춰 서게 되었느냐’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한 세대가 집단적으로 쉬고 있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고장이 아닐까. 이제는 개인이 아닌 전체를 보아야 할 때인 것 같다.

청년의 ‘쉬었음’을 해결하기 위한 논의는 이제 방향을 바꿔야 한다. 더 많은 취업 프로그램을 만들고, 더 촘촘한 상담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청년이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진입할 만한 시장인가에 있다. 불안정한 고용,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경력 구조, 생계조차 위협받는 임금 수준 속에서 “일단 들어가라”는 조언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쉬었음’을 줄이겠다는 목표는 곧 일자리의 질을 바꾸겠다는 선언이어야 한다. 청년이 감당할 수 없는 리스크를 개인에게 전가하는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의욕과 태도만을 문제 삼는 접근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청년이 노동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 청년을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합의다. 청년의 공백을 ‘낙오’가 아니라 구조적 신호로 읽어내는 감각, 쉬는 시간을 무능의 증거가 아니라 제도의 결함으로 해석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청년의 이탈을 개인의 선택으로 축소하지 않고, 공동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로 끌어올릴 수 있다.

영화 ‘노매드랜드’의 인물들은 떠돌았지만, 그들의 삶은 결코 가벼운 선택이 아니었다. 오늘의 청년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멈춰 서 있는 이유를 끝내 묻지 않는 사회라면, 언젠가 그 ‘쉼’은 회복이 아닌 단절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청년의 쉬었음은 아직 늦지 않았다는 마지막 경고일 수 있다. 이 신호를 정책으로, 구조로, 그리고 태도로 번역해 낼 수 있을지. 지금 우리 사회의 응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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