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환단고기와 가림토문자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대통령이 동북아역사재단 국정보고 자리에서 ‘환빠’라는 말을 소환하면서 동북아역사재단과 〈환단고기〉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양자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우선 동북아역사재단은 고구려연구재단으로 출발한 국책 연구 기관이다. 중국이 고구려·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의 역사라고 주장하자, 2003년 11월 고구려사 왜곡 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를 모태로 고구려연구재단이 2004년에 문을 열었다. 이처럼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임나일본부설과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서 설립된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영토 속에서 영위된 역사는 모두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고구려의 영토가 광대했다고 강조할수록, 중국사에 편입되는 고구려의 영역 역시 확대되는 셈이다. 고구려의 유민들이 참여하여 세운 발해도 당연히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중국이 고구려사만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서북공정을 통해서 신장(新疆) 지역의 위구르족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기원전 60년에 전한이 서역도호부를 설치한 이래로 중국이 신장 지역을 관할해 왔다는 것이 중국의 주장이다. 위구르족은 종족적으로도 한족과 다르고, 독자적인 위구르문자를 만들어 썼으며, 종교적으로도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중국 영토에 살고 있는 사람은 모두 중화민족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는 2021년에 10억 톤 규모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기도 하였고,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中 동북공정, 日 임나일본부설 왜곡
한국, 동북아역사재단 출범해 대응
한정된 연구 인력 힘겨운 활동 지속
식민사학 카르텔 매도 주장 안 될 말
표음문자 주장 〈환단고기〉는 위서
내부 공격·논란은 역량 분산할 뿐
서남공정은 역시 독립왕국이자 불교를 국교로 하고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하는 티베트를 중국의 역사로 포섭하려는 작업이다. 학문적인 논의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베이징과 티베트를 연결하는 철도는 총길이가 4062㎞로 부산과 서울 거리의 10배에 달하고 4500m의 고산지대를 통과한다. 한족들의 이동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티베트의 정체성을 희석시키려는 게 근본 목적이다. 중국은 전방위적으로 주변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역사 문제에 대응할 목적으로 만든 동북아역사재단을 식민사학의 카르텔이라고 매도하는 일부 인사들이 있다. 그들은 백 가지 사안 가운데 한 가지만을 문제 삼거나, 아직 준비 단계에 있는 사안을 최종 결과물인 것처럼 주장하면서, 정부 부처나 국회에 압력을 가하고는 한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인 공세에 대처하기에도 급급한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환단고기〉의 내용을 가지고 중국의 영토가 고대에 우리 영토라고 주장할수록, 역으로 고조선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가 될 위험성이 크다. 동북공정은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 아래 수많은 학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추진하고 있는 반면에, 우리는 한정된 연구자들이 동분서주하면서 힘겹게 우리의 역사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식민사학 카르텔 운운하면서 동북아역사재단을 공격하는 일은, 우리들의 역량을 분산시킬 뿐이다. 그렇게 분명한 자료가 있고 자신감이 있다면 동북공정을 주장하는 중국 학자,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 학자들과 직접 싸우면 될 일이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증거를 한 가지만 들어보자. 〈환단고기〉에서는 가림토문자가 기원전 2000년경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집트의 히에로그리프와 중국의 한자는 모두 상형문자 즉 뜻글자다. 뜻글자가 사용된 뒤 수천 년이 지나서야 표음문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가림토문자는 신기하게도 표음문자다. 모음은 훈민정음의 모음과 그 배열 순서만 다르고 기본 모음이 무려 11개다. 문자의 발달 순서에서 원래 자음이 먼저 만들어지고 모음은 뒤늦게 만들어진다. 모음의 독립은 문자 발달사에 대단히 중요한 비약이었다. 알파벳은 모음이 5개이고, 일본어는 5개, 몽골어도 7개의 기본 모음이 있을 뿐이다.
가림토문자가 존재했다면 왜 그 문자로 쓰인 자료는 단 한 점도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는가? 히에로그리프나 한자는 수많은 증거들이 지금도 발견되고 있다. 가림토문자가 문자의 최종 발전 단계라고 하는 표음문자 중에서도 음소문자에 해당하는데, 그 편리한 문자를 두고 왜 우리는 다시 한자를 썼을까? 세종은 독자적으로 훈민정음을 만든 게 아니고 가림토문자를 그대로 베꼈다고 해도 괜찮은가? 세종께서는 분명히 내가 새로 28자를 만들었고, ㄱ은 혀가 구부러진 모습을, 아래아(·)는 하늘을 본떴다고 창제의 원리까지 밝히셨다. 세종대왕이 표절한 사실조차 부인하는 파렴치한이란 말인가?
사회에 영향을 끼칠 만한 발언을 할 때는 최소한 해당 분야의 기초 지식이라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나라는 선진국이 되었는데 우리의 지식수준은 아직 중진국의 함정에 빠져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