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국민시집 '진달래꽃' 100주년과 문화기억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이재혁 (사)유라시아교육원 이사장 · 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

다가오는 26일은 한반도를 대표하는 시인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이 세상에 나온 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다. 소월은 서른 둘의 짧은 인생에서 이 시집 한 권만을 남겼다. 국민 애송시 1위로 자주 꼽히는 시 ‘진달래꽃’과 시집 이름이 같다. 그만큼 그는 강한 생명력의 진달래를 사랑하였다. 그래서 한반도인이라면 남쪽에 살든 북쪽에 살든 누구나 “소월” “소월”한다. 시집에는 본인이 고른 시 127편이 실려 있다. 시 ‘여수(旅愁)’가 목차에선 ‘여수 1’ ‘여수 2’로 구분되어 있고 본문에선 두 연으로 이뤄진 한 편의 시로 되어 있어서 126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시집은 한성도서와 중앙서림 총판 본을 합쳐 오늘까지 총 3종 4점이 발견되었는데, 한국 문학은 이 책 한 권 덕분에 올해 말로 근대 시 100년이라는 기념비적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가 저물어 넘어가는 데도 대한민국은 조용하다. 북녘땅도 조용하다. 소리가 났다면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 7월 취임하면서 “남과 북이 ‘진달래꽃’ 100년 행사를 같이하자”라고 제안한 것과 경기도 고양의 한 문학 단체와 부산의 어느 성악가 그리고 우리 국제 소월협회가 조촐한 기념행사를 자체적으로 가지는 것, 그게 전부인 듯하다.

26일 김소월 시집 출간 100년 되는 날

근대 시 기념비적 경사 국내선 조용

'한국 문학 아버지'에 대한 대우 빈약

러시아 푸시킨 기리는 동상 즐비

한국 근대문학·근대정신 일군 선각자

기억하고 전승해야 새로움 창조 가능

소월은 러시아로 치면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푸시킨이다. 푸시킨은 시집 한 권이 아니라 시, 희곡, 소설, 동화, 역사 등 여러 분야에서 숱한 책을 남겼기 때문에 어느 특정 작품의 100주년이나 200주년을 따로 기념하진 않는다. 다만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전국에 300여 개의 동상이 서 있고, 푸시킨 문학관만 해도 곳곳에 18개나 있다. 그에 대한 기억은 푸시킨 시(市), 푸시킨 거리, 푸시킨 명칭의 대학, 푸시킨 공원, 푸시킨 미술관 등으로 이어져 사람들의 일상을 채우고 있다.

반면에 소월에 대한 우리의 대우는 너무 빈약하다. ‘한국 문학의 아버지’라고 하면서 부산 황령산에 ‘진달래꽃’ ‘초혼’ ‘못 잊어’ ‘엄마야 누나야’ 등 시비 10기가 서 있고, 서울 남산에 ‘산유화’ 1기, 황령산의 ‘김소월 시와 함께하는 길’, 남산 주변의 ‘소월로’, 이게 소월에 대해 우리가 지닌 ‘문화기억’(cultural memory)의 전부가 아닌가 싶다. 여기서 문화기억이란 공동체의 형성과 계승 발전에 영향을 끼친 주요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집단적 기억’(collective memory)을 의미한다. 러시아의 문헌 학자이자 문화재 보호 활동가였던 드미트리 리하초프(1906~1999)는 ‘기억의 예술과 예술의 기억’에서 이렇게 말한다. “문화사란 사람의 기억 역사를 말하는 것이고, 기억의 발전사 및 기억의 심화와 완성의 역사이다. 기억을 통하여 지각과 창조의 미학적 수준이 발전하는 것이며, 지식이 만들어진다. 기억은 시간이라고 하는 파멸적인 힘에 정면으로 맞서며, 문화라고 불리는 그 무엇들을 축적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기억이란 시간의 극복, 죽음의 극복이다. 여기에 기억의 도덕적 의의가 들어있다.” 이 경구를 우리의 현실에 대입하여 보면, “소월 시인을 이렇게 잊어버리고 집단으로 기억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문화사, 새로운 창조와 발전, 한국의 미학, 한국의 도덕을 정립하고 이어가기 힘들 것”이라는 경고로 들린다.

푸시킨의 생일 6월 6일은 ‘러시아어의 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생일이 우리의 한글날인 셈이다. 자유 정신과 근대의 표상으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의 중간에 서서 살아있는 민중의 언어를 문학에 도입하고, 문법과 문체 등에서 러시아어의 표준규범을 확립한 작가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이날 러시아 전역에선 각지의 푸시킨 동상 밑에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고 푸시킨의 시를 낭송한다. 우리의 소월도 전통에 발을 디디고 자유와 단절의 근대를 열어갔다. 고어와 방언, 구어체 등 민중의 언어를 문학 안으로 끌어들여 한국어의 표준체계를 새롭게 했다. 슬픔과 부재를 통하여 반대로 생명과 환희를 지향하고. 아이러니와 자연 표상, 복합기호의 광범위한 활용 등으로 한국의 근대문학을 일군 선각자이다.

소월로부터 출발한 한국 근대문학 100주년은 한국 근대정신 100년사이기도 할 것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는 봉건사회와 남의 식민지에서 벗어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잇달아 이뤄내, 세계 10위권 안팎의 ‘알아주는’ 나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물질적인 성장에 스스로 도취하여 정신과 문화를 소홀히 하는 건 아닌지, 자신을 뒤돌아볼 시점이 아닌가 한다. 진정으로 부강한 나라와 부유한 국민은 경제적으로 윤택할 뿐만 아니라 같이 기억하고 전승하며 새로움을 창조해나갈 그런 문화기억이 충만한, 다른 차원의 나라와 국민일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