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보전 절묘한 균형… ‘도시재생’ 모범 사례 우뚝 [도시 부활, 세계에서 길 찾다]

전창훈 기자 jc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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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클리블랜드 ‘리틀 이탈리아’

미국 내 이탈리아 이민자 공동체
상충하는 이해관계 충돌 조정
전통·상권 조화 속 정체성 지켜
젠트리피케이션 부작용도 최소화
비영리 재개발 회사 역할 주목

리틀 이탈리아의 대표적 축제인 ‘성모 승천 축제(Feast of the Assumption)’를 맞아 방문객들로 붐비는 모습. 리틀 이탈리아의 대표적 축제인 ‘성모 승천 축제(Feast of the Assumption)’를 맞아 방문객들로 붐비는 모습.
리틀 이탈리아의 평소 거리. 리틀 이탈리아의 평소 거리.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대학가인 유니버시티 서클 인근에 자리한 ‘리틀 이탈리아’(Little Italy)는 19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터 잡고 살아온 작은 마을이다. 4블록, 걸어서 10분 남짓이면 거의 다 눈에 담을 수 있는 이곳은 단순한 상권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온 이탈리아 이민자 공동체의 문화 유산과 정체성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이 곳이 최근 주목 받는 이유는 지속적인 개발 압력 속에서도 전통 보존과 상권 활성화를 균형 있게 이뤄낸 흔치 않은 사례이기 때문이다. 특히 상충하는 이해관계 속에 젠트리피케이션 등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점진적 성장을 이뤄가는 과정 자체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도시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만하다.

리틀 이탈리아는 1990년대 중반, 대학가인 유니버시티 서클의 개발 압력이 커지면서 급속한 변화의 기로에 서게 됐다. 신규 주택 사업, 외부 투자자의 유입, 부동산 시장의 가속화는 지역 경제에는 기회였지만, 전통을 지키려는 주민들에게는 위기로 다가왔다. 이런 긴장이 팽배하던 1995년 주민, 지역 상인, 예술가, 종교인 등이 만든 비영리 법인이 바로 ‘리틀 이탈리아 재개발회사’(LIRC)다. LIRC는 공동체 주도형 개발 기구로서, 단순한 민간 개발업자도, 단순한 보존 단체도 아닌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LIRC는 설립 목적에서 ‘경제 발전을 촉진하되 낙후된 구역을 제거하고, 부작용을 방지하며, 리틀 이탈리아 공동체의 문화적 본질을 보호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LIRC를 초기부터 30년 가까이 이끈 레이 크리스토식 씨는 “리틀 이탈리아를 지키려는 사람들과 개발을 추진하려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은 컸다”면서 “하지만 주민들은 개발을 ‘반대’한 게 아니라, ‘정체성 없이 진행되는 개발’을 걱정한 것”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지역 상인들과 2·3세 이탈리아계 주민들은 외부 개발업자가 추진하는 고층형 프로젝트나 주변 지역과 동떨어진 건축물들이 들어설 것에 강한 우려를 갖고 있었다. LIRC는 시에 이런저런 주민 의견을 전달하는 역할을 넘어 이탈리아 건축미와 거리 경관과 역사적 건물의 복원, 소규모 사업체 지원, 예술 문화 프로그램 육성 등을 통합해 도시 재생의 모델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 2005년 ‘리틀 이탈리아 마스터플랜’, 여기에 수록된 방향성을 좀 더 구체화한 것이 2024년 만들어진 ‘리틀 이탈리아 디자인 가이드 라인’이었다. 두 가지 지침을 만들기 위해 LIRC는 주민 의견 수렴과 설문 조사, 행정기관과의 협의를 수십 차례 진행하면서 주민 공론을 모아갔다. 시 역시 산하 도시계획위원회, 랜드마크 위원회 등을 통해 두 지침을 만드는 데 협업을 했고, 이 지침들이 법적 지위를 얻을 수 있도록 행정적 뒷받침을 했다.

디자인 가이드 라인은 건축 스타일, 거리 재질, 색감, 조명, 간판 디자인 등에 역사적 감성을 반영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신축 건물의 주변 건물과의 통일성을 해치지 않도록 높이와 폭을 제한했고, 보도와 연결을 유지하는 현관 및 포치도 보행 친화적으로 설계토록 세세하게 규정했다. 상권에 새로 진입하려는 사업자에겐 상당한 규제로 느껴질 법한 대목이다. 그러나 LIRC의 활동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는 상당히 높다. 주민 린다 과리노 씨는 “90년대 후반만 해도 외부 투자자들이 와서 ‘이탈리아 느낌을 없애고 새롭게 만들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었다”며 “LIRC가 없었다면 리틀 이탈리아는 지금 같은 모습으로 남지 못했을 것이고, 역사를 통해 형성된 공동체도 많이 훼손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뿐만 아니라 LIRC는 시의 지원을 받아 상점주, 식당 운영자 등 소규모 사업자를 위해 기술적 지원, 보조금 프로그램을 제공했고, 디자인 가이드 라인에 부합하는 외관 개선을 유도했다. 이런 지원은 지역 상권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여기에 지역 커뮤니티 센터인 알타 하우스(Alta House) 등을 중심으로 아트 스튜디오, 갤러리, 예술가 작업실, 요리 교실, 언어 수업 등 전통 문화 보존에도 공을 들였다.

LIRC의 활동이 리틀 이탈리아 상권 활성화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을 분석한 보고서는 없지만, 지역 언론에서는 전통 보존적인 외관 개선, 마케팅 지원 등을 통해 고객 및 관광객 유입과 체류 시간이 전반적으로 늘었고, 각 사업체들의 매출도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공통적으로 보도한다. 특히 성모 승천 축제(Feast of the Assumption) 등 전통 축제와 거리 예술 이벤트 등이 결합하면서 오하이오주 내에서 이탈리아 문화 체험을 원하는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됐다. 물론 지금도 더 많은 개발을 원하는 사업자들과 보존을 추구하는 주민 사이의 크고 작은 긴장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LIRC 활동의 지속성 문제 등 리틀 이탈리아가 안고 있는 여러 도전 과제들은 만만치 않다. 다만 LIRC를 중심으로 오랜 시간 이런 문제들을 놓고 쉼 없이 소통하면서 해법을 찾아온 리틀 이탈리아의 저력에 대한 주민들의 믿음은 굳건하다.

LIRC의 사무국장인 조 마리누치 씨는 “우리는 개발을 통해 성장하자는 압박과 지역의 역사적 측면을 존중해야 한다는 내부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했고, 어려운 과제였지만 그 선을 지키려 집중했다”며 “리틀 이탈리아는 상권이 성장했음에도 도시적 정체성을 잃지 않고, 오히려 이를 기반으로 경쟁력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옳은 선택이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클리블랜드(미국)/글·사진=전창훈 기자 jch@busan.com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전창훈 기자 jc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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