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칼럼] 응급실 뺑뺑이와 고교생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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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은 응급의료 스타트업 <달구> 대표이사/전 한국응급구조학과 교수협의회 회장

부산의 한 고등학생이 뇌출혈로 쓰러진 지 몇 시간 만에, 끝내 응급실 문턱도 밟지 못한 채 구급차 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것은 ‘불운한 비극’이 아니라 국가 응급의료체계가 눈앞에서 무너진 사건이다.

나는 의사도, 소방공무원도 아니다. 현장에서 데이터를 가장 가까이 보아 온 연구자이자 교수였으며 지금은 응급의료 딥테크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개발자이자 대표이사로서 이 글을 쓴다. 의료계도, 소방청도, 복지부도 아닌, 그 사이에서 데이터를 정책과 기술로 번역해 보려 했던 사람의 입장이다.

고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의 가장 큰 업적은 닥터헬기가 아니라 국가응급진료정보망(NEDIS)을 구축한 것이다. 우리는 데이터를 통해 세상을 본다. 어느 지역의 어느 병원이, 어느 시간대에, 어떤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지, 공간·필수장비·인력의 실시간 현황을 마구잡이가 아니라 인간의 인지 능력이 신속하게 판단 가능하도록 시각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2024년 ‘중앙응급센터 전산망 노후화, 셧다운 우려’가 제기됐다. 노후율 140~214%라는 숫자는 단순한 행정 지표가 아니다. 데이터로 응급의료체계를 바꾸고자 했던 그의 집착적 철학을, 우리가 얼마나 가볍게 소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지금 이송 중인 환자의 활력징후와 위험도가 무엇인지, 그 환자가 길 위를 얼마나 떠돌고 있는지, 어느 병원이 몇 번 어떤 사유로 그를 거부했는지, 그 의사결정자는 누구인지. 그리고 그러한 거부가 반복돼 일정 위험 매트릭스 트리거가 충족되는 순간, 광역응급의료상황실이 그 환자를 강제 수용할 병원을 지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데이터는 이송받을 병원은 물론, 소방청장과 보건복지부 장관, 원한다면 대통령까지 언제든지 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강제’는 곧 ‘명령’이 아니다. 의료는 명령의 언어가 아니라 포용과 이해의 언어다. 의사가 환자 전원을 의뢰할 때 ‘고진 선처를 바란다’는 문장을 더러 덧붙이는 이유도 같다. 상대 병원의 사정을 알면서도, 이 환자만큼은 한 번만 더 받아 달라는 간절함이 그 짧은 문장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최후의 안전망도 법적 강제력 위에 서되, 병원 간 신뢰와 상호 협조, 호혜적 이해에 기반한 행정조치가 되어야 한다.

일본은 나라현의 비극 이후 ‘마못테 넷(Mamotte Net)’이라는 ‘최후의 안전망’을 만들었다. 우리는 아직 아무런 안전망도 갖지 못한 채, 전화기 하나에 의존해 고중증 환자의 생사를 구급대원과 현장 의사 개인의 어깨에만 올려놓고 있다.

이제 물러설 시간도 없다. 한 젊은 청년의 죽음을 다시는 소비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양심들이, 외상센터를 ‘돈잔치’의 수단으로 17개로 찢어 놓은 그래서 ‘규모의 의료’를 망가뜨린 정치와 관료주의를 단호히 거부했던 이들, 그리고 고 윤한덕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그 연대 위에서만, 0과 1로 설명되지 않는 응급의료체계의 불확실성을 우리가 함께 감당하고 극복할 수 있다.

박시은 응급의료 스타트업 <달구> 대표이사 박시은 응급의료 스타트업 <달구>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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