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내란 세력 척결이라는 '절대 반지'

전창훈 기자 jc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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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훈 서울정치부장

계엄 실패 이후 권력·명분 모두 가진 여권
내부 비판도 무시한 채 개혁 속도전 몰두
5년 권력 한계 간과한 채 위험한 질주
자멸 부르는 절대 권력의 위험 경계해야

12·3 비상계엄은 무모한 도박이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자신과 측근들의 안위 뿐만 아니라 당시 집권당인 국민의힘의 명운까지 게임판 위에 ‘올인’했다. 도박은 실패했고, 위태로웠던 여야 간 힘의 균형은 완전히 무너졌다. 계엄 역풍을 등에 업은 다수 야당 더불어민주당은 결국 입법에 이어 행정 권력까지 차지했다. 여기에 내란 종식이라는 명분까지 손에 쥐었다. ‘내란 세력’이라는 단어가 주는 엄청난 위압감 앞에서 야당의 어떤 저항이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까. 민주당으로서는 그야말로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절대 반지’가 수중에 떨어진 셈이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듯, 막강한 권력을 절제력 있게 행사하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때로는 정권을 떠받치는 핵심 지지층과 충돌을 불사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양립 불가능 지경인 여야 사이에 합의 정치에 대한 희망을 되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국회 시절에 누구보다 강성이었던 이재명 대통령이 임기 초반 통합과 협치를 강조할 때는 상당한 기대를 갖기도 했다.

하지만 소위 개혁 속도전을 벌이는 최근 여권의 행태를 보면 절대 반지의 위력에 흠뻑 취한 듯하다. 반대는커녕 ‘좀 과하다’는 지적조차 수용할 뜻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개혁 저항 세력으로 찍어 누르려는 고압적인 기류가 팽배하다. 사법부 개혁에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법원장들의 주문은 “자업자득”으로 몰아세우고, 왜 바꾸는지 설명이 부족한 정부 조직 개편을 비판하는 공무원에는 “불만이면 퇴사하라”는 날 선 목소리가 날아든다.

내란특별재판부든, 내란전담재판부든 결국 여권이 원하는 판결을 할 수 있는 판사로 바꾸기 위함이라는 본질은 같다. 정치 권력이 판사를 성향에 따라 취사선택하려는 행위 자체가 사법권 독립 침해이며, 삼권분립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은 상식적이다. 여당 지도부는 이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상고심 선고에서 ‘정치 판결’을 내린 사법부가 독립을 외칠 자격이 있느냐고 비판하지만, 집권당이라면 그런 감정적인 대응이 우리 사법 시스템에 두고두고 미칠 해악을 더 깊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방송통신위원회를 해체하고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를 새로 설치하는 법안 역시 다분히 감정적이다. 현 이진숙 위원장 ‘찍어내기’ 의도라는 걸 민주당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이 위원장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특정인을 배제하기 위해 정부 조직의 근간을 흔들면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내란 척결이라는 깃발 아래서 수단의 적절성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태도다.

검사의 힘을 남김없이 빼는 게 요체인 검찰 개혁안 또한 복수심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진보 성향의 법조인들조차 검찰의 보완수사권마저 사라질 경우 부실 기소와 사건 지체 등 부작용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고 있지만 ‘검찰 없으면 나라가 망하냐’는 냉소적 반응만 넘쳐난다. 1% 정치 검사의 힘을 빼려고 99% 검사를 희생시키고, 사법 서비스의 질을 하락 시킨다면 이걸 개혁이라고 할 수 있나. 보다 근본적인 의문은 검찰에게 빼앗은 대부분의 권한을 넘겨 받는 경찰이 향후 ‘정치 경찰’이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은 어디서 오느냐는 것이다.

내란 척결을 앞세워 지방선거 지형을 유리하게 만들려는 시도도 노골화되고 있다. 최근 행정안전부가 국민의힘 소속 지자체장을 겨냥한 감찰에 나선 것은 아무리 봐도 무리수다. 당일 행안부 지시 전 청사 폐쇄를 미리 해 계엄에 동조했다는 것인데, 일단 진위 여부가 명확하지 않고 그 날의 상황과도 맞지 않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오세훈 서울시장은 계엄 당일 밤에 “계엄에 반대한다. 계엄은 철회돼야 한다”는 입장문을 전국 지자체 중 가장 먼저 발표했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박 시장은 사석에서 계엄을 강하게 비판한 기자의 칼럼에 깊이 공감하기도 했다.

물론 여권의 내란 공세가 힘을 받는 건 야당인 국민의힘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계엄 직후 윤 전 대통령과 절연하고, 반성과 쇄신에 나섰다면 내란 척결이 지금처럼 야당을 향한 전가의 보도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탄핵 트라우마’만 되뇌던 국민의힘은 정반대 방향으로 역주행 했고, 지금도 ‘윤 어게인’ 세력과 기묘한 동거를 하면서 내란 동조 정당이라는 굴레에 스스로 매여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절대 반지는 종래에 그 파괴적인 힘을 주체하지 못해 주인을 스스로 자멸케 한다. 첫 탄핵 이후 탄생한 문재인 정부도 임기 초반 80%가 넘는 지지율을 보였지만, 부동산 정책, ‘조국 사태’ 등에서 여론을 무시한 독선적 행태로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절대 반지의 어두운 운명을 반복하지 않는 길은 무엇일까? 영화 주인공처럼 스스로 반지의 유혹을 떨쳐내는 길 밖에 없다.


전창훈 기자 jc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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