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되돌아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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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다시 돌아오고
꽃들도 돌아오고
이야기와 기억들도 되돌아온다

봄에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꽃들이 피고 지는 걸 보려면 넋을 놓고 지내서는 안 된다. 휑하던 가지에 꽃봉오리가 맺히는 것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연분홍 꽃잎들이 만개했다가 바람에 흩날린다. 꽃이 피어나는 순간에 나는 무얼 하고 있었는지, 문득 고개를 들어보고 나서야 ‘벌써 이렇게 가득 피었네’ 하고 놀랄 때가 많다. 하지만 개화라는 것이 그렇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미 나무 안에서 진행되고 있던 일이 그제야 내 눈에 보였을 뿐. 그러니까 봄은 없던 것들이 생겨나는 계절이 아니라,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자취를 감췄던 색채들이 다시 나타나는 시간이고, 무언가가 사라지지 않고 되돌아온다는 증거이며, 그 풍성한 꽃잎들의 향연 속에서 내 정신의 나태함을 일깨우게 되는 계절이다.

이처럼 계절은 다시 돌아오고, 꽃들도 돌아오고, 우리를 둘러싼 이야기와 기억들도 되돌아온다.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의 감각으로, 때로는 불현듯 스쳐 가는 어떤 냄새나 소리로, 때로는 누군가가 공들여 만든 예술 작품을 통해서. 그 이야기와 기억들은 내가 보거나 겪은 일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어떤 일들은 직접 겪지 않았어도 내 눈앞에 되살아나 또 하나의 기억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제주 4·3 때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당시의 상황에 대해 정규 교육과정에서 제대로 배운 세대도 아니지만, 어떤 경로로든 그때의 이야기들이 내 앞에 당도해 있을 때가 있고 그런 순간마다 이야기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된다. 이미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다시 피어나는 장면이 된다.

얼마 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 등장하는 주인공 경하와 인선은 제주의 비극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 당도한 그날의 고통을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그 기억들과 ‘작별하지 않’기로 한다. 지난 2월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던 정지영 감독의 신작 영화 ‘내 이름은’에서는 제주 4·3을 직접 겪어낸 인물이 등장하는데, 지우고 싶으면서도 끝내 지켜내야 할 기억을 아프게 소환한다. 예술 작품 속 허구의 인물들이지만 그들이 느끼는 고통은 허구로 보이지 않는다. 역사 속에서 반복되었던 폭력의 트라우마가 독자와 관객들의 몸과 마음에 겹겹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제30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김홍 작가의 소설 <말뚝들>에서는 사회적 참사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이 말뚝이 되어 도심지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 말뚝을 마주한 이들은 속절없이 눈물을 흘리는데,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울기 시작하자 국가는 이를 비상사태로 규정한다. 함께 슬퍼하고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위협이 된다. 그래서 애도를 폄하하고 분열을 조장하기도 한다. 노란 리본에 담긴 작은 애도의 표시에도 지겹다고, 그만 좀 하라고, 불편한 시선을 쏘아대는 걸 보면 소설 속 상황이 결코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은 언젠가 되돌아온다. 지금 이 지구상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폭력, 고통과 죽음의 기억들도 그러할 것이다. 물리적으로 먼 곳의 사건들이기에 때때로 우리와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자꾸만 반복되는 상황이 빚어내는 피로감에 전부 다 외면하고 싶어지기도 하겠지만, 무관심과 침묵 속에 잠시 가려졌다 해도 진실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언젠가 우리 눈앞에 드러난다.

4월, 한낮의 봄볕에 몸과 마음이 노곤히 풀어지기도 하고 온갖 꽃들의 향연에 도취하기도 하는 아름다운 계절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참혹하고 잔인한 계절이었으며 누군가에게는 매번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계절이기도 하다. 순간순간 되살아나는 이야기들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할 시간 앞에 우리는 서 있다.

서정아 소설가. 부산일보DB 서정아 소설가. 부산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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