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움직인 스무 명, 그들을 성장시킨 스무 권의 책

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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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무 살의 독서 노트/노영민 외 19명

“내게도 그런 책이 있다. 내 몸 전체를 통과해서 그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뒤의 내가 확연히 다른 듯이 느껴지게 하는 책. 그 책의 울림에 이끌려 내 삶의 궤적을 그려 나가게 된 책. <전태일 평전>, 지금 불리는 그 책의 이름이다. 그러나 내가 처음 만났을 때는 그 글에 제목이 없었다. 지은이도 없었다. 인쇄된 책자도 아니었다. 타자기로 친 종이 묶음이었다.” 이화여자대학교 76학번 이현숙 씨가 <전태일 평전>을 읽고 쓴 글의 도입부다.

<스무 살의 독서 노트>는 50년 전인 1976년 대학에 입학한 스무 명이 20대 때 처음 읽은 책에 관해 쓴 일종의 옴니버스식 서평집이다. 스무 명이 한 권씩 맡아 썼으니 소개되는 책도 스무 권이다.

책장을 넘기기에 앞서 표지에 나열된 스무 명의 저자가 먼저 눈길을 끈다. 통상 저자가 5~6명이 넘으면 표지에 개개인의 이름 대신 단체명을 적거나, ‘○○○ 외 ○명’으로 표기하곤 한다. 그런데 이 책은 표지는 물론이고 좁다란 책등에조차 스무 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일일이 다 새겼다.

책의 기획자는 노영민. 3선 국회의원이자 주중국 대사,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지낸 정치인이다. 나머지 저자들 역시 국무총리와 국회의원, 특광역시교육감, 차관급 이상 정무직 공무원 등을 지냈거나 현직으로 일하는 소위 '힘 있는 이들'이다. 출판사는 이들을 ‘세상과 맞선 이들’이라고 했다. 한국 민주주의 최대 암흑기로 불리는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운동권들의 인식을 확장하고, 인생 경로를 통째로 바꾸게 한 독서 노트에는 어떤 책들이 포함될까?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나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처럼 스테디셀러로 요즘에도 여전히 읽히거나, 완독하진 않았지만 한 번쯤 들어봤음 직한 책들도 많다.

글로 보여주는 스무 편의 성장 다큐라고 할 수 있는 <스무 살의 독서 노트>는 4장으로 진행된다. 1장 ‘절망의 시대, 희망을 배웠다’는 현재까지 많이 읽히는 책 위주로 다뤘다. 대학 4학년이던 1979년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만난 이준식은 민족이라는 새로운 관점과 민중을 주체로 하는 역사관에 눈뜬 계기가 됐다고 돌아봤다. 그는 훗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2장 ‘어떻게 살 것인가’에는 경제학(인간과 재화), 교육학(페다고지), 철학(자유로부터의 도피), 역사학(서양사 총론), 여성학(여성론) 등 다양하고 폭넓은 분야의 책이 등장한다. 3장 ‘그가 내 인생을 바꿨다’에서는 50년간 삶을 이끈 나침반 같은 책들이 소개된다. 시몬 베유의 <뿌리박기>,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 황석영의 소설 <객지>도 보인다.

4장은 ‘저마다의 응원봉을 들고’이다. 저자들이 ‘사회 곳곳에서 기성 질서를 거스르며 거친 들판의 푸른 솔처럼 우뚝 서 헌신하며 살’(우원식 국회의장 추천사 중)았음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여러 문제에 깊은 아쉬움을 털어놓는 내용이 나온다.

마지막은 신경림의 시집 <농무>를 다룬 성종대의 글이다. 어떤 평론가의 멋진 문장에서도 볼 수 없는, 가슴 깊이 공감되는 서평이 신경림의 무심히 절절한 시와 찰떡이다. 노영민 외 19명 지음/윤출판/376쪽/2만 2000원.


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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