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한동훈 제명이 국힘에 진짜 위기인 이유
전창훈 서울정치부장
당권파의 '여론 조작' 주장 근거 빈약 불구
전례 없는 축출, 전통·규율 무너진 당의 민낯
방치하면 더 큰 몰상식·퇴행 직면할 것
‘당원 게시판’ 사건의 실체를 두고 장동혁 대표 등 당권파들은 ‘여론 조작’이라고 단언한다. 최근에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대체 어떤 글이길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경찰 수사를 지켜보자고 하니 수면 아래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 보면 그런 무시무시한 낙인 찍기의 근거가 빈약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가 2024년 5~11월 한 전 대표 가족 5인이 썼다고 보는 1428건의 게시글 중 상당수는 윤 전 대통령 부부에 대한 비판적 사설·칼럼이라고 한다. 최초 논란이 된 이른바 ‘개목줄’, ‘단두대’ 등 윤 전 대통령 부부를 향한 원색적인 비난 글은 작성 주체가 불분명하고, 전체 글 중 600건 가량은 진위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당무감사위 주장이 100% 맞다고 가정해도 치밀한 음모도, 정교한 논리도 없는 조악한 글 몇 건이 게시판에 올라가고, 일부 언론이 기사화했다고 해서 당내 여론을 ‘조작’까지 할 수 있다는 발상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당원 수준을 너무 낮게 보는 거 아닌가. ‘드루킹’ 사건의 경우, 포털 사이트 아이디 3000여 개를 이용해 댓글 118만여 개의 순위를 조작했다고 한다. 이것과 비교해보면 이번 사안의 무게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짐작해볼 수 있겠다.
사태 초기 장 대표조차도 “익명 게시판에 그 정도도 못 올리냐”던 바로 그 사건은 강성 지지층과 당권파의 ‘증폭’ 과정을 거쳐 당무위·윤리위에서 ‘마피아급 해당행위’로 비화됐고, 결국 당 대표를 파문으로 내모는 ‘중범죄’로 확정됐다. 한 전 대표의 비타협성, 정치력 부재를 지적하는 시각도 적지 않지만, 이런 ‘빌드업’ 과정을 보면 한 전 대표의 대응이 달랐더라도 다른 결론이 나왔을까 싶다. ‘윤 어게인’ 세력의 탄핵 복수전과 장동혁 사단의 정적 제거 야심이 맞물린 권력투쟁이라는 해석이 이 사건의 본질에 더 가깝다고 보는 이유다.
한 전 대표를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의 정치적 생사는 내 관심사도 아니다. 다만 이번 사태가 ‘문제적’인 건 전통도, 규율도 무너져버린 제1야당의 위기를 상징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정당사에서 현재 권력과 미래권력, 또는 정치적 반대파와의 충돌은 늘 있었다. 그 정도가 강할 때는 ‘배신의 정치’로 낙인 찍혀 당내 고립무원 지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끝이 공천 불이익일지언정, 당에서 아예 축출하려는 시도는 전례가 없다. 정확지도 않은 혐의를 확정해 직전 당 대표를 파문하는 일은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당권파와 가까운 구 친윤(친윤석열)계에서도 “제명은 아니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당 결정 구조를 장악한 소수 당권파들은 이를 철저히 무시했고, 당 원로들의 고언은 “일천한 아집”, “메타 인지나 키우라”는 30대 당권파 대변인의 험한 대거리에 힘 없이 묻혔다. 민주공화당을 기원으로 치면 60여 년 역사의 보수 대표 정당이 당에 갓 들어온 극단적 패권주의자들의 놀이터가 된 듯하다면 너무 심한가.
이런 일이 가능한 건, 이런 일을 벌여도 별 문제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 돌아가는 형국이 그렇다. 제명 초기 반발 움직임은 ‘의원직이라도 걸 거냐’는 조롱에 별다른 반박도 못 한 채 희미해졌다. 지방선거 국면이 본격화되면 언제 이런 일이 있었냐는 듯 ‘당 지도부를 중심으로 단일대오’를 외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장 대표는 ‘중도는 허상’이라는 신념이 강하다고 한다. 당의 극단화, 우경화에 부정적인 ‘중간 지대’는 결국 강한 리더십에 끌려올 것이라는 믿음일 테다. 적어도 이번 사태를 통해 장 대표의 이런 인식은 더 굳어질 것 같다. 비단 장 대표 만의 시각도 아니다. 계엄이라는 희대의 자충수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현 여당도 당내 비주류·중도파를 조리돌림해 당 밖으로 내몰았고, 기어이 ‘비명 학살’ 공천으로 1인 정당 체제를 완성했다. 이런 앞선 성공(?) 경험이 당권파에게 좋은 교과서가 됐을 수도 있겠다.
현재 전 세계 여러 나라가 직면한 민주주의 위기 앞에는 제도권 정당의 위기가 선행됐다. 이 문제를 날카롭게 분석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저자인 레비츠키 하버드대 교수는 양극화된 사회의 가장 큰 적으로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semi-loyal democrat)를 지목했다. 평범한 다수이지만, 자기 진영에 권위주의적 행동이나 폭력이 등장했을 때 단호히 배제하지 않고 포용·동조함으로써, 권위주의 세력을 주류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이들의 행태가 양극화된 정치 체제의 제일 큰 자양분이라는 것이다.
한 전 대표 제명 이후 국민의힘 내부 모습을 보니 이번 사태가 예외적 현상이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어쩌면 다음엔 극우 유튜버가 당 요직을 차지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진이 당사 벽에 걸릴 수도 있겠다.
전창훈 기자 jc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