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걸음마의 미학: 반 고흐가 밀레에게서 발견한 '인간의 첫 제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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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첫걸음(밀레를 따라), 1890, 캔버스에 유화, 72 x 91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반 고흐, 첫걸음(밀레를 따라), 1890, 캔버스에 유화, 72 x 91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병오년 새해가 밝았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 속에는 언제나 복합적 감정이 응축되어 있다. 반 고흐는 밀레의 ‘첫걸음’을 다시 그렸다. 물감 자국이 선명한 붓질은 강렬하고 생동감이 있다. 화면 전체에 흘러넘치는 곡선과 흔들리는 붓의 결은 그가 포착하는 세계가 정적인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물러나며 감각의 층위를 흔드는 장(場)임을 말해준다. 여기서 가족의 작은 정원은 아이에게 첫 무대이자, 삶 전체를 압축한 축소판이다. 이곳에서 아이는 수없이 반복해야 할 ‘작은 발걸음’을 처음 시도한다.

그림 속 부모는 환대와 돌봄의 제스처를 보여준다. 아빠는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고 팔을 넓게 벌린 채 아이를 기다린다. 반면 엄마는 아이의 몸을 살짝 받쳐주며, 균형을 유지할 최소한의 힘만 제공한다. 이는 보호와 자율의 섬세한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의 기술’(art)에 가깝다. 이를 바탕으로 아이는 불안하고 흔들리는 첫걸음임에도 손을 뻗는다.

반 고흐는 밀레의 장면에서 노동의 고단함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맺는 가장 근원적인 관계, 즉 돌봄과 의지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여기서 걸음마는 한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인간 사이의 첫 신뢰 관계가 형성되는 순간이다. 반 고흐는 밀레의 장면에 자신의 색과 감정을 불어넣는다. 초록의 울렁이는 색면, 노란 땅의 따스함, 파란 옷이 가진 고요한 안정감, 모든 색은 빛을 머금은 듯한 울림을 내뿜으며 아이의 첫 발걸음을 축복한다. 특히 아버지의 몸짓에서 느껴지는 앞선 이의 기다림, 허리 굽혀 아이를 감싸는 어머니의 자세에서 보이는 보호의 에너지 등은 반 고흐 특유의 정서적 깊이가 만들어 낸 것이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장면은 감각을 통해 지각하기 이전에 우리 몸에 떨림이 발생하는 정동(affect)의 사건이다.

반 고흐의 ‘첫걸음’은 새해를 맞아 ‘처음’이라는 말의 무게와 아름다움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인간의 가장 단순한 몸짓인 걸음마는 결국 우리가 평생 반복하는 행위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또다시 발을 내딛는 행위.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매번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다.

이 지점에서 니체의 말을 떠올린다. “삶에 ‘왜’가 있는 사람은 거의 모든 ‘어떻게’를 견딜 수 있다.” 우리가 새해마다 다시 첫걸음을 내딛는 힘은 바로 그 ‘왜’에 관한 감각, 누군가의 기다림, 세계의 환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2026년, 우리의 첫걸음도 이 그림 속 아이처럼 떨림과 용기를 품고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서로에게 아낌없는 격려와 따뜻한 손짓이 더해지기를 바란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미술평론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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