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저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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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란(1961~)

새끼들을 거느린 오리가 이쪽을 옮긴다 어미 한 마리에 예닐곱 마리 오리 병아리가 줄을 서서 옮기는 이쪽, 차들이 멈춰 서서 오리떼가 길 건너로 무사히 이쪽을 옮겨가기를 기다린다 저쪽에 확실히 무언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다 이쪽을 옮겨가면 더 고즈넉한 것, 이쪽을 옮겨가면 더 아득한 것, 이쪽을 옮겨 가면 더 환한 것, 이쪽이 조심조심 오리떼를 타고 저쪽으로 건너간다 오리떼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차들을 세우고,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위대한 사업에 사람과 차들을 동참시킨다 길 건너 저쪽이 나란히 줄 선 오리떼가 옮겨오는 이쪽을 기다린다

-시집 〈분홍이라니〉 (2025) 중에서

새끼들을 데리고 안전한 물가나 서식지로 이동하는 어미 오리를 보며 시인은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위대한 사업을 봅니다.

이쪽이 무사히 잘 건너오길 기다려주는 저쪽. 단순한 공간적 대립이 아니라, 구분되는 두 영역 또는 상태의 경계를 나타내는 이쪽과 저쪽은 삶과 죽음, 현실과 이상 같은 철학적 개념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화자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개념이기도 하지요. 언제나 건너야 할 저쪽이 있는 이쪽. 그 경계를 넘으려 할 땐 결단이 필요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무수한 경계들을 건너야 하는 생명들이 있습니다. 어미만을 믿고 따라가는 새끼들의 모습, 오리 가족을 따라 저쪽으로 건너가는 이쪽을 보며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건너가고 있는 우리의 존재론적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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