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킹 달러’ 시대 생존법
세계 최강 국가인 미국의 달러는 국제무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결제 수단이다. 글로벌 기축통화인 달러와 다른 화폐의 환율은 각 국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현재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는 달러 강세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달러 환율이 높아질 수록 수입 물가 상승 등 각종 부작용이 연쇄적으로 촉발되기 때문이다.
지난달 24일 기준 1달러 당 원화 환율이 1475.2원을 기록했다. 이 환율에 따른 현물 달러 구입가는 1501.01원에 달했다. 이후 지난 4일까지의 환율은 1470원대 전후로 들쭉날쭉하고 있지만 사실상 체감적으로 1500원 시대에 진입한 느낌이다. ‘달러 계엄’이라는 말까지 나돈다. 달러 초강세가 이젠 뉴노멀이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 대응센터 직원이 달러를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달러가 계속 초강세를 보이면 국민 생활도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은 현재 미국과의 불공정한 관세 협상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3500억 달러(514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이행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면서 외환보유액에도 비상이 걸린 상태다. 더욱이 이번 환율 인상의 가장 큰 원인은 미국 금리 인상에 따른 것으로 현재까지 분석된다. ‘서학개미’ 등의 해외 주식 투자 급증에 따른 외환 유출 등도 원인으로 지목됐다. 더군다나 환율이 높아지면서 달러나 달러 표시 자산을 보유하려는 시도가 잇따를 경우 환율은 더 오를 수밖에 없다. 장기적으로 미국 금리가 추가 인상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사실상의 ‘킹 달러’ 시대, 어떤 일이 우리에게 닥칠까.
■ ‘킹 달러 시대’ 본격 도래하나
이번 달러 초강세의 주된 원인은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가 금리를 인상했기 때문이다. 연준은 올 6월 기준 금리를 0.25%p 인상했다. 2001년 이후 22년 만에 최고 수준의 인상이었다. 연준이 금리를 인상하면 미국 채권 금리와 달러 자산의 수익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자본이 미국으로 쏠린다. 반면 원화는 수요 감소로 상대적 가치가 하락하기 때문에 원달러 환율이 올라가는 구조다. 미국 금리 강세로 인한 달러 강세의 경우 통상 ‘킹 달러’ 현상으로 분류한다.
특히 연준은 올 9월 경제 성장세와 인플레이션 추이에 따라 추가 인상 또는 동결 가능성을 열어두겠다고 밝혔다. 따라서 전 세계의 이목은 오는 9~10일(현지 시간) 열리는 연준의 FOMC(연방공개시장위원회) 정례회의에 쏠려있다. 금리가 추가 인상될 경우 원달러 환율은 더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킹 달러’ 시대도 본격화할 전망이다.
다만 시장은 연준이 이번에 기준금리를 인하할 것으로 기대한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에 따르면 금리 인하 예상치는 87.4%에 달한다. 실제로 인하된다면 한국도 한숨 돌릴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 금리가 인하되더라도 미국의 인플레이션 우려가 높아지면 언제라도 다시 인상될 가능성이 높아 향후 ‘킹 달러’ 사태는 뉴노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원달러 환율이 1470원대 중반까지 치솟은 지난달 25일 서울 명동의 환전소에 환율이 표시되어 있다. 연합뉴스
■ 서학개미, 국민연금 때문일까?
미국 금리인상이 주도한 이번 환율 상승에는 서학개미와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 증가도 한몫을 했다는 분석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3분기 ‘일반정부’ 해외주식 투자는 총 245억 1400만 달러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127억 8500만 달러)보다 92% 증가한 수치다. 같은 기간 ‘비금융기업 등’의 해외주식 투자는 95억 6100만 달러에서 166억 2500만 달러로 74% 늘었다. 일반정부는 국민연금으로, 비금융기업 등은 서학개미로 불리는 개인투자자로 각각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다는 설명이다.
이런 통계는 서학개미와 국민연금의 미국 주식 투자로 달러 유출이 증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각에서는 해외 투자 증가로 달러 수요도 급증하면서 환율 상승의 압력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한다. 여기에 더해 대미 투자 협상 관련, 기업들의 해외 투자 확대에 따른 달러 매도 물량 감소도 환율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해석이다. 수출 기업의 달러 보유 선호, 원화 가치 하락을 우려하는 일반 개인들의 달러 예금 증가 등도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분석에 대한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달러뿐만 아니라 유로화와 파운드화에 대한 환율도 상승했기 때문이다. 2021년부터 최근까지 약 5년간 유로 환율은 29.1%, 파운드 환율은 31.9% 상승했다. 이 기간 동안 달러 환율은 35.9% 상승했다. 원화 가치 절하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는 방증들이다. 즉, 국제 시장이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원화 가치가 계속 떨어진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 치솟는 물가… 서민·기업 직격탄
환율이 급등하면 기업은 물론 서민들까지 직접적인 경제적 타격을 받는다. 물가가 올라가고 기업의 이자 부담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에너지와 원자재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 경제 구조를 감안할 때 환율 상승은 주유소 기름값, 전기료, 생식품 물가 폭등을 부추긴다. 생활비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미 고물가에 신음하는 서민들에게 ‘킹 달러’는 재앙인 셈이다. 해외 여행, 유학, 해외 직구 등에 따른 비용도 더 늘어난다. 더군다나 이미 서민들은 가파른 물가 상승 때문에 지갑을 쉽게 열지 못하고 있다. 자영업자 등은 더 버틸 여력이 없다며 아우성이다. 여행과 유학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이어지고 있다. 가격 경쟁력을 확보한 수출 기업에겐 호기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킹 달러’로 위안화와 엔화도 상대적인 달러 약세를 보인다면 장기적으론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원달러 환율 1500원 시대가 도래하면 기름값 등 각종 서민 물가가 치솟을 것으로 우려된다. 셀프주유소에서 주유하는 모습. 연합뉴스B
이미 소비자물가도 들썩거리고 있다. 소비자물가는 두 달 연속 2%대 중반의 오름세를 나타냈다. 수입 의존도가 높은 석유류와 수입 먹거리를 중심으로 물가 변동성이 커지는 모습이다. 원달러 환율 상승 여파가 가시화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국가데이터처가 지난 2일 발표한 '11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117.20(2020년=100)으로 1년 전보다 2.4% 올랐다. 체감물가에 가까운 생활물가지수는 2.9% 상승했다. 작년 7월(3.0%) 이후 1년 4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품목별로는 환율에 민감한 석유류와 농축수산물 등이 물가 상승의 주범으로 주목됐다. 석유류는 5.9% 뛰면서 올해 2월(6.3%) 이후 9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하고 전체 물가를 0.23%p 끌어올렸다. 특히 경유(10.4%), 휘발유(5.3%) 등에서 상승 폭이 컸다. 농축수산물 물가도 지난달 5.6% 상승했다. 수입 축산·수산물, 수입 과일이 환율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갈치(11.2%), 고등어(13.2%) 등은 수입산 가격이 오르며 10%대 상승세를 보였다. 중장기적으로는 가공식품, 외식 물가도 원재료 가격 상승으로 인해 오를 것으로 우려됐다.
■ 심각한 원화 소외…종합 처방 시급하다
달러 초강세 문제는 시대에 따라 상대적이다. 현재는 원달러 환율 1500원 시대 도래 여부에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후폭풍이 휘몰아치던 2009년엔 1400원 시대 도래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시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 1400원은 ‘빅 피겨(big figure)’로 불렸다. 보기 드문 상징적 숫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1400원 시대를 넘어 1500원 시대의 언저리까지 와있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1500원 시대를 걱정하고 있으나 머지않아 1600원 시대를 앞두고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킹 달러’가 뉴노멀이 된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킹 달러’ 시대를 걱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킹 달러’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미국 금리 인상과 한국 경제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한 ‘원화 소외 현상’까지 복합적으로 겹친 것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원화 가치의 폭락은 ‘셀 코리아(Sell Korea)’를 가속화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달러 표시 자산에 대한 분산 투자, 탄탄한 내수 기반이나 독점적 기술력을 가진 필수 소비재기업에 대한 가치 투자, 불필요한 대출을 줄이고 기존 부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 등을 개인들에게 조언한다. 하지만 현재는 이번 고환율의 정확한 원인 분석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이다. 더욱이 정부는 현재 서학개미 등에 대한 증세 검토 등 고환율 방어 대책을 추진하고 있으나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긴급 처방은 필요하겠지만 성장 잠재력 저하로 외국인 투자 매력이 하락하고, 달러도 빠져나가는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거쳐 단기와 장기 대책을 면밀히 수립해야 한다.
더욱이 한국이 처한 현재 상황은 굉장히 복잡하다. 한미 관세 협상 후폭풍, 다자주의의 종식과 국가 이기주의, 세계화 이후 부작용들의 발현, AI 등 미래 산업에 대한 뒤늦은 대응, 아시아태평양지역 지정학적인 리스크 증가, 미국과 중국의 갈등 등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영향을 주고 있다. 국내적으로론 비상계엄 사태로 인한 대외 신인도 추락과 정치 실종, 극단의 국론 분열, 수도권 일극주의로 인한 국토 불균형과 제한적인 확장성, 수도권의 비정상적인 집값과 인구 집중화, 제조업 위주의 산업 구조가 가진 한계, 노란봉투법 등을 둘러싼 기업과 노동계의 상반된 입장과 갈등, 저출산 고령화, 좋은 일자리 부족 등 현안이 산적한 상황이다. 결국 국내외적인 이런 현안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우리 경제의 체력 소진과 성장 잠재력 하락을 부추기고 있는 형국이다.
이번 환율 위기는 땜질식 처방으로 넘어가기 어려울 전망이다. 당국의 일시적인 달러 매도 등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정부는 환율 방어 대책을 추진하면서 시장 신뢰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 특히 여야의 극한 대치와 심리적 내전 상태 장기화 등 경제 발목을 잡는 각종 리스크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 지금 한국 경제는 한 번도 경험치 못한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번 기회에 우리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종합적으로 진단해 성장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데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특히 개인들은 이번 환율 사태가 과거의 사태보다 훨씬 심각하면서도 복합적 원인에 기인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현재 누구도 이번 사태를 섣불리 전망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 조급한 판단과 실행보다는 초장기적 관점을 갖고 이번 사태 흐름을 면밀하게 주시하는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지난 3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현황판에 원달러 환율이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