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초고령 부산, 창의적 노화가 미래를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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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진 동명대 유아교육과 교수·미래교육창의연구소 소장

 


“창의적 노화라니,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이 안 된 사람한테는 사치지요.” 최근 세계노인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던 날, 일본의 한 노인복지학 교수가 내게 던진 말이다. 필자가 발표한 주제는 중장년·노년기의 창의적 활동이 생애 후반기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일본의 교수는 기초연금·의료·돌봄이 우선이라는 현실적 이유를 들었다. 그 말은 이해되지만, 일본처럼 초고령화가 심화된 사회에서조차 창의적 노화를 ‘사치’로만 보는 시각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사회일수록 창의적 노화가 더 절실하기 때문이다.

창의적 노화가 사치처럼 보일 수 있는 현실은 분명 존재한다. 우리나라 노인빈곤율은 OECD 최고 수준이며, 기초연금만으로 기본생활 유지가 어려운 노인도 많다. 돌봄 공백, 만성질환, 고립·우울 등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여전히 적지 않다. 복지 현장에서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후순위로 밀리는 구조 역시 현실의 무게를 반영한다. 이런 상황에서 ‘창의적 노화는 사치’라는 지적은 어느 정도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있다. 우리 사회는 저출산과 유아교육의 위기를 말할 때 ‘유아기 창의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노년기의 창의성은 논의하지 않는다. 창의성은 특정 연령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필요한 인간의 기본 역량이다. 창의적 활동은 정서적 활력, 몰입 경험, 삶의 만족도를 높이며, 특히 신체·인지 기능이 저하되는 노년기에는 우울·무기력·사회적 위축을 완화하는 보호요인으로 작용한다. 어떤 일에 창의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창의성은 설렘이고, 몰입이며, 삶을 다시 앞으로 밀어주는 동력이다. 이 불씨가 사라지면 일상의 힘도 잦아든다. 그래서 창의성은 노년기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중요한 역동력이 된다.

이 관점에서 창의적 노화는 선택적 여가가 아니라 복지의 확장이다. 영국 예술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예술 활동에 꾸준히 참여한 고령자는 의료 서비스 이용률이 37% 낮았고, 우울·치매 위험도 감소했다. 창의적 활동은 개인의 취미를 넘어 건강·돌봄 비용을 줄이는 사회적 자원이다.

유로스타트(유럽연합 통계청)의 분석에 의하면 덴마크·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의 65~74세 노인 중 80% 이상이 최근 1년간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한다. 이는 생활안정 기반 위에 저비용 문화·학습 프로그램을 결합해 노년층을 지역축제·공공 프로젝트의 주체로 이끈 결과다. OECD 역시 문화 활동이 삶의 만족도·정신건강·인지 기능과 유의미하게 연결된다고 보고한다.

반면 한국의 현실은 다르다. 2023년 통계청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의 문화·여가 활동 참여율은 35.5%, 예술·창작 활동 참여율은 12%에 그친다. 부산은 고령 인구 비율이 이미 22%를 넘는 초고령사회임에도 문화예술 활동 참여율은 전국보다 낮은 20%대 후반이다. 비용, 접근성, 프로그램 부족은 반복적으로 지적되는 장애요인이다. 특히 원도심·산복도로 지역의 고립 위험군 증가 추세는 문화 접근성이 곧 지역 복지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삶의 후반기에 새로운 전성기를 연 사례는 창의적 노화가 공허한 이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미국의 그랜마 모지스는 평생 농장을 돌보며 살다가 78세에 처음 붓을 들었고, 그 늦은 출발은 1500점 이상의 작품으로 이어졌다. 프랑스의 마티스는 말년에 거동이 어렵던 시기에도 가위와 종이로 ‘컷아웃’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완성했다. 영국의 메리 델라니는 70대에 종이 모자이크 작업을 시작해 1000점이 넘는 식물화를 남겼다. 한국의 박서보 화백 역시 생애 후반기까지 작업을 멈추지 않으며 노년기의 창작 역량이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들의 경험은 창의성이 젊음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삶이 깊어질수록 다른 방식으로 발현될 수 있는 역량임을 증명한다.

노화는 쇠퇴의 시간이 아니라 숙성의 시간이다. 젊음이 속도와 가능성의 시기라면, 노년은 깊이와 의미를 발견하는 시기다. 그 깊이를 창작의 힘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돕는 일, 그것이 초고령사회 부산이 선택해야 할 미래전략이다. 창의적 노화는 사치가 아니라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필수 자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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