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의 금융포커스] 신용의 의미가 사라진 금융
서울경제부 차장
고신용자의 대출금리가 낮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금융상식이다. 최근 은행 창구 현실은 정반대 분위기다. 고신용자에게 높은 금리가, 저신용자에게는 오히려 낮은 금리가 적용되는 기형적 금리 구조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원인은 명확하다. 정부가 ‘포용·상생금융’을 강조하며 은행권에 취약계층 대출 확대를 압박했고, 은행들은 저신용·저소득층 대상의 정책금융 상품과 보증부 대출을 크게 늘렸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9월 “고신용자엔 낮은 이자로 고액을 장기로 빌려주지만, 저신용자에는 높은 금리로 소액을 단기로 빌려줘 죽을 지경일 것”이라고 발언하며 상생금융 확대를 주문했다. 이후 은행들은 정책금융 취급을 대폭 늘렸다.
이 대통령 발언 직후 고신용자 일반 신용대출보다 저신용자 보증부 대출의 금리가 더 낮아지는 ‘평균금리 역전’이 단기간에 발생했다. 은행연합회 자료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드러난다. NH농협은행의 경우 9월 신규 가계대출 기준, 신용점수 601~650점 차주의 평균 금리는 연 6.19%였지만, 600점 이하 차주는 5.98%로 더 낮았다. 8월까지만 해도 600점 이하 차주의 평균 금리가 7.1%였는데 한 달 만에 1%포인트 이상 급락했다.
이런 금리 구조는 금융시스템의 ‘가격 신호’를 심각하게 왜곡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신용이 높을수록 낮은 금리를 적용받는다는 기본 원칙은 금융시장의 핵심 규율인데, 원칙이 흔들리면 신용평가 체계의 신뢰와 대출 심사 기준도 함께 약화될 수밖에 없다. 성실하게 대출을 관리해 온 고신용자 입장에서는 명백한 역차별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은행권 내부 불만도 적지 않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리 산정 기준이 객관적 위험도나 시장금리가 아닌 정치적 신호에 따라 움직이게 되면, 부실 위험은 결국 은행뿐 아니라 국민에게 전가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당국 책임이 가장 크다. 금리는 시장 위험과 신용도를 반영해야 하는데 정책 목표를 무리하게 금리 체계에 주입하면서 금융정책 일관성 자체를 흔들었다는 비판이다. 취약계층 지원이라는 목적이 타당해도, 이를 ‘인위적 금리 인하’ 중심으로 설계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시장 기능을 저해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금리 왜곡이 지속될 경우 금융질서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연체율 상승과 부실채권 확대, 나아가 금융권 전체의 건전성 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는 정치적 구호보다 금융시장 안정이라는 원칙을 우선해야만 한다. 은행도 눈치 보기보다 본연의 역할을 지켜야 한다. 기본 질서가 무너지면 피해는 모든 국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김진호 기자 rplk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