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철의 사리 분별] 다자주의 흔드는 퇴행의 시대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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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 일방적 상호관세 발효
기존 국제 사회 큰 원칙 사실상 붕괴
약소국 보호 WTO 체제 종식 선언도

미국, 중국 견제 위해 모든 수단 동원
초강대국 사이에 낀 한국 위기 맞아
대외 전략 전면 재검토 새 질서 대응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각국에 부과한 상호관세가 지난 7일 발효됐다. 상호관세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무차별적이고 예의에 어긋난 관세율 책정은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 의중에 따른 것이었다. 기준은 오로지 미국의 국익이었다. 이번 상호관세는 기존 세계 질서에 큰 충격을 안겼다. 가장 주목할 것은 이번 관세 파동으로 기존 국제 사회의 가장 큰 원칙인 다자주의가 사실상 붕괴됐다는 것이다.

다자주의는 국제 문제를 한 국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국가가 협력적인 자세로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강대국에 유리한 힘의 논리를 억제하고 약소국 권익을 지키기 위한 취지다. 다자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구축된 것이 아니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등 지구촌을 큰 혼돈으로 몰아넣은 초대형 재앙과 냉전 시대를 겪으면서 서서히 자리 잡은 것이다. 갈등보다는 평화, 차별보다는 비차별, 일방주의보다는 상호주의에 의해 국가 간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롭다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한 인류의 진일보한 성과물이었다. 특히 이런 국제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인류는 개방성과 자유주의적 가치를 바탕으로 인도주의 문화의 발전, 진일보한 지적 체계 구축과 확산 등의 효과도 함께 거뒀다.

하지만 이번 미국의 관세 정책은 다자주의는 물론 인류가 그간 이뤄낸 문명적, 지성적 성과를 정면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더욱이 다자주의 무역질서를 상징하는 세계무역기구(WTO) 등의 존재도 부정하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상호관세 발효와 동시에 WTO 체제 종식을 선언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연합국이 자유주의에 기초한 경제 질서 확립을 논의하며 1944년 출범시킨 브레튼우즈 체제 51년, 그리고 그 이후 1995년 시작된 WTO 체제 30년 등 총 81년의 역사를 가진 지구촌 자유무역체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을 맞은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국제 사회나 인류 전체적으로 볼 때 미국 독단적 다자주의 종식 움직임은 명백한 퇴행이다. 인류는 기나긴 시간 동안 무수한 변곡점을 거쳐 현재를 맞았다. 인류가 맞은 현재는 과거 수많은 퇴행의 위기에 맞서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던 지난한 노력들의 결과물인 셈이다. 그 필사적인 과거의 노력들은 자유, 민주, 평등, 인류애, 화합, 인도주의, 다자주의 등 보편적인 가치를 확립하는 동시에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질을 증진하는 성과도 거뒀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에 다른 국가에 드러낸 강압적 태도는 인류 시계를 먼 과거로 되돌리는 역사적 퇴행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번 상호관세 사태로 야기된 기존 질서 파괴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 상호관세 부과는 확실한 목적을 갖고 있다. 미국을 독보적인 세계 최강 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어느덧 자신들을 위협할 만큼 성장한 중국을 강하게 견제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 미국은 당초 클린턴과 부시 2기 대통령 집권기 등을 거치면서 중국이 자신들의 경쟁 상대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심지어 클린턴 대통령 때인 1993년에는 중국에 대륙간탄도미사일 등에 필요한 고급 기술을 대거 수출하기 위해 법을 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중국이 안보와 경제 분야에서 엄청난 발전 속도를 보이면서 미국은 현재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다. 트럼프 1기와 바이든 정부를 거쳐 다시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하면서 미국의 전략 변화는 이미 예견됐다. 이번 상호관세 사태에서도 입증됐듯이 미국은 중국 견제라는 최우선 목표 달성을 위해 역사적 퇴행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세계 경찰국가 역할도 더 이상 수행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존 국제 질서를 미국 국익 위주로 전환하는 데 더욱 집중할 전망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미국이 동맹국을 챙기지 않는 것은 물론 강압까지 일삼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데다 중국을 도외시할 수도 없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한국의 운명은 너무도 위태롭다. 민감한 지정학적 위치, 수출 의존적 경제 구조 등에 따른 부담도 크다. 미국은 중국을 저지하기 위해 우리에게 국방비 증액, 군사적 역할 확대도 주문하고 있다. 대외 전략의 전면적 재검토는 물론 다자주의 복원 노력 등을 통해 새로운 국제 질서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25일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다. 클린턴 정부의 안일한 대중국 정책이 30여 년 뒤 다자주의 붕괴라는 인류 퇴행을 초래했듯이 오판은 후일 반드시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국가 미래를 위한 최선의 전략 마련을 당부한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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