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함부로 구는 일
김대현 연세대학교 글로벌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어떤 사생활은 유독 함부로 여겨진다. 사람을 함부로 대해선 안되지만, 어떤 사람의 사정은 ‘즙을 짜는’ 기만으로 읽히고, 그들을 그렇게 함부로 다루는 것도 싸다고 여긴다.
가령 성매매를 했거나 선정적인 ‘여캠’ 혹은 ‘벗방’을 한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들의 경험이 스스로 ‘윤락’을 택한 여성의 죄가 아니라 여성을 그곳으로 내몬 빈곤, 여성을 성적 기능으로 고정한 성 역할, 그 여성을 이용해 돈을 버는 다른 이들과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책임이 몹시 크다는 바가 수없이 강조되어도, 왠지 그런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그들의 반대편에는, 그들을 과연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을 함부로 할 수 있지만 당장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후자의 사람은 그럴 때 종종 내심 윤리적인 우쭐함에 젖는다. 그리고는 내가 대단히 접어주었기 때문에 거기에 따른 대접을 상대가 해주기를 바란다. 만약 그 대접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 그 사람은 아주 손쉽게 상대를 도로 함부로 대하기 시작한다.
성매매 현장의 성매수자들이 이런 원리로 소위 ‘진상’이 된다. 거기서 함부로 대하는 폭력과 함부로 대하지 않는 기사도는 종이 한 장 차이다.
본래 사람 사이의 윤리는 상호적이다. 누구나 살인할 수 있는 완력이 있지만, 그럼에도 살인하지 않는다. 누구나 악플을 쓸 수 있는 필력이 있지만, 그럼에도 악플을 쓰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애초에 나쁜 짓이고, 그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남들 또한 나에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한번이라도 그게 역전될 거라고 상상해보는 사람은 처신을 그렇게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관계들은, 누구는 영원히 함부로 대해도 되고, 누구는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할지 말지 언제든 선택 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 관계가 좀처럼 역전되기 어려울 때 그것을 보통 구조라 부른다.
과거 ‘벗방’을 한 여성이 사회적 지탄을 받을 때, 그 목소리에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있었다. 이처럼 젠더는 정체성이 아니라 관계와 구조의 산물이다. 관계에 얽힌 위계의 성찰 없이, 세상에 어떤 정체성인 것만으로 면제되는 책임은 없다. 그 책임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는 사람은, 내가 어떤 정체성에 속했다는 이유로 스스로 함부로 굴 수 있다고 믿는다. 한때 내가 겪은 피해가 치유되고 변혁될 사건이 아니라, 내가 뭔가를 함부로 해도 되는 정체성의 밑천으로 쓰일 때, 역설적으로 그 피해는 내가 함부로 굴 권리를 위해 그 자리에 가급적 오래 있을 운명에 처한다. 그 때에 그 피해는 눈물을 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