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윤의 세상톡톡] 비행기 탄 의사들이 마시는 와인
논설위원
기내에 환자 발생 때 울리는 닥터콜
득보다 실이 더 많은 위험 무릅쓰고
선한 의도로 의사가 나설 수 있을까
닥터콜도 선뜻 나서기 힘든 게 현실
의료진 필수의료 외면과도 '닮은 꼴'
의사 수 세는 것만으로는 해결 난망
지구인을 화성으로 이주시키겠다는 일론 머스크의 프로젝트는 지구인들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는 꿈이다. 하지만 역시나 꿈은 꿈이어서 달콤해 보일 뿐이라는 게 많은 과학자들의 지적이다. 일단 인간이 화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주에서 받을 방사선의 폭격을 견딜 수 있는 몸이 필요하다. 지구에서보다 100배나 많은 이 방사선을 약 9개월 정도 견딜 수 있다 하자. 다음으로는 돌발 상황에 독자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기술적 돌발 상황은 사전에 받은 교육으로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겠지만 몸에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의료진을 탑승시키는 게 근본 해결책이겠으나 좁은 우주선에 의료진까지 탑승하기는 무리다. 지구에서도 오지 탐험가들이 직접 자신의 배를 가르고 맹장 제거 수술을 한 사례가 보고될 정도이니 우주선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다.
우주를 곧 정복할 것 같았던 인간이 1960년대 말 달 착륙 이후 우주개발 답보 상태에 빠진 것은 이처럼 인체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가 어려워서였다. 인간에겐 아마도 인체 돌발 상황이 가장 난해한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그 난제는 운항중인 비행기 안에서의 돌발 상황에서도 예외가 없다. 운항중인 비행기도 우주선처럼 제한된 밀폐공간에서 상당 시간 고립돼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행기에서의 이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는 곧 한국의 의료 문제를 돌아보게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탑승객이 의식을 잃는다. 승무원들의 응급조치로도 탑승객의 상황이 호전되지 않자 결국 기내엔 탑승 의사를 찾는 ‘닥터콜’ 방송이 울려퍼진다. 이후 흔히 영화에서 보듯 영웅처럼 의사 탑승객이 달려오고 재빠른 조치로 환자가 회복되는 상황이 벌어질까.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는 사실은 연구 결과에서부터 드러난다. 서울대병원 국제진료센터 임주원 교수는 2016년 실제로 기내 닥터콜과 관련해 의사 44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이 조사에서 의사들은 무려 171명이나 닥터콜에 응하지 않겠다고 답변했다. 40%에 육박하는 의사가 닥터콜 외면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의사가 닥터콜에 응하지 않을 때 처벌해야 하느냐는 물음에는 93.7%인 417명이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이 의사들이 특별히 사회적 공헌에 무관심한 존재라서일까. 임 교수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닥터콜 외면 이유로 의사들은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을 첫손으로 꼽았다.
의사들은 현행 의료법상 의사가 닥터콜에 응한다는 건 득보다 실이 크기 때문에 선한 의도로 나서기를 꺼려한다고 입을 모은다. 중대 과실이 아니라면 민형사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법 규정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소명은 의사가 해야 하니 이익은 거의 바랄 수 없으면서 가시밭길로 가기 일쑤인 닥터콜에 어느 의사가 선뜻 응하겠느냐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의료계에서는 차라리 비행기를 타면 와인을 마시고 잠을 자는 게 낫다는 자조 섞인 얘기들이 오간다. 음주 상태로 의료행위를 하다 사고가 발생하면 처벌을 받게 되므로 스스로 음주 상태를 만들어 의료행위를 못하는 처지가 되는 게 낫다는 얘기다.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지상에서도 기내 닥터콜과 같은 상황이 존재한다. 바로 필수의료다. 기내 닥터콜이 한 탑승객의 문제 정도에 국한된다면 지상의 필수의료는 건강이 위험에 처한 수많은 환자의 문제라는 게 다를 뿐이다. 역시나 기내에서 닥터콜을 외면하는 건 탑승 의사 한 명 정도의 문제이지만 지상에서 필수의료를 외면하는 건 의료체계 전체의 문제인 것만 다르다. 대한민국은 기내 닥터콜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상의 필수의료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운항중인 비행기 안에 의사가 절반이 타고 있다고 해도 모두가 탑승과 동시에 와인을 마시고 잠이 드는 바람에 응급 상황 때 닥터콜에 아무도 응하지 않는다면 환자가 위급해지는 건 자명하다. 마찬가지로 한 해 배출하는 의사를 아무리 늘린다 해도 대다수의 의사가 소위 돈이 되고 안전한 과로 진출해 필수의료에 임할 의사가 없다면 의료체계 붕괴는 명약관화하다. 그나마 소수의 필수의료진마저도 수도권으로 집중하는 게 현실인 이 나라에선 이미 의료체계 붕괴는 상당히 진척됐는지도 모른다.
의정 갈등 봉합으로 의료 현장 정상화 논의가 다시 본격화하고 있지만 필수의료를 위한 의료진 확보는 아직도 요원한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