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돌보는 청소년, 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꿈을 저당 잡힌'영 케어러']

손희문 기자 moonsl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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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부모·형제 간병 1020세대
부산만 2만·전국 20만 명 넘어
실태 파악도 못 해… 사실상 방치
숨겨진 집단 ‘사회적 돌봄’ 필요

25일 오후 부산 동래구 명장동 집에서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일을 마친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다. 이재찬 기자 chan@ 25일 오후 부산 동래구 명장동 집에서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일을 마친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다. 이재찬 기자 chan@

중증질환이나 장애, 치매, 알코올중독 등이 있는 조부모나 부모, 형제자매를 돌보는 10~20대 ‘영 케어러(Young Carer)’가 부산에서만 최소 2만 명 이상이라는 결과(추정치)가 나왔다. 전국적으로도 20만 명 이상인 것으로 추산되지만 한국 사회는 실태조사조차 없이 영 케어러들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

24일 행정안전부 인구통계에 따르면 올해 11월 말 기준 부산시 청소년(9~24세) 인구수는 45만 3789명이다. 국내외 사례와 전문가 의견을 종합하면, 영 케어러는 일반적으로 해당 연령의 약 5~8%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에 거주하는 청소년 영 케어러도 약 2만 2689명에서 3만 6303명까지로 추산된다. 30대까지 범위를 확대하면 부산에 거주하는 10~30대 영 케어러는 5만 1953명~8만 3125명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전국 단위로 확대하면 영 케어러는 20만 명을 넘어설 것이란 분석이다. 최근 한국사회보장정보원은 ‘가족 돌봄 청년 기초 연구’ 보고서를 통해 국내 영 케어러 규모 첫 추산 결과를 밝힌 바 있다. 연구 결과, 지난해 기준 서울·경기권에 영 케어러(13~34세)가 약 12만 3470명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사회보장정보원 김지선 부연구위원은 “영 케어러를 파악하는 기관마다 연령, 조건 등 기준이 달라서 전체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면서도 “10~30대로 균일한 연령 범위와 조건을 설정하면 부산, 수도권 등 전국에 최소 20만 명 이상이 있을 것이라는 게 관련 연구·지원기관 전문가들의 공통 의견”이라고 밝혔다.

영 케어러를 향한 사회적 관심은 매우 낮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어려운 가정 형편에 놓인 효자 또는 효녀로만 인식되고, 칭찬 또는 연민의 대상으로만 여겨지기 일쑤다. 이들 영 케어러들은 사회적 돌봄 대상을 돌보면서 사회에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우리 사회의 시선에선 벗어나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숨겨진 집단’ ‘잊힌 최전선’으로 불린다.

한국 사회에서 영 케어러 역시 큰 이슈가 된 사건이 발생할 때만 주목받는다. 영 케어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촉발된 계기는 2021년 대구에서 일어난 ‘간병 살인’ 사건이었다. 뇌출혈로 쓰러진 50대 아버지의 독박 간병을 비관한 20대 청년이 아버지를 방치해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한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졌고, 정부는 전수조사를 통해 지원체계를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공식적인 영 케어러 실태조사는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한국의 영 케어러 대응 수준을 7단계(무반응 국가)로 분류한다. 이는 1~7단계 중 가장 낮은 단계다.

영 케어러를 연구해 온 국회입법조사처 보건복지여성팀 허민숙 입법조사관은 “한국에서는 영 케어러에 대한 법적·정책적 인지는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라며 “영 케어러의 규모를 파악하는 것 만큼이나 그들을 어떻게 발굴하고 접근할지, 정책적 연계를 통해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등도 매우 중차대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영 케어러(Young carer)

중증질환, 장애, 치매 등을 앓는 조부모·부모의 간병과 생계를 책임지는 아동·청소년을 뜻한다. 1980년대 영국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으로, 국내 학계에선 ‘가족 돌봄 아동·청소년’으로 정의한다.


손희문 기자 moonsl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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