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균 칼럼] 필요성 알고도 안 하는 '해사법원 설립'
국내 해사사건 전담할 전문 법원 부재
수많은 분쟁 등 해외 중재·재판에 의존
매년 소송비로 5000억 원 국부 유출
부산 장기간 해사법원 설치 요구 헛돼
당위성 있는 현안은 실천하는 게 도리
최적지 부산에 신속히 설립해야 마땅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도 한두 번쯤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말이다. 〈신약성서〉 중 지혜에 관한 얘기를 주로 다룬 ‘야고보서’ 4장 17절에 나오는 문구다. 중국 춘추시대 공자도 비슷한 표현으로 도덕적 용기의 중요성을 담은 가르침을 남겼다. ‘옳은 일을 보고도(알고도) 행하지 않는 건 용기가 없는 것이다(見義不爲 無勇也).’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쓴 미국 경영 석학인 스티븐 코비(1932~2012) 박사는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정말로 아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세 격언은 세간에서 실천해야 마땅한 일을 하지 않는 경우를 지적할 때 흔히 인용된다. 특히 코비 박사의 명언은 10년이 넘도록 부산은 물론 법조계와 해양업계의 애간장을 태우며 질질 끌고 있는 ‘해사(海事)법원 설립’ 문제에 딱 들어맞는 충고가 아닐 수 없다.
해사법원은 선박 충돌을 비롯, 국내외 바다를 매개로 발생한 각종 사건과 법적 다툼 등 다양한 해사사건을 전담해 처리하는 전문법원을 일컫는다. 지난 7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대법원은 국내 첫 해사법원 설치의 필요성에 공감한다고 밝혔다. 앞서 대법은 2020년 9월 사법행정자문회의에서 해사법원 설립에 동의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어 대법 소속 사법정책연구원은 2021년 발간한 〈해사법원 설치에 관한 연구〉를 통해 설치 정책을 위한 기반 자료를 제시하기도 했다. 2022년 1월에는 법원행정처가 합의부 2개, 단독부 4개 등으로 구성된 해사법원 설치 의견을 국회에 보냈다. 윤석열 대통령도 2022년 대선 당시 해사법원 설립을 약속한 바 있다.
해사 전문법원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데는 13년간 해사법원 유치에 공을 들인 부산의 역할이 컸다. 2011년 부산지방변호사회가 지역 학계, 언론, 시민단체와 연대해 설립 논의에 불을 지핀 이후 유치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한 게다. 이는 해사법원이 없는 탓에 국내 기업이 관련된 수많은 해사사건과 분쟁의 대부분이 영국, 싱가포르 등 해양 선진국 전문 중재소나 해사법원에 의존하고 있어서다. 이를 위해 해외로 빠져나가는 소송비에 따른 국부 유출이 매년 3000억~5000억 원에 달할 정도로 막대한 실정이다.
이처럼 사정이 심각한데도 그동안 해사법원이 설치되지 않은 건 조선 세계 1위, 해운 선복량 세계 5위인 해양강국이면서 해상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의 체면에 먹칠을 하는 셈이다. 절실한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설립은 하세월이니 그저 답답할 뿐이다. “해사법원이 시급함을 알고도 설치하지 않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고 비판받을 만하다.
설립이 지지부진한 이유로는 지역 간 유치 경쟁과 대법의 미온적인 태도가 꼽힌다. 20대와 21대 국회에서 부산 국회의원들이 지역 여론을 반영한 ‘해사법원 부산 유치 법안’을 발의하자 서울과 인천, 세종시에서도 법안을 발의해 치열한 유치전을 벌였다. 심지어 같은 당 의원끼리도 자기 지역구 유치를 우기며 싸웠다. 이 바람에 각 법안은 국회 상임위는커녕 소위에서조차 논의되지 않은 채 폐기됐다. 대법은 해사법원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내부의 일부 반대론과 지역 간 논란을 의식해 결론을 내지 않고 국회에 맡기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해운회사와 법조 인력이 많음을 내세운 서울의 주장은 국가 미래를 갉아먹는 수도권 일극체제의 심화가 우려된다. 내륙 한복판에 자리 잡은 세종 유치론은 바다라는 현장이 중요시되고 복잡다단한 해사사건의 특수성을 간과했다. 인천은 항만도시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숙원인 고등법원 신설에 치중하는 게 시민 편의를 위해 더 옳은 방향일 테다.
글로벌 해양도시 부산의 경우 해사법원을 설치해야 할 타당성이 차고 넘친다. 세계 2위의 환적항, 세계 7위 컨테이너 항만인 부산항을 중심으로 전국 해양수산 기관단체의 70%가 몰려있다. 싱가포르 노스스탠다드 P&I(선주상호보험)클럽이 담당한 최근 14년간 한국 항만별 분쟁 건수만 봐도 부산항이 압도적 1위인 데다 2, 4위인 광양·울산항과 마산·포항·여수항 등 남부권까지 포함하면 분쟁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게다가 울산·경남에 발달한 조선업과 기자재, 해양플랜트, 해양관광·레저 산업을 감안하면 해사법률 서비스 수요는 어마어마해 부산 유치는 불문가지다. 해사법원을 부산의 국제금융 및 해양금융 중심지 정책, 글로벌 허브도시 전략과 연계하면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와 지역균형발전 촉진도 기대할 수 있겠다. 22대 국회와 대법에 조속히 해사법원 신설 추진에 나서길 촉구한다. 또한 해사법원 최적지인 부산에서의 설립은 선택이 아닌 필수란 점을 명심해 대승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강병균 논설실장 kbg@busan.com
강병균 논설실장 kb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