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이성연애자
김대현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공동연구원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한국에 처음 대두될 때, 동성애자 인권운동가들은 동성연애와 동성애를 서로 구분해서 썼다. 동성연애가 주로 같은 성의 사람들과 서로 쉬쉬하며 섹스하는 뜻이라면, 동성애는 그러한 성적 지향을 바탕으로 섹스를 포함한 삶의 양식을 둘이서라도 함께 터놓고 만들어나간다는 뜻이 있다. 이는 세상으로부터 오랫동안 낙인찍힌 성적 지향을 추구할 때, 남에게서 온 낙인을 넘어 그들 스스로 관계와 규범을 새롭게 정의해 실천하겠다는 의지와 같고, 내 성(性)을 쉬쉬하지 않고 내 삶의 일부로 당당하게 통합된 형태로 대우하겠다는 다짐과 같다.
내 삶과 성을 서로 통합하는 문제는 비단 성소수자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동성애자가 자신의 성이 널리 금지되기에 자기 삶과 성의 통합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이성애자는 반대로 자신의 성이 널리 장려되기에 자기 삶과 성을 통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렇게 사회 속에서 성이 제도화된 수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후자의 경우 내 삶에서 내 성과 성욕을 무작정 숨쉬듯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 쉽다. 무언가 당연하다는 것은 곧 그 속의 무언가가 제대로 성찰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성애자에게도 삶과 성을 편히 분리해 실천하려는 유서깊은 관행들이 있다. 그러나 바람 피면 언젠가 걸린다는 속설처럼, 삶 안에서 서로 영영 섞이지 않을 부분이란 없다. 자기 삶에서 자기 성을 분리해 관리하겠다는 다짐은, 마치 동성애자가 자신의 성을 숨긴 채 몰래 추구하겠다는 다짐과 비슷하다. 그들의 바람과 달리 나의 일상 속 가장 후미진 성의 일이야말로 내 인격을 좌우한다. 그렇기에 그곳에서의 일에 대해 스스로 무언가 대책이 있어야 한다. 그 대책의 시작은 삶과 성을 따로 떼놓지 않고 묶을 때 비로소 발생하는 쟁점과 불화에 충실히 응답하는 것이다.
그 응답의 결과는 나에게만 중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도 중요하다. 섹스란 기본적으로 남이 전제된 사회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남은 내 성욕의 전유물이 아니고, 섹스는 반드시 남과의 협상을 거쳐 치르는 행동이다. 그렇기에 성적 권리의 실천은 곧 당연해보이던 내 성욕을 한번쯤 의심해보는 데서 시작한다. 성적 권리란 말은 있어도 성욕권이란 말은 없는 이유가 이러하다.
지인과 가족의 얼굴을 내 멋대로 포르노 영상에 덧입힌 사람들은, 아마도 상대를 평생 나와 동일한 인간으로 안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남을 영영 남으로 대할 의사가 없는 인간만이 남을 포르노화한다. 그건 남과의 협상을 기본으로 하는 통상적인 성관계·인간관계의 문법과 전혀 다르다. 사람이 살인할 완력과 지능이 충분함에도 살인하지 않듯이, 사람은 딥페이크 포르노를 만들 충분한 역량이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그래야 한다. 이성애자는 이성연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