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인사이트] ‘할 수 있다’로 퇴행한 특별법, 안 할 길 터주나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논설위원

부산 위기 심화 ‘리더십 부재’ 탓
사태 해결 절실함, 용기, 배짱 안 보여

글로벌 특별법 22대 여야 합의 재발의
‘한다’ 강제조항 ‘할 수 있다’로 후퇴

지방행정, 단기 성과로 큰 변화 이뤄야
현안 해결 위한 ‘배관공 리더십’ 절실

부산이 난리다. 2030월드엑스포 유치도 실패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약속했던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희망고문으로 전락했다. 에어부산 분리 매각 좌절, 가덕신공항 부지공사 유찰 등 부산의 현안이 마냥 표류하고 있다. 대통령실, 국회와 함께 한 몸을 이뤄 변화를 일으키려는 부산의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지역 국회의원 등은 ‘괜찮다’ ‘문제없다’라면서 공포탄만 요란하게 쏘고 있다. 정작 집에 물이 새고, 불이 나고, 강도가 들었지만, 부산 리더십에는 절실함도, 배짱도, 하다못해 ‘깡다구’조차 보이지 않는다. 부산 위기의 원인이 ‘리더십 부재’ 탓이라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대표적인 것이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안’이다. 부산의 열망, 대통령의 공언에도 불구하고, 21대 국회에서 폐기됐다. 22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여야 협치 1호 법안으로 다시 발의됐지만, 미심쩍은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부산을 물류·금융·첨단산업 분야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도시로 조성하기 위한 특구 지정 등을 담고 있는 이 법안은 21대보다 더 개악됐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실제로 이헌승, 전재수 여야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을 뜯어보면 대경실색할 노릇이다. 법안 대부분이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법률 용어로 ‘한다’는 것은 법규의 집행에 대하여 행정청의 재량이 전혀 허용되지 않는 ‘기속행위’를 말한다. 하지만, ‘할 수 있다’는 행정기관이 행정행위를 할 때 자유로운 재량이 인정되는 것을 뜻한다. 기속행위와 상반되는 개념이다. 21대 법안에서는 89번만 나오는 ‘할 수 있다’ 문구가 22대 법안에서는 107번이나 사용됐다. 강제조항인 ‘한다’가 재량행위인 ‘할 수 있다’로 대거 바뀐 것이다.

50페이지 안팎의 21대 법안에는 ‘정부는 부산시의 공항·항만 인프라 구축에 재정적 지원을 하여야 한다’ ‘특구 내 관세 및 환적 제도 개선 조치를 마련하여야 한다’ ‘금융특구 입주 금융기관 등에 규제적용 특례 등을 부여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첨단산업 국제협력 강화를 위해 국제행사 개최 시책을 마련해야 한다’ ‘첨단산업 추진에서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하여야 한다’ ‘투자진흥지구 입주 기업·기관에 자금을 충분히 지원하여야 한다’ ‘외국인의 편의시설 설치관리 시책을 수립하여야 한다’ ‘국제물류특구 외국 물품, 용역에 대해 영세율을 적용한다’ ‘관세 등을 면제하거나 환급한다’ 등의 ‘한다’는 문구가 22대에서는 전부 ‘할 수 있다’로 바뀌었다.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법’으로 입법이 후퇴한 것이다.

행정·법률전문가들은 법률상 ‘한다’라고 해도 예산 등의 이유로 못하는 현실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은 ‘안 하겠다’는 의미라고 해석한다. 입법 정신은 국민에게는 부담을 적게 주고, 정부는 강한 부담을 가져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부산의 정치·행정 리더십이 어떤 의도로 이렇게 법을 협의하고, 개악했는지, 당장이라도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듯이 포장했는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안 되면 말고’ 식으로 법을 통과시킬 자신도, 의욕도 없었기 때문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이 와중에 박형준 부산시장은 ‘할 수 있다’에 불과한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위해 경제부시장 직제를 폐지하고, 미래혁신부시장을 신설하는 조직 개편안을 통과시켰다. 일반 행정·민생·경제 분야는 행정부시장이, 시정 혁신과 글로벌 허브도시 기반 마련을 위한 중장기 계획 수립과 기반 조성 등은 미래부시장이 맡는다고 한다. 당연히 임기 내내 큰 그림만 그리는 것은 아닌지, 소는 누가 키울지 걱정부터 앞선다. 큰 그림도 없이 부산의 리더를 자처하지는 않았겠지만, 누추한 기색이 역력하다.

조직론의 최고 권위자 제임스 G 마치 스탠퍼드대 명예교수는 저서 〈문학에서 배우는 리더의 통찰력〉에서 “오늘날의 리더는 배관공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배관공이란 화장실처럼 일상적으로 필요한 곳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고, 막힌 곳을 시급히 뚫어주는 역할을 하는 리더다. 시인은 새로운 길을 탐험하며 영감을 불어넣는 리더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부산에 통찰력을 주는 시인 같은 리더십도 필요하지만, 배수관이 터져 밥조차 하기 힘든 상황에서 유유자적 큰 그림만 그리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지방행정은 국가 경영이 아니다. 단기적으로 작은 성공을 쌓아서 장기적으로 큰 변화를 이루는 것이 핵심이다. 아무리 큰 그림을 그려도 성과로 나타낼 수 없다면 학자의 공허한 이론에 불과하다. 진정한 리더라면 물난리가 난 집에 옷을 입은 채로 걸레와 양동이로 물을 퍼내고, 파이프를 고쳐야 한다. 자칫 다음 선거에서 이런 질문이 던져지지 않을까. “기림만 기맀지, 머~ 했노”라는….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