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흔적을 찾아서](17) 예술가 양지스님
부드러움 속의 강렬함…불심으로 승화한 예술혼

# 양지의 작품들
양지 스님은 생몰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선덕왕 때 자취를 나타냈다는 기록과 사천왕사의 사천왕등의 작품으로 볼 때 통일 전후기에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신분은 스님이었으나 대단한 예술 조각가였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삼국유사에 잘 나타나 있다.
'양지 스님은 신기하고 괴이하여 다른 사람이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많았고 잡다한 기예에도 두루 통달하여 그 신묘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 양지는 또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영묘사의 장륙존상과 천왕상 및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탑 아래의 팔부신장,법림사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 등은 모두 그가 빚어낸 것이다. 또한 영묘사와 법림사 두 절의 현판을 썼으며 또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하나의 작은 탑을 만들고 이와 함께 3천 개의 불상을 만들어 그 탑을 절 가운데 모시고 예를 올렸다.'
이 기록만 보아도 양지 스님은 대단한 예술가였다. 예술가가 진정으로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은 작품이 남아 있어야 한다.
남아있는 삼국의 유물로 볼 때 씩씩한 고구려는 살아 숨 쉬는 듯한 기운생동한 고분벽화에서 알 수 있듯이 회화가 발달했고,온화한 백제는 금동향로 부여정림사지 석탑,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보듯이 우아하고 섬세한 공예와 부드러운 조각예술의 나라였다. 그에 견주어 신라는 불상과 탑에서 우직 소박한 힘찬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는 글씨의 파편만 조금 남아 있는 명필 김생과,신기한 생동감이 넘쳐 흘러 참새가 나무인 줄 알고 앉으려 했다는 황룡사 벽화를 그린 솔거 이야기는 언급되어 있는데 뛰어난 작품이 남아 있는 위대한 예술가 양지 스님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다. 그러다 보니 서양의 미켈란젤로나 로댕,헨리 무어는 기억해도 양지 스님은 모른다.
# 양지 스님의 작품 따라
내가 양지 스님의 작품을 보고 놀라 자빠진 것은 사천왕사지 출토 사천왕 작품이었다. 현대의 어느 일류 조각가도 흉내 못내는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꿈틀대고 있었다. 양지 스님은 예술의 정토 세계를 알았을까. 단단한 강철이나 돌보다 부드러운 바람이나 소리 없이 내리는 비가 강하다는 것을….
양지 스님의 작품이 있는 경주 박물관에 갔다. 많은 사람들은 이 명작을 몰라보고 지나쳐 간다. 나는 찬찬히 앉았다 섰다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매가 꿩을 낚아채듯이.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내 마음에 긴장이 잔뜩 들어 분석하려니 머리가 텅 비고 시야가 꽉 막혀 버렸다. 그냥 보았다,힘 빼고. 한참 만에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원래 사천왕은 인도 재래의 방위신인데 불교에서는 천신으로 수미산 중턱에 사왕천의 주신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경호실장 역할이라 눈을 부릅뜨고 힘차게 악귀를 밟고 서 있는 것이 대부분인데 여기 사천왕상은 편안하게 앉아 있다.
배꼽 위는 완전히 잘리고 무릎에 닿은 오른손만 보이고 악귀도 한 마리만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것과 거의 같기에 경주의 것과 비교를 해 본다. 서울 것은 젖가슴 위만 잘리고 밑은 거의 온전하다. 힘으로 제압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감화를 주었는지 악귀 두 마리가 항복할 테니 그냥 저희 등에 앉으세요,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다 보니 사천왕은 왼손에 칼을 들고 오른쪽 손바닥은 쫙 펴서 여차하면 악귀를 치겠다는 모습 같다. 어쩜 저리 여유로울까. 악귀는 밟히고 있어도 행복한 복종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복종이라서 당신에게 밟히고 있어도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듯 하다.
그러나 경주의 사천왕상은 다이내믹한 힘이 용솟음치는 것 같다. 왼 무릎을 굽혀 발 앞꿈치를 힘차게 딛고 오른발은 힘차게 뻗치는 동시패션으로 빼어든 오른손의 화살을 왼손에 쥔 활에 꽂으려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이에 놀란 두 악귀는 아이코 살려만 주세요,를 수없이 외치며 놀란 표정을 역동적으로 풀어내었다. 설마 부드러운 니가 뭐 강하겠나 악귀들이 슬슬 기어오르자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듯이.
반대편에 이 사천왕상의 깨어진 부분을 추정하여 복원해 놓은 7천만원짜리 작품은 왠지 내 발길을 잡아 당기지 못한다.
다시 양지 스님의 작품을 보러 동국대경주캠퍼스박물관에 갔다. 젊은 남궁현 학예연구원이 상세한 설명을 곁들여 유물을 보여주었다. 나는 천삼백년이 지난 유물을 마주하고 풍요로운 행복감에 빠져 미세한 떨림 속에 설렘을 안고 유물을 이리저리 자세히 보고 또 보았다. 190여 점 중에 대표적인 몇 점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박물관에서 최고로 치는 연기명법승탑의 희미한 명문과,내 마음을 사로잡는 앙상한 뼈만 보이는 석가의 고행상에다가 슬쩍 그린 듯한 탑이 있는 전돌이었다
# 산 복숭아 익어가고
서양 예술이 기교 중심의 표현을 중시하기 때문에 미에 집중한다면 동양 예술은 궁극적 목적이 도(道)에 있기 때문에 예술을 도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즉,작가 안에 내재되어 있는 생명을 작품에 불어넣는 것이다. 아무나 그릴 듯한 어설프게 보이는 이런 작품이 대단하고 위대한 것이다. 전돌에 그려넣은 이 석가의 고행상이 서역에서 유행하던 것이라고 양지 스님을 서역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귀화했건 신라인이던 신라에 살면서 이런 작품을 남겼으면 신라인이다.
'석장'이란 명문이 나온 조선시대 자기 뒷면은 아무리 보아도 어렴풋했다. 탑을 밟고 있는 북방 다문천은 깨어진 채로 옛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박물관을 나오니 주룩주룩 내리는 비가 캠퍼스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양지 스님이 영묘사 장육삼존상과 천왕상을 조성했다는 영묘사지(지금은 흥륜사)에 들어서니 비도 곱게 변하여 고요한 적막을 품어내고 있었다. 빗물도 깨끗한 연잎에 올라 청정한 도(道)가 스며들어 이슬처럼 영롱하고 맑았다. 양지 스님의 흔적과 수많은 신라 사람들이 진흙을 날랐던 모습이 아른거리다가 빗속을 뚫고 들어온 차량의 소음에 지워져 버린다. 뒤뜰에는 무궁화도 피었고 산나리,도라지꽃이 배시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여기서 나온 수막새 '신라의 미소'도 양지 스님의 작품일 가능성이 많고,감은사지 석탑 안의 정교한 사천왕상도 스님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이 영묘사와 안동역 옆에 있는 법림사지의 예쁜 전탑도 양지 스님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다른 절들은 다 경주에 있는데 유독 법림사만 경주에 없기 때문에 멀리 안동의 전탑이 있는 법림사지를 연결시켜 본다. 지금 석장사지에는 산 복숭아 익어가고 있다. 영운 조사가 도화(桃花)를 보고 견성(見性)한 것과 같이 양지 스님도 이 도화를 보고 무심의 경지에 갔을까.
아 지금쯤 석장사지 계곡 옆에 산 복숭아 붉게 익어 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