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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산불 예방 포스터와 대형 산불
초등학교 시절 미술 시간. 당시 단골처럼 주어진 그리기 주제는 ‘산불 예방 포스터’였다. 크레파스나 물감으로 산을 초록빛으로 칠하고, 때론 라이터나 담배, 때론 성냥개비나 부탄가스를 그려 넣으며 강력한 산불 예방 메시지를 담으려 고심했다. 토끼, 다람쥐가 뛰어놀고 새들이 지저귀는 평화로운 풍경이 빨갛게 번지는 산불로 지옥으로 변하는 장면을 담은 한 친구의 포스터는 아직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달 초 가족의 주말 출장에 동행해 경북 안동으로 향했다. 안동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하회마을과 도산서원이 있는, 조선 시대 유교 문화의 중심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안동에 접어들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차 안에 있던 아이들은 코를 막고 인상을 찌푸렸다. 차창 밖 풍경은 더욱 처참했다. 1년 중 가장 아름답다는 5월의 신록을 준비하고 있던 산림은 불에 타 숯덩이로 변해 있었다. 산자락엔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집과 농막, 비닐하우스들이 눈에 띄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스산한 날씨까지 더해지며 마치 디스토피아를 연상케 했다.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서 만난 관계자는 “산불로 수련원에 이어지던 이용 예약이 취소됐고 문의도 끊겼다. 지역 경제도 모두 무너질 판”이라며 말했다. 수련원 주변 나무들이 모두 잘려 나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산불이 유구한 역사가 켜켜이 쌓인 안동 곳곳의 문화유산과 관련 시설을 위협해, 불이 옮겨붙을까 산 중턱부터 나무들을 죄다 베어버렸다고 했다.
2023년 초에도 취재 차 찾은 경북 울진에서 대형 산불이 남긴 상흔을 경험한 적이 있다. 2022년 3월 발생한 대형 산불로 검게 탄 나무들은 산불이 꺼진 지 1년이 가까이 됐지만, 생채기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산불을 직접 겪은 이들의 경험과 아픔에는 비할 바가 안 되지만, 화마로 까맣게 타버린 자연과 송두리째 사라진 주민들의 일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대형 산불 이후, 우거진 산림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야생 동물들이 다시 터전에서 뛰어놀 수 있는 날이 오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 지 예상하기 힘들다. 2000년 발생한 동해안 산불 피해 지역은 20여 년이 지났지만 인공 조림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말 발생한 대형 산불의 피해는 최근 산림청 조사 결과, 기존 발표치의 배 이상인 10만 4000ha(축구장 145만 개 면적)로 집계됐다. 역대급 인명 피해뿐만 아니라 피해 면적에서 종전 역대 최대였던 2000년 동해안 산불과, 다음으로 피해가 컸던 2022년 울진·삼척 산불의 5배를 넘어섰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봄 날씨는 이동성 저기압의 영향으로 흐린 날과 비가 잦았다. 겨울 날씨는 춥고 습했다. 그랬던 봄은 건조하고 강풍이 부는 날이 빈번해졌고, 겨울은 따뜻하고 건조해졌다. 인간이 주도한 기후 변화로 수십일씩 이어지는 대형 산불이 어느새 우리의 일상이 됐고, 어느 특정 지역에 한정된 재난이 아닌 국가적 재난이 됐다. 부산의 경우에도 지난달 경남과 경북 지역 산불이 강한 바람을 타고 부산 금정산과 기장군 경계까지 접근하면서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역대 최악의 산불을 경험한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산불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번 산불을 두고, 우리나라 토종·대표 수종인 소나무가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며 소나무를 책망하는 분위기도 있지만, 우리나라 생육 환경에 맞게 자연 발생적으로 자라고 있는 소나무까지 소환해 유무죄를 따질 필요가 있을까 싶다. 결국 산불을 내는 것도 사람이고, 기후 위기를 가속화시킨 것도 사람이다.
산불로 소실된 산림의 가치는 단순히 나무의 경제적 가치로만 평가할 수 없다. 산림은 건강한 생태계 유지, 집중 호우 시 토사 유출 방지, 대기 정화 등의 다양한 공익적 기능을 수행한다. 산불 피해 지역은 당장 올여름 집중 호우가 걱정이다. 산불은 앞으로 더욱더 우리 삶을 위협하겠지만, 우리 주변의 경각심은 너무 낮은 듯하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학교마다 열렸던 산불 예방 포스터 그리기 대회가 이제는 산림청이나 산지가 많은 소방서, 학교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1980년대~90년대에 흔했던 산불 예방 포스터 그리기 대회는 산불에 대한 국민들의 경각심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역대 산불 피해 순위(1~10위)에서 2000년 이전 산불이 한 건도 없었던 것만으로도 그 효과는 충분히 입증된다. 대형 산불이 일상화된 지금, 과거 산불 예방 포스터 그리기와 같이 산불 안전 의식을 높일 수 있는 범국민적인 캠페인이 다시 필요한 시점이다.
이대성 사회부 차장 nmaker@busan.com
2025-04-2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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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후보님, 헌법수호 의지 있습니까”
지난 4일 오전 11시 22분 헌법재판소(이하 헌재) 대법정. 문형배 헌재 소장 권한대행은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고 선고했다. 파면의 효력은 즉시 발생했다.
윤 전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을 선포한 날로부터 122일, 그해 12월 14일 국회 탄핵소추안이 헌재에 접수된 날부터 111일만에 탄핵심판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단체들은 탄핵심판이 진행되는 동안 나라가 두 조각 날 것처럼 대립각을 세웠다.
하지만 헌재 선고를 기점으로 큰 충돌 없이 그동안 깊어졌던 상처가 아물어가는 듯하다. 당초 우려했던 탄핵반대 측의 극단적 행동 등은 발생하지 않아 국가적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전에 양면이 있듯, 모든 사회 현상에는 해석에 따라 긍정과 부정이 있기 마련이다. 탄핵심판 과정에 극심한 국민 분열과 과열로 인해 국력이 막대하게 낭비됐다는 점은 너무나 아쉽다. 특히 계엄령으로 인한 국가 신인도 하락이나 국제 경쟁력 약화 등은 뼈아픈 부분이다.
이러한 부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통령 탄핵 사태로 조명된 헌재의 역할과 선고 결과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이해는 긍정적 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헌재는 탄핵 찬반 양쪽의 주장과 논리를 모두 수렴하고, 오직 헌법 정신에 따라 선고문을 작성했다. 탄핵이 진행되는 모든 과정에 국가의 틀을 규정하고, 국민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에 대한 국민적 이해와 관심이 엄청나게 높아졌다는 점이다.
최근 시민단체의 기자회견문에는 헌법 관련 조항을 명시하고, 자신들의 논리와 주장을 펼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자신들의 주장이 정당하고 법적 테두리 안에 있다는 논리를 관철하려는 방편으로 헌법 조항을 제시하고 있다. (사)전국장애인이동권연대 경남지부는 장애인의 날을 앞둔 지난 9일 경남도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헌법과 법률에 보장하고 있는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이 과정에 헌법 11조와 헌법 35조 5항을 제시했다.
이들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 11조를 제시하면서, 장애를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국가는 장애인의 복지와 권익을 증진할 의무를 가진다’는 34조 5항을 근거로 들었다. 이들은 헌법에 명시한 평등권 실현과 이동권 보장의 근거를 제시했다. 이번 회견으로 이들의 주장이 모두 관철된 것은 아니지만 헌법에 근거한 주장과 논리를 명확하게 밝힌 셈이다.
흔히 헌법은 법위의 법이라고 한다. 보통 사람에게 ‘법은 어렵다’는 선입관이 있다. 헌법은 그 위에 있다는 생각때문에 엄청 어려울 것으로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번 윤 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을 계기로 국민이라면 누구나 헌법 구성요건과 내용을 한 번쯤 이해하고 살펴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점이다. 헌법을 이해하면 윤 전 대통령이 탄핵인용 이유가 무엇인지 간단하고, 명료하다.
당선된 대통령이 가장 먼저하는 일은 취임 선서다. 윤 전 대통령도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면서 국민 앞에 다짐했다. 선서문의 첫 번째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게 헌재의 판단 요지다.
헌재는 “피청구인(윤 전 대통령)은 군경을 동원해 국회 등 헌법기관을 훼손하고 국민의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해 헌법수호 의무를 저버렸다”며 재판관 8명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선고 이유를 밝혔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헌법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면됐다. 파면된 역대 대통령의 공통된 결격 사유가 헌법수호의지 부족이다.
우리는 헌법이 ‘먼 이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나의 기본권을 보장해주는 보험이나 다름없다. 헌법은 대한민국의 통치구조와 국민의 권리·의무를 규정한 최상위 법이다. 국민이라면 이번 탄핵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통치구조와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헌법을 챙겨봐야할 필요성이 생겼다. 법학도나 법률가가 아니더라도, 우리 일상생활 자체가 헌법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윤 전 대통령 파면으로 오는 6월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선거운동이 시작됐다. 후보 검증과정에 헌법 이해도와 수호 의무, 수호 의지 등에 대한 질문이 잇따를 전망이다. 후보가 아니더라도, 국민이라면 한 번쯤 헌법 조문을 읽어보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길수 중서부경남본부장 kks66@busan.com
2025-04-2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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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민주주의 수호는 기본, 그 이상을 바란다
국가 공동체의 발전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 나라마다 구체적인 모양새는 다르겠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선진국들은 대체로 일정한 패턴으로 발전했다.
첫 단계는 공동체의 안정이다. 정국이 안정되어야, 법과 제도의 틀이 잡히고 경제도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제도적 민주화가 이뤄지고 경제 발전이 누적되다 보면, 중산층이 늘어난다. 중산층이 늘면, 민주주의가 고도화된다. 민주주의가 성숙하면 빈부격차 해소, 환경 보전, 지역 분권 등 지속가능한 성장을 고민하는 단계에 이른다.
유럽 선진국들은 각 단계를 차근차근 밟았고, 우리는 빠르게 통과했다. 아프리카 일부 국가는 내전을 겪으며 첫 단계 단추도 끼우지 못하고 있다. 중남미 일부 국가는 제도적 민주화만 이뤘을 뿐, 중산층이 늘지 못하고 발전이 멈췄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짧은 계엄은 어마어마하게 긴 여진을 불러왔다. 그리고 지난 4일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고, 이제 우리는 새 대통령을 찾고 있다. 당연히 계엄 여파로 치러지는 이번 대선에선 계엄에 대한 평가가 표심을 결정짓는 가장 큰 변수일 것이다. 너무 명확한 선거 어젠다가 있다 보니, 다른 이슈들은 사라지고 선거판이 조용해진 느낌마저 든다.
좌우를 떠나서 많은 이들이 이번 대선을 특별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정체성을 확립하는 자리라는 거다. 어떤 이는 내란 세력을 심판해야 한다고, 다른 이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어느 선거보다 많은 유권자들이 각자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결연한 의지로 투표장을 향할 듯하다.
지금 시국은 국가의 발전이 단계별로 이뤄진다는 걸 보여준다.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 의식이 퍼지니, 지속가능한 성장을 논하는 말들이 사라졌다. 이 시국에 기후 위기, 부의 양극화, 수도권 집중 등을 이야기하는 건 사치로 느껴진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인 지속가능한 성장이 쉽지 않은 이유다.
새삼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실감한다. 극단적 이념화가 심화되고, 민주주의 작동 원리인 대화와 타협이 실종되면, 대한민국은 더 흔들릴 것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은커녕 경제 자체가 늪에 빠질 것이다. 좌우를 떠나 모두가 지난 겨울의 혼란이 재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럼에도 국가 발전 단계에서 대한민국의 위치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붕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계엄은 지속되지 못했고, 다수의 시민은 평화적으로 탄핵 찬반을 주장하며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렸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결정 당시엔 격렬한 시위 속에서 4명이 숨졌다. 이번엔 모두가 탄핵 결정을 수용했다. 우리는 오히려 위기가 발생해도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 회복력을 과시했다.
몇 발짝의 뒷걸음질이 있었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다. 이는 우리가 지속가능한 성장을 고민하고 길을 찾아야 하는 단계에 있다는 걸 의미한다. 계엄과 탄핵에 대한 평가가 후보를 정하는 가장 큰 이슈겠지만,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대통령 임기 5년 내내 민주주의 수호만 하고 있을 정권이 어디 있겠는가.
대선 기간 중 내놓은 공약은 차기 정권의 정책이 되고, 후보자의 말은 정권의 정체성이 된다. 이 때문에 지금 지속가능한 성장에 대한 말들이 오가지 않는다면, 다음 정권에서 관련 정책들은 후순위로 밀리며 소홀하게 취급될 수 있다. 치밀한 정책을 내놓을 시간적 여유가 없다면, 후보들은 정책 방향이나 비전이라도 제시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번 대선에서 유독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 게 지역균형발전이다. 보통의 선거에선 지역표를 얻기 위해서라도, 정당과 후보들은 지역 민심을 듣고 맞춤형 공약을 내놓는다. 이번엔 모든 정당이 지역 민심에 덜 예민한 것 같다. 내실 있는 지역 공약을 준비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곳도 없다.
단기간에 명확한 정책을 내놓기 어려울 수 있다. 대신 수도권 집중화 해결, 지역 분권, 지역 경제 활성화 등에 대한 명확한 의지와 비전이라도 보여주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지역 불균형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어 지역균형발전만큼 확실한 목표도 없다.
사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려면 민주주의 수호는 기본이다. 그 이상을 보여주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견고히 하면서도, 지역 불균형의 과제를 풀며 지속가능한 미래를 그리는 대통령을 만나보고 싶다. 많은 시민이 비슷한 바람을 품는다면, 후보들의 입에서 진정성 있는 말들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2025-04-1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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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황산공원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지난해 우리나라(남한) 인구보다 많은 7700만 명이 방문한 공원이 있다.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는 한강을 따라 11곳에 조성된 한강공원이다.
한강공원은 지리적 특성을 살린 다양한 시설로 눈길은 끈다. 공원마다 산책로·자전거 도로와 체육·편의시설은 기본이다. 위치와 주변 여건에 따라 자연학습장, 캠핑장, 물놀이장, 눈썰매장, 분수, 유람선 선착장 등으로 꾸며놨다.
전시장, 수상 무대 등 문화시설도 설치했다. 한강페스티벌 등 연간 120개에 달하는 다양한 축제와 행사도 열린다. 이 때문에 수도권 시민은 물로 전 세계 방문객을 유혹하고, 한강공원을 찾게 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방문객의 ‘지갑’을 여는 시설이 많다는 점이다. 유람선과 요트, 페달보트, 레스토랑·연회장 시설을 갖춘 플로팅 하우스, 숙박시설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연간 7700만 명이 방문할 만큼 사랑을 받는 한강공원도 한 때 시민들이 외면했다. 1960년대 산업화로 인한 수질오염 때문이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면서 시작된 ‘한강 종합개발’로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유람선 선착장 등 수상레저 시설이 설치되고, 잔디 공원이 조성되면서 가족 단위나 직장인들이 많이 찾았다.
그러나 접근로가 개선되지 않아 지금처럼 주목은 받지 못했다.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이 취임하면서 시행한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로 접근로가 개선되고, 공원마다 특성을 살린 휴양·여가시설, 체육·문화시설, 야간 조명시설까지 갖추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했다.
한강공원 조성 과정에 어려움도 많았다. 과도한 규제와 훼손을 우려한 환경 단체의 반발이다. 행정기관과 지역 정치권이 협업을 통해 극복하면서 세계적인 수변공원이자, 관광 명소가 탄생할 수 있었다.
부울경에도 낙동강을 따라 조성된 공원도 각광을 받고 있다. 이들 공원은 10여 년 전 정부의 4대강 사업으로 생겨났다. 공원마다 산책로나 운동시설, 자전거 도로, 파크골프장, 캠핑장 등이 설치됐다.
그런데 이들 시설은 계획한 일부 시설에 불과해 아쉬움이 많다. 정부 규제 등으로 초기 한강공원 조성 과정에 겪었던 문제를 낙동강 역시 답습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2022년 10월 나동연 양산시장의 제안으로 낙동강 하구에 있는 6개 자치단체가 낙동강협의회로 뭉쳤다. 협의회는 부산 북구와 사상구, 강서구, 사하구, 경남 양산시, 김해시다.
출범 3년째에 접어든 협의회는 나름 성과를 내고 있다. 공동 사업을 발굴·시행 중이다. 낙동강에 대한 규제 완화도 이끌어냈다. 10년마다 재수립하는 하천기본계획에 협의회가 추진 중인 사업이 가능한 구역을 확대했다.
이달 중에는 낙동강에서 할 수 있는 사업 발굴을 위한 관련 용역도 발주한다. 용역에는 낙동강 수변 유사 환경의 개발 사례 비교를 통한 규제 완화 제시와 상위계획 반영 등 중앙부처와의 대응 방안도 들어 있다.
양산시는 한 발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최근 개발제한구역이자, 하천구역으로 묶인 황산공원을 근린공원으로 지정했다. 사업 추진 시 개발제한구역 관리계획을 수립하지 않아도 되는 등 종전보다 행정절차가 단축되고 쉬워지면서 시가 추진 중인 사업 시행이 한결 수월해졌다.
시는 한강공원과 마찬가지로 황산공원 이용에 걸림돌인 접근로 개선에 나섰다. 방문객이 물금신도시에서 경부선 철로를 넘어 황산공원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관련 용역이 발주됐다.
시의 이런 조치들은 침체한 지역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추진 중인 황산공원 내 시설 업그레이드에 속도를 내기 위해서다. 시는 황산공원에 전기유람선 도입, 수상 레포츠센터 등이 포함된 플로팅 하우스 설치, 교통수단이자 관광용인 곤돌라 설치, 낙동강 선셋 바이크파크 조성을 추진 중이다. 오토캠핑장과 파크골프장 증설과 드론 공원, 국가정원 조성 등도 계획 중이다. 지난해 황산공원 방문객은 300만 명이다.
시가 추진 중인 사업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규제 완화가 더 필요한 만큼 협의회, 지역 정치권과의 협업은 물론 조화로운 개발이 필수적이다. 수질오염을 막을 방안 마련도 필요하다.
세계 많은 나라와 도시는 강을 중심으로 문명을 발전시켰다. 강을 따라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관광자원으로 개발해 사람과 자연이 함께 숨 쉬는 관광도시로 만들었다. 사업이 완료되면 황산공원은 한강공원과 버금가는 명품 공원으로 변모할 것이고, 양산도 관광도시로 부상할 것으로 기대한다. 나아가 양산은 시의 바람대로 지역 경제를 다시 한번 도약시켜 부울경을 넘어 우리나라 중심도시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2025-04-14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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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통합 완료 대한항공, 운임 인상하나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결합이 마무리되자 항공운임 인상 가능성이 제기된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정조치’ 영향이 조만간 ‘해소’될 것으로 전망돼서다. 운임 제한 대상이 아니었던 다수 노선은 하반기부터 운임 상승 가능성이 점쳐진다. 정부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을 추진하며 강조했던 ‘지방공항 활성화’와 마찬가지로 ‘소비자 편익 확대’도 현실에서는 지켜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정위는 양사의 기업 결합과 관련, 독과점 논란이 제기된 주요 노선이 ‘경쟁 제한성’을 갖게 됐다며 운임 인상 제한, 공급 좌석 축소 금지 등의 시정조치를 부과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이들 노선은 2019년 대비 물가 상승률 이상 운임 인상이 금지되는 등의 규제가 적용됐다. 그러나 해당 노선의 운수권 재배분 등으로 경쟁 제한성이 빠르게 해소되면서 공정위의 운임 통제 조치는 빠른 속도로 효력을 잃고 있다.
아이엠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에 대해 공정위가 요구한 시정조치 영향이 상반기 중으로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이엠증권은 “해당 조치는 2025년 하반기로 갈수록 해소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는 “유럽의 경우 경쟁 제한성이 하반기에는 해소”되고 “미주 노선의 경우도 2025년 하반기 중 5개 노선 중 2~3개 노선의 경쟁 제한성은 해소될 것”으로 내다봤다.
하나증권도 최근 보고서에서 공정위 시정조치에 대해 “경쟁제한 노선에 한정된 조치이기 때문에, 현재는 미주 일부 노선을 제외하면 운임 영향은 크지 않고, 하반기에는 운임 제한은 거의 없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나증권은 특히 아시아나항공에 대해 “하반기부터 여객운임의 상향이 본격화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화투자증권도 “항공 산업은 규모의 경제의 꽃으로 몸집이 커지면 커질수록 소비자와의 가격협상력이 올라간다”면서 “양사 합병에 의한 시장점유율 상승은 결국 가격(운임)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델타항공이 노스웨스트항공을 인수한 이후 운임이 약 20% 상승했다.
증권가의 분석을 종합하면 공정위가 지난해 12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결합을 마무리하며 강조했던 시정조치의 효과는 제한적인 수준이다. 반면 운임 인상은 장·단기적으로 필연적이라는 분석이 나와 소비자 부담 상승 우려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특히 수익성이 높은 화물 사업부문을 매각한 아시아나항공의 경우 수익성 개선을 위해 운임 상승 필요성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와 산업은행은 양사 통합과 관련, 그동안 수차례 국민 편익을 강조한 바 있다. 산업은행은 “단일 국적항공사가 지니게 될 국가 경제 및 국민 편익·안전 측면에서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한다며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주주로서 건전경영 감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공정위도 양사 통합에 대해 “소비자 피해가 없도록 마일리지·항공운임 등 시정조치 이행 여부 철저히 점검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양사 통합이 운임 인상 등 소비자 편익 축소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상은 처음부터 나왔다. 참여연대는 2022년 1월 공정위의 기업결합 승인에 대해 “국내 1, 2위의 대형 항공사 결합이므로 독점 폐해는 누구나 예상하는 것”이라며 “슬롯 반납이나 이전 등 조건은 일시적이고 실효성이 없는 대책”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통합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지방 경제 활성화’ ‘지역 공항의 제2허브 구축’ 등도 약속한 바 있지만 이 역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양사 통합이 결국 한진그룹의 가족 간 경영권 분쟁에서 조원태 회장의 손을 들어주기 위한 조치에 불과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로 정부는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지원한다면서 대한항공이 아닌 한진칼에 지분투자를 단행, 조 회장의 ‘백기사’ 역할을 했다. 참여연대는 이에 대해 “산업은행이 자신의 책무를 방기하면서 한진그룹의 경영권 분쟁에 끼어들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국가의 정책 자금으로 총수의 경영권도 지키고 시장 지배력도 높이게 된 대한항공은 ‘돈잔치’를 벌이고 있다. 대한항공과 한진칼이 기업결합 완료 등을 이유로 이사의 보수 한도를 대폭 인상하면서 조 회장은 올해 보수가 크게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직원들도 ‘통합 축하금’을 지급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아이엠증권은 이와 관련 “1분기 통합 축하금 명목으로 인건비에서 일회성 항목으로 300억 원 수준 반영될 것”이라고 밝혔다.
2025-04-0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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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KO 머신' 조지 포먼의 명복을 빌며
1974년 10월 30일 아프리카 자이레(현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에서 프로복싱 역사상 최고의 경기가 펼쳐졌다. ‘세기의 대결’로 불렸던 조지 포먼과 무하마드 알리의 세계 헤비급 타이틀매치였다. 당시 챔피언은 조지 포먼, 도전자는 무하마드 알리였다.
훗날 복싱계의 거물로 성장한 돈 킹이 두 선수의 라이벌전이 벌어진 장소가 아프리카여서 이 경기를 ‘정글의 혈투’라 불렀고 아직까지도 전 세계 복싱 팬들에게는 명승부로 꼽히고 있다.
이 두 선수와 함께 당시 헤비급을 평정했던 또 하나의 복서는 조 프레이저였다. 화끈한 복싱 스타일로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프레이저는 전광석화와 같은 레프트훅이 전매특허였다. 1971년 미국 뉴욕의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알리와의 헤비급 타이틀매치 때 15라운드에서 다운을 빼앗아낸 것도 레프트훅이었다. 프레이저는 결국 심판 전원 일치 판정승을 거두며 알리에게 첫 패배를 안겼다.
챔피언에 오른 프레이저의 벨트를 빼앗은 선수가 바로 포먼이었다. 포먼은 1973년 프레이저와 헤비급 타이틀매치에서 1~2라운드 동안 6차례 다운을 빼앗은 끝에 2라운드 KO승으로 정상에 등극했다. 반면 프레이저는 1976년 포먼에게 두 번째로 진 후 은퇴했다.
1974년 10월 30일의 경기는 챔피언 자리를 탈환하려는 알리와 방어하려는 포먼이 맞붙은 상황이었다. 알리는 빠른 몸 동작과 스피드로 상대의 주먹을 잘 피하는 전형적인 아웃복서였다. 반면, 주먹의 힘과 강도가 알리보다 우세한 포먼은 결정적인 주먹 한 방으로 경기를 끝내는 전형적인 인파이터였다.
당시 32세의 알리는 복서로서 황혼기에 접어들었고, 25세의 포먼은 40연승을 달리며 무적으로 여겨졌다. 당연히 포먼의 우세가 점쳐졌다.
두 복서는 맞대결의 대가로 각각 500만 달러씩의 파이트머니를 받았다. 돈은 자이레의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에게서 나왔다. 그는 세계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 대결을 유치했다.
이 경기는 미국 시청자들의 편의를 위해 현지 시간으로 새벽 4시 30분에 열렸는데, 현지 관중 6만여 명이 역사적인 경기를 보기 위해 달빛 아래 모였다. 이 경기는 전 세계 100여 개국에 중계되기도 했다.
이날 경기에서 2라운드부터 포먼의 공세가 시작됐다. 알리는 빠른 스피드로 파워풀하지만 느린 포먼의 펀치를 피하는 전법을 활용했다. 또한 링 로프의 반동을 이용한 수비와 지능적인 클린치로 포먼의 펀치를 피했다. 그래서 포먼은 알리에게 특유의 살인 펀치를 제대로 맞출 수 없었다.
결국 둘의 경기는 길어졌고, 포먼은 이 경기 전까지 5라운드 이상으로 가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점점 피로해졌다. 이후 포먼은 8라운드 후반 알리에게 결정적인 펀치 한 방을 맞고 다운된 후 일어나지 못했다. 끝내 승부는 알리의 8회 KO승이었다. 이 경기는 포먼의 생애 첫 패배였다. 포먼은 알리와 줄곧 재대결을 원했지만, 알리가 2016년 사망할 때까지 이뤄지지 못했다.
이처럼 세계 헤비급 정상을 군림하며 화려한 이력을 뽐냈던 ‘KO 머신’ 포먼이 지난달 향년 7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69년 프로 데뷔 후 1997년 은퇴할 때까지 포먼은 76승(68KO) 5패를 기록했다.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힘들게 자랐던 포먼은 어린 시절 폭행과 절도 등 각종 범죄를 저지르고 살았지만, 직업학교에서 복싱을 접한 뒤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1cm의 큰 키 등 탁월한 신체 조건 덕분에 헤비급 강자로 올라섰던 포먼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남자 복싱 헤비급 결승에서 당시 소련의 요나스 체풀리스를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69년 프로 데뷔를 한 포먼은 헤비급 타이틀을 알리에게 내준 뒤 슬럼프를 겪었고 마침내 1977년 지미 영에게 판정패를 당한 후 은퇴했다.
이후 그는 10년간 목회자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1987년 38세의 나이로 복귀를 선언한 포먼은 1994년 45세의 나이로 자신보다 19세 어린 마이클 무어러를 꺾으며 최고령 헤비급 챔피언 기록을 수립했다. 종전 기록을 가지고 있던 저지 조 월컷이 세운 37세보다 8세 많은 나이였고, 챔피언과 도전자 중 나이 차이가 가장 큰 기록이었다. 포먼은 “프레이저와 첫 헤비급 타이틀전보다 더 특별한 경기였다”고 말한 바 있다.
포먼의 별세 소식에 1970년대 복싱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명승부를 펼쳤던 알리와 프레이저의 경기 모습도 문뜩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알리는 2016년 향년 74세로, 프레이저는 2011년 6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 복싱을 무척 사랑했던 기자의 추억 속에 ‘불멸의 영웅’으로 자리 잡고 있는 세 복서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빌어본다.
2025-04-0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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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한국은행 디지털화폐 실험이 반가운 이유
2022년 7월. 스웨덴에 살러 간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 집에서 가까운 스톡홀름 함마르비(Hammarby)를 지나다 세컨핸즈숍에 들어섰고, ‘아바(ABBA)’의 나라에 왔으니 이쯤은 하나 사줘야지 하며 먼지 묻은 아바 LP판을 골라 계산대에 섰다. 환전해온 빳빳한 500크로나 지폐를 내밀었는데, 가게 주인의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잔돈을 찾으려는 듯 금고를 열었지만 금고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뭐야, 장사가 잘 안 되는 집인가? 아무리 그래도 가게 문을 열어 놨으면 잔돈은 갖고 있어야지.’
‘현금 없는 사회’ 선두주자로 여겨지는 스웨덴에서는 은행 강도도 기자와 비슷한 경험을 했나 보다. 2013년 스톡홀름에서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강도가 은행에 돈을 뺏으러 들어갔다 빈손으로 나왔는데, 그게 뉴스가 됐다. 은행엔 훔칠 현금 자체가 없었다.
기자는 스웨덴에서 ‘현금 없는 사회’를 경험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날아간 듯했다. 스웨덴은 1661년 세계 최초로 지폐를 발행했을 정도로 화폐 제도가 일찍부터 발달한 나라지만 지금은 상거래의 90%가량을 비현금 결제수단에 의존하는, 사실상 현금 없는 사회다.
앞서 언급한 세컨핸즈숍도 ‘망한 가게’가 아니라 ‘아주 보통의 가게’였다는 걸 깨닫는 데는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스웨덴에는 현금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카드 결제와 ‘스위시’(Swish)가 대신하고 있었다. 스위시는 사용자 전화번호만 알면 돈을 보낼 수 있는 계좌 연동 모바일 송금 시스템으로, 2012년 스웨덴 은행들이 공동 출시한 서비스다.
은행 계좌를 만들 때 뱅크아이디(BANKID)를 발급 받으며 계좌와 연계한 스위시도 함께 개설해야 했는데, 스위시 이용자가 아니면 사실상 경제 생활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이들 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을 신청하려 해도 스위시로 돈을 보내야 했고, 유치원 선생님 선물 구입 비용도 엄마들이 스위시로 모아달라고 했다. 길거리 버스킹 공연을 관람한 뒤에도, 교회에서 헌금을 낼 때도 스위시를 한다.
토요일 오전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직접 만든 잼과 꿀 등을 파는 장터를 발견했는데, 지갑 없어도 스위시로 구입이 가능했다. 벼룩시장 판매자로 참가할 때는 카드 단말기는 구비할 수 없었지만, 스위시 QR코드를 발급 받아 출력하는 것만으로 손님 맞을 준비가 끝났다. 전통시장이든 개인이든 높은 수수료를 지불해야 하는 카드용 단말기가 없어도, 현금이 없어도 상거래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정착 초기에 쓰려고 우리돈 수십만 원가량을 현지 통화 크로나로 환전해 갔는데 1년이 지나도록 다 못 쓰고 돌아왔을 정도니 말해 뭐할까.
지난 1일부터 한국은행이 ‘한강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국민 10만 명을 대상으로 진행 중인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실험이 반가웠던 이유도 스웨덴에서의 경험에서 기인한다. CBDC는 ‘Central Bank Digital Currency’의 약자로 각국의 중앙은행에서 발행하는 디지털 형태의 법정 전자화폐를 말한다. 스웨덴도 현금 없는 사회에는 다가갔지만, 공공재 성격을 띄는 현금 기능이 약화되며 각종 문제를 초래하자 중앙은행 차원의 CBDC, 이크로나(e-krona)를 도입하려 한다.
미국 달러 고정 디지털자산인 스테이블코인을 밀고 있는 미국을 제외하면, CBDC 생태계 구축은 세계적인 추세다. IMF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전 세계 134개국이 CBDC 생태계 관련 구상을 추진하고 있고 이 중 66개국은 개발, 파일럿 또는 출시 단계에 있다.
사실상 CBDC는 중앙은행이 현금을 디지털화함으로써 현금의 공공재적 성격을 유지하고, 발권력을 확대해 통화정책을 펼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QR코드 결제’로만 본다면 서운한 측면이 있다. CBDC는 현금 사용이 줄어들고 현금 관련 인프라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금융소외계층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결제수단이 될 수 있다. 법정화폐로서 가격 안정성이 높고, 민간 페이나 신용카드보다 수수료는 훨씬 적다.
핀테크·빅테크 기업 시장 지배력이 늘고 데이터 집중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블록체인 기반으로 탈세와 자금세탁 방지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CBDC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의 실험은 해외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테스트 계획이 공개된 2023년 11월, 국제결제은행(BIS) 세실리아 스킹슬리 혁신허브국장은 “BIS는 한국처럼 발전되고 디지털화된 경제에서 CBDC 프로젝트를 직접 수행한 경험을 배울 수 있기를 고대한다”고 말했다. 한국인의 ‘얼리버드’ 정신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국민 10만 명의 사용 후기를 전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2025-04-02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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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당근'에 담긴 사회
“당근에 몽클레르가 그렇게 많이 올라온다는데, 나 하나 사서 좀 보내줄래?”
서울 강남 지역 ‘당근’(중고 물품 온라인 거래 플랫폼)에 몽클레르 패딩이 쏟아져 나온다는 보도에 서울에 사는 언니에게 웃으며 전화를 걸었다. 수백만 원대 새 제품을 몇십만 원에 처분하는 이도 있다고 했다. 대치동 ‘제이미 맘’과 400km나 떨어져 사는 ‘피케이 맘’은 입어도 되지 않을까 ‘농담 반 진담 반’ 마음이었다.
개그맨 이수지가 유튜브 채널에서 선보인 ‘대치동 엄마’ 패러디 영상은 ‘싱크로율’뿐만 아니라 ‘당근 후폭풍’으로 더 큰 화제를 모았다. 1탄 영상에서 입은 몽클레르 패딩은 중고 매물이 폭증했다. 일부 강남 엄마들은 “앞으로 몽클레어 입을 수 있을까요” 등의 글을 올리며 언짢은 기색을 보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몽클레르 득템 기회’라며 반색하기도 했다. 이수지가 밍크 조끼를 입고 고야드 가방을 든 ‘대치동 엄마’ 2탄 영상을 올리자 많은 이들이 ‘고야드 당근행’을 예측하기도 했다.
당근을 들여다보면 사회 이슈와 소비 트렌드가 고스란히 보인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호황을 누렸던 골프의 인기가 뚝 떨어진 것도 당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골프를 그만두려는 이들이 너도나도 골프채와 골프 의류를 중고 매물로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홈플러스가 기업회생에 들어가면서 홈플러스 상품권이 당근에서 ‘핫’해지기도 했다.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팔려는 이들도 많았지만, 알뜰 장보기족과 전자제품 되팔이족들은 ‘삽니다’라는 구매 글을 올리며 오히려 상품권을 사들였다. 허니버터칩부터 포켓몬빵, 먹태깡, 두바이 초콜릿, 크보빵까지 식품업계 ‘품귀템’도 바통을 터치하며 부지런히 올라온다.
부동산과 자동차 직거래도 활발하다. 당근 앱 부동산 매물 건수는 2021년 5243건, 2022년 14만 719건, 2023년 34만 1172건, 2024년 65만 3588건으로 껑충 뛰었다. 실거래 건수 역시 2021년 268건, 2022년 7094건, 2023년 2만 3178건, 2024년 5만 9451건으로 치솟았다. 인천의 한 부동산이 50억 원에 팔렸고, 부산 수영구의 10억 원 아파트도 당근에서 거래됐다.
현재 당근의 누적 가입자는 약 4300만 명으로 주간 방문자가 1400만 명에 육박한다. 고물가 시대에 ‘짠 소비’가 대세로 떠오르면서 당근 거래 규모는 계속 커지고 있다. 또한 ‘경험 소비’를 중시하는 MZ세대에게도 중고마켓은 필수다. 중고로 싸게 사서 먼저 경험해 보고, 구매한 물건이 더 이상 필요 없다면 팔아버리고 다른 필요한 물건을 사는 식이다. 이전 세대보다 환경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도 당근을 애용한다. 새로 만들어내는 것을 쓰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재사용하는 것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당근은 이렇게 ‘전 국민 중고 장터’로 자리매김했지만 시작은 의외로 동네 커뮤니티였다. 2015년 경기도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기업을 대상으로 한 물품 교환, 직거래 서비스 앱인 ‘판교장터’로 출발했다. 판교 기업 이메일을 인증해야 이용할 수 있었다. 입소문을 타고 주변 동네 주민들도 직거래가 가능하냐는 문의가 계속되자 ‘지역 기반 중고 거래 서비스’로 변경했다.
당근이 동네로 범위를 설정하게 한 장치는, 중고 거래에서 많이 발생하는 사기를 예방할 수 있어서 당근이 중고마켓 1위로 올라선 발판이 됐다. 또한 ‘동네 생활 플랫폼’으로 성장하는 발판도 됐다. 동네 질문, 동네 맛집, 분실·실종센터 등 다양한 게시판을 중심으로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고 있다. 순대 트럭이 어디에 있는지, 붕어빵 노점은 문을 열었는지, 놀이터에서 잃어버린 아이 옷을 발견한 사람이 있는지 동네 사람끼리만 알 만한 온갖 정보가 오간다. 지난해 동네생활 게시판에서는 3900만 건의 소통이 이뤄졌다.
이처럼 당근은 단순한 중고 거래 플랫폼을 넘어섰다. 우리 사회의 모습과 소비 트렌드를 보여주는 거울이자, 이웃 유대를 강화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물건 하나를 사고파는 과정에서 지역 사회가 연결되고, 트렌드의 변화가 즉각적으로 반영되며, 환경을 고려한 지속 가능한 소비 문화까지 확산하고 있다.
소비의 방식이 변하는 만큼, 사람들이 관계 맺는 방식도 바뀌고 있다. 당근이 보여주는 ‘이웃과의 따뜻한 거래’는 단순한 경제적 이득을 넘어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하나의 방법이 되고 있다. 앞으로 당근이 또 어떤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지 지켜보게 된다.
2025-03-31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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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동생은 그날 이후 수시로 문자를 보냈다. 일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가도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며 휴대폰을 열어보면 시시각각 뒤집고 또 뒤집히는 뉴스에 불안하고 화가 난다고 했다. 언니야, 법이 왜 이래. 검찰은 또 왜 그래. 헌재는 믿을 수 있나. 그런데 언론은 왜 이러지. 그 때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혼란은 정리될 것이라고, 상식적인 결론이 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계엄의 밤에 모두의 일상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이른 송년회를 하다가 맨몸으로 국회의사당 앞에 달려간 사람들이 있었고, 누군가는 속옷과 양말을 챙겨 하루아침에 계엄사 통제 대상이 된 직장으로 야밤 출근을 했다. 넉 달 가까이 지났지만 혼란은 끝나지 않았다. 그사이 여객기가 추락하고 산불이 무섭게 번지고 있다. 일상은 회복되지 않고 국민들의 마음도 재난이 됐다.
대통령 탄핵심판 변론이 종결된 지도 한 달이 넘었다. 최종변론에서 국회 측 한 변호사는 시인과 촌장의 노래 ‘풍경’을 인용했다. ‘세상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라는 가사처럼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사전에서 ‘제자리’는 ① 본래 있던 자리 ② 위치의 변화가 없는 같은 자리 ③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라는 뜻이다. 본래 있던 자리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가 반드시 같지는 않다. 하나가 원상 복귀라면 다른 하나는 옳고 바르다는 판단이 개입된다. 각각 사실과 당위의 영역이다.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자리는 당연히 저마다 다르다. 여기에서 갈등이 생긴다.
탄핵심판은 비상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이 계속 대통령직에 있는 것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가 맞는지 살피고 그 결과 복귀 여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제자리 찾기’라고 할 만하다. 탄핵을 찬성하는 쪽은 국민을 상대로 계엄을 선포하는 대통령은 더 이상 대통령직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 파면만이 이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는다. 반대하는 쪽은 복귀가 마땅하다고 확신한다. 계엄은 대통령의 통치행위이자 거대 야당의 횡포에 맞선 대국민 호소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노래 ‘풍경’ 속의 제자리는 이상향에 가까운 것 같다. 음악평론가 김작가는 이 노래가 실린 1986년작 음반 ‘푸른돛/사랑일기’를 소개하면서 가수가 이 앨범을 낼 당시 줄담배와 위스키에 기댈 만큼 행복하지 않았고, 동화 같은 단어와 밝고 차분한 멜로디 밑에는 괴로움이 깔려있다고 썼다. “가사의 행간에는 지금은 없는 희망에 대한 갈망이 숨어있다”는 글에 비춰보면 ‘제자리’를 ‘지금은 없는 희망’에 대입해볼 수 있겠다.
헌재의 결정이 지연되는 동안 갈등은 더욱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탄핵심판 선고 자체보다 선고 이후가 더 중요하다. 어쩌면 더 큰 혼란이 닥칠 수도 있다. 결과가 어떻든 누구도 계엄이 선포되기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은 거꾸로 우리 사회의 다음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꺼내놓고 논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 지금은 없는 희망이라도,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광장에는 이미 목소리들이 넘치게 모였다. 제각각의 시민들이 대통령 한 사람의 퇴장을 넘어 그동안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한 각 분야의 개혁 의제들을 외친다. 이른바 ‘사회대개혁’이다. 물론 음모론을 불씨로 차별와 혐오를 부추기는 세력들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차별과 혐오가 제자리일 수는 없다. 그렇지 않다면 8년 만에 반복된 탄핵에서, 어떤 계절보다도 길었던 지난 겨울에서 하나도 배운 것이 없게 된다.
영화 ‘콘클라베’는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 ‘콘클라베’ 이야기다. 콘클라베는 추기경 108명이 바티칸 시스티나성당에 갇힌 채 3분의 2 이상 득표자가 나올 때까지 투표를 계속하는 방식이다. 영화에서는 두 번의 연설이 투표에 파동을 일으킨다.
콘클라베 전날 선거 단장인 로렌스 추기경은 “하느님이 준 가장 큰 선물은 다양성이고, 의심 없는 확신은 통합과 관용의 적”이라고 강변한다. 두 번째는 마지막날,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베니테스 추기경이 하는 연설이다. 그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테러를 두고 “종교전쟁”을 말하는 테데스코 추기경에 맞서 “편을 가르는 대신 모든 남자와 여자를 대변해야 한다”고, “교회는 권력이 아니라 우리가 다음에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 교황청은 굴뚝 위에 흰 연기를 피워올린다. 새 교황이 선출되었다는 의미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헌법재판소의 문이 열리기를, 이제는 흰 연기가 피어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늦더라도 결국에는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신호가 되기를, 모두가 일상을 되찾고 다음에 해야 할 일로 나아가게 되기를 소망한다.
2025-03-26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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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남자들은 왜 친구가 없을까
광역전철 동해선과 지하철을 이용해 출퇴근한다. 며칠 전 집에 가다 동해선 전동열차 안에 붙은 광고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2025년 모두 음주하세요’라니?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아니었다. 울주군에 오라는 뜻으로 ‘울주하세요’라고 쓴 광고 문구를 ‘음주하세요’로 오독했던 것이다. 이거 혹시 알코올 중독 초기 증세가 아닐까.
요즘 세상이 좋아 AI가 알코올 중독을 자가진단하는 ‘CAGE 테스트’라는 게 있다고 알려 준다. 아주 간단하다. 첫째, 술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둘째, 다른 사람이 술 마시는 것을 비판하면 짜증이 난다. 셋째, 술 마신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 적이 있다. 넷째, 해장술을 마신 적이 있다. 이 중 2개 이상 해당하면 알코올 의존 가능성이 높다. 넷 다 해당하면…. 아이고!
온갖 인간 군상을 만나게 되는 곳이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이다. 요즘 들어 특히 자주 만나는 부류가 있다. 정치 관련 유튜브를 크게 틀어 놓는 분들이다. 세상 듣기 싫은 이야기를 억지로 들어야 하니 불쾌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한마디 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가방 속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는다. 이런 일로 뭐라고 하면 그건 남자들 사이에서 ‘우리 싸우자’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공공장소에서 소리를 크게 틀어 놓고 듣는 사람은 대부분 나이 지긋한 남성들이다. 그분들에게 친구가 있을지 궁금해진다. 늘 혼자라서 남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자신에게도 슬픈 일이지만 다른 이와의 관계에서도 해가 된다.
요즘 출판계는 여성이 다 먹여 살리고 있다. 교보문고가 집계한 ‘2024년 연간 도서 판매 및 베스트셀러 분석’을 보면 전체 도서 구입자의 비중에서 여성이 62%로 남성(38%)을 압도한다. 북콘서트에 가 봐도 여성이 대부분이다. 남자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퇴직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나이 든 남자들은 대체 뭘 하고 지내는지 알고 싶어졌다. 먼저 불길한 자료들이 눈에 띈다. 우리나라 알코올 중독자는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많다. 2022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에 따르면 알코올 중독자는 남성이 76%로 10명 중 8명을 차지한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나이 들어도 친구나 이웃과의 교류가 활발해 잘 살 수 있다. 어머니가 노인대학을 열심히 나갈 때였다. 아버지도 한두 번 따라갔지만 여자들만 많다고 불평하며(아버지, 그게 어때서요?) 이내 그만두었다. 나도 그렇지만 남성은 여성에 비해 감정 표현에 서툴다. 심지어 길을 물어보는 것까지 망설일 정도로 도와 달라는 소리도 잘 못 한다.
2023년 고독사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고독사 사망자 중 남성이 84.1%를 차지한다. 같은 해 성별 자살률도 남성이 여성보다 2.3배 높았다. 특히 80세 이상에서는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보다 3.9배 높게 나타났다. 여성보다 남성이 사회적 관계망이 허약하고 고립에 더 취약하니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올해 초 국내에 출간된 영국의 코미디언 맥스 디킨스가 쓴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는 꼭 내 이야기 같았다.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도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몇 년 전 나를 많이 사랑해 준 친구가 일찍 세상을 떠나며 더 이상 ‘절친’이라 부를 친구가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새삼 슬퍼진다. 얼마 전에는 직장에서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겨 고립된 적도 있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이 책에서 저자는 남자끼리의 인간관계는 더 남자다운 이가 다른 이의 머리 위를 점하는 위계적 질서라고 설명한다. 남자다움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돈을 더 잘 벌어야 하고, 성(性)적 행위를 더 욕망해야 하며,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도 상대방을 뛰어넘어야 한다. 성격은 쿨하고 호탕해야 하며, 삶에서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야 한다. 이외의 방식은 남성적이지 못한 것으로 치부하고, 특히 자기 감정의 솔직한 고백은 철저히 금기시된다는 것이다.
남자들끼리의 경쟁에서 밀려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될까. 젊은 남성들은 온라인상에서 반페미니스트적 남성계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여성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며 피해망상을 심화해 간다. 중년 남성들은 음주와 우울의 늪에 허덕이다 떠밀리듯 생을 등진다는 것이다. 영국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 같다.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어르신들의 심리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책을 누가 볼까 싶지만, 검색해 보니 부산 시내 웬만한 도서관에서는 대부분 대출 중이라 빌려보기가 어렵다. 설마하니 남자들이 이런 책을 열심히 보는 것일까. 혹시 남편의 책상 위에 살짝 올려두기 위해 여성들이 빌려 간 것은 아닐까.
박종호 스포츠라이프부 선임기자 nleader@busan.com
2025-03-2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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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북항, 춘래불사춘 퇴치법
부산에게 부산항은 무엇인가?
부산과 부산항을 향한 근원적 물음이다. 이런 질문에 이르게 된 과정은 대략 이렇다.
부산항 없이 부산이라는 도시의 근현대사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데, 부산에는 왜 변변한 부산항박물관 하나 없을까. 2007년 기본계획 고시부터 거의 20년이 다 돼 가는 북항 재개발지역은 왜 허허벌판일까. 부산역 뒤 충장로의 어지럽고 울퉁불퉁한 도로는 도대체 언제 깔끔하게 정비될까.
2020년 이후 5년 만에 다시 이 분야 취재를 맡은 기자는 바뀌지 않는 부산항을 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다 근본적 의문에 이르렀다. ‘왜 이렇게 안 바뀌나.’
북항 재개발 1단계 사업은 2022년 연말 기반시설 조성 공사가 마무리됐다. 분양 대상 부지와 도로, 공원 등이 완성됐고, 친수공원도 부분 개방했다. 탁 트인 바다와 거대한 부산항대교를 부산역 바로 앞에서 조망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며 시민들은 달라질 북항의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그 시점부터 북항 재개발사업은 거의 중단 상태다. 감사원 감사와 검찰 조사가 이어지면서 사업 시행 주체인 부산항만공사(BPA)가 잔뜩 움츠러든 것이다. BPA 내부에서는 재개발 담당 부서가 최대 기피 부서라는 얘기도 들린다. 감사·수사에 따른 징계가 이어진 이후, 이 업무를 맡는 BPA 직원 입장에선 최대한 방어적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BPA도 감사 대상 기관이기에 법규에 따라야 한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다. 위법한 사례가 있다면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국내에선 전례 없는 최초의 항만재개발사업을, 민간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접목한 공기업이 담당한다는 점을 감사원이 얼마나 반영했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는 최대한 자율을 부여했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만으로 특혜와 불법의 올가미를 덧씌운 것 아닌가 곱씹어볼 일이다.
감사 이후 BPA는 땅을 분양받은 기업들에게 감사원 지적 그대로 ‘애초 사업계획대로 속히 착공하라’는 요구만 앵무새처럼 되뇌지만, 기업들은 거의 한목소리로 ‘10년 전 보름 만에 후닥닥 만든 사업계획안대로 무조건 착공을 독촉하는 것이 과연 사리에 맞느냐’고 하소연한다. 분양부지에 대한 소유권 이전이 안 된 상태라 재산권 행사가 불가능하다는 점도 착공을 미루게 하는 요소라는 지적도 나온다.
민간 부문이 투자를 하려면 공공이 마중물을 부어야 한다. 그럼에도 애초 해양수산부와 BPA, 부산시 등 관련 기관과 공기업들이 북항을 채우겠다고 약속한 공공 콘텐츠는 기약이 없었다. 겨우 북항마리나만 문을 열어 수영장과 다이빙풀을 운영 중일 뿐, 오페라하우스는 여전히 공사 중이고, 단일 부지로 가장 넓은 랜드마크 부지는 아직도 주인을 찾지 못한 상태다. 중앙역부터 북항을 관통하는 트램 계획도 아직 계획에 멈춰 있다. 부산항박물관, 연안유람선터미널 부산항역사관 등도 마찬가지다. 땅만 만들었을 뿐, 시민 발길을 끌어들일 공공 콘텐츠와 인프라를 조성해야 할 공공의 의무는 소홀히 하면서 만만한 민간 기업만 옥죄는 형국이다. 지난해까지 범정부 역량을 모아 희망을 걸었던 2030월드엑스포 유치가 무산되면서 엑스포 무대로 삼으려던 북항의 그림자는 더 짙어졌다.
최근 콘텐츠를 개편한 북항 재개발 홍보관을 찾은 날은 초봄답지 않게 바람이 차가웠다.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는 옛말이 떠올랐다. 한낮 북항 일대는 겨울과 봄 사이 변덕과 혼돈 속에서도 평온했다.
더디긴 해도 BPA는 북항 공공 콘텐츠의 기능과 규모에 대한 용역을 올 상반기까지 마무리 짓고, 하반기부터는 각 시설에 대한 설계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용역 대상은 △IT영상지구 내 문화공원에 시민이 원하는 교양시설(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등)과 편의시설 설치 △연안여객터미널 리모델링 후 부산항기념관 조성 △유·도선장 적정성 검토 △북항마리나와 연계한 해양레포츠콤플렉스 조성 △재개발지역 내 교통체계 검토 및 개선안 마련 △현 BPA 부지 주변 연안유람선터미널 기본구상 수립 등이다.
내년이면 역사적인 부산항 개항 150주년이다.
오지 않는 봄을 마냥 기다릴 일이 아니다. 공공부문이 먼저 마중물을 신나게 부으면 활기는 살아난다. 때마침 북극항로니, 미국 해군함정 MRO(유지 보수 정비)·신조 추진이니 등 기대를 갖게 하는 소식이 잇달아 들린다. 한국 산업화의 견인차였던 부산과 부산항의 다가올 150년을 위해서라도, 과거와는 다른 열정과 추진력이 필요한 시기다.
2025-03-1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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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우리도, 그들도 애국자"
어느 대통령의 마지막 대국민 담화다.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가 처한 위기는 전혀 새로울 게 없습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은 우리가 건국 이래 최악으로 분열됐고, 그로 인해 위기에 취약해졌다는 것입니다. 사회 곳곳에서 진영 간 극한 투쟁으로 적색 경보가 울리고 있습니다. 누구의 잘못이 아닌 우리의 잘못입니다. 저 또한 문제의 일부임을 인정합니다. 변화가, 대담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민주주의는 황혼처럼 저물어 갈 것입니다. 오늘 서로에게 약속 하나 합시다. 우리끼리 벼룩 잡는다고 초가삼간 다 태우지 말고, 조금이라도 공동의 선을 찾기 위해 매일 노력하자는 약속 말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민주주의를 구할 수 없지만, 신뢰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면 그 또한 민주주의를 구하기 어렵습니다. 다음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우리 미래가 달린 일입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을 눈앞에 둔 윤석열 대통령이 이 메세지를 전하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12·3 비상계엄’ 이후 극한으로 갈라진 국민들에게 조금이나마 안심과 위로를 주지 않았을까 싶지만, 아쉽게도 ‘홈랜드’라는 한 미국 드라마의 대사를 조금 각색한 것이다. 극 중 대통령은 가진 권한을 총동원해 음모론과 가짜 뉴스로 정권을 흔드는 반대파들을 응징하려 하지만, 결국 보복의 악순환만 부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국민 통합을 호소하며 ‘하야’한다.
반면 현실의 대통령은 ‘야당 경고용’이라며 계엄이라는 엄청난 칼을 휘둘렀지만, 헌재 선고가 임박한 지금 이 순간에도 권좌로의 복귀를 기대하는 모습이다. 탄핵에 찬성하는 절반 이상의 국민들은 “계엄에 실패한 대통령이 다시 군 통수권을 행사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어이없어 하다 못해 공포감을 호소하고, 광장의 결집 이후 지지율 상승과 ‘석방’이라는 반전을 본 탄핵 반대 진영은 “이제 곧 대통령이 용산으로 돌아가 못다 한 종북좌파 척결을 끝낼 것”이라고 믿는다. 이 거대한 인식의 간극을 메울 방법이, 아니 두 진영의 공존 자체가 가능한 것인지 암울한 의문이 커지는 요즘이다. 양측이 뿜어내는 증오와 적의의 에너지는 한 궤도에서 마주 달리는 열차처럼 맹렬하고 무모해 보인다. 우리 민주주의 또한 중대한 위기 국면이고, 변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현 시점에서 충돌의 압력을 낮추기 위해 가장 긴요한 건 ‘당사자’들의 결자해지 의지다. 여야에서 최근 앞다퉈 요구하듯이 윤 대통령은 ‘파면’ 결정이 나더라도 승복할 것임을 분명하게 천명해야 한다. 만에 하나 탄핵이 기각되더라도 나머지 임기는 국정 운영보다는 조속한 개헌에 집중하겠다는 ‘최후 진술’을 다시 확약하는 것도 필요하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역할도 윤 대통령 못지 않다. ‘줄탄핵’과 ‘입법 독주’로 윤석열 정부를 내내 흔들었던 거대 야당의 무절제한 힘 자랑에 대한 자성과 변화를 약속한다면 보수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 거대 야당이 행정권력까지 손에 쥘 경우 어떤 ‘폭주’가 있을지 우려하는 많은 국민들에게 진정성 있는 답을 내놓은 것도 차기 권력을 꿈꾸는 이의 마땅한 자세일 터다.
둘로 쪼개진 광장의 시민들 또한 한 치의 접점이라도 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할 텐데, 그 출발점은 ‘사실(fact)’에 대한 존중이지 않을까. 일례로 ‘중국 간첩 99명 체포’와 같이 명백하게 허위로 드러난 가짜 뉴스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선을 긋는다면 좋은 시작이 될 수 있겠다.
내전이 운위되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 참으로 한가하고 공허한 얘기로 들린다는 걸 잘 안다. 그런데 달리 다른 방법이 있을까. 스스로가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의 피해자인 〈미스빌리프〉(misbelief·잘못된 믿음)의 저자 댄 애리얼리 교수가 이를 신봉하는 이들을 깊숙이 접촉하고 연구하면서 도달한 결론은 상대한 대한 조롱과 무시보다는 이해와 공감하려는 노력이었다.
며칠 뒤 우리 사회는 한 차례 큰 소요를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광기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양 진영 모두 숨을 고르고 이성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할 테다. 대통령이 복귀해서, 반대로 야당이 집권해서 ‘반대 세력’을 다 쓸어버리면 평화의 시간이 올까?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얘기다. 2008년 미 대선 당시 공화당 존 매케인 후보는 상대인 민주당 오바마 후보를 ‘아랍인’이라고 공격하는 지지층을 향해 “그는 훌륭한 미국인이다. 나와 정책에 대한 이견이 있을 뿐”이라고 자제시켰다. 그런 최소한의 존중과 절제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변화다. 사실 계엄 이후 핏대 세우면서 논쟁하고, 길거리까지 나선 우리 모두 결국 나라 잘 되기 위해 나선 애국자들 아닌가.
2025-03-17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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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도자기가게 코끼리를 우짤꼬?
독일 속담에 ‘도자기상점에 들어간 코끼리’라는 말이 있다. 덩치 큰 야생코끼리가 귀한 상품들이 가득 진열된 도자기상점에 들어가 돌아다닌다. 코끼리가 움직일 때마다 부딪쳐 도자기들이 부서진다.
2기 행정부를 시작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요즘 행보가 저 속담 속 주인공 같다. 취임 전부터 떠들썩했고 취임 후 전세계 곳곳에 대놓고 트집을 잡고 있다. “그린란드·파나마운하·캐나다를 미국땅으로 편입해야 한다” “멕시코만은 미국만으로 바꾸겠다” 등 발언이 거침이 없다. 여기까지는 한국에 큰 영향이 없다. 하지만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관세 카드’는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에 직격탄이다.
미국 정부는 12일부터 한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의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25%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다음 달엔 한국 주력 수출품인 자동차에 관세를 물릴 방침이다.
이 같은 미국의 으름장은 어느 정도 약발이 받는 모양이다. 백악관은 지난 10일 보도자료를 통해 “기업들이 관세로 인한 타격을 줄이기 위해 미국 시장으로의 진출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며 대표적인 사례로 삼성전자와 현대차, LG전자를 다국적 기업 10여 곳과 함께 언급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고, 현대차의 경우 조지아주의 전기차 공장인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가 지난해부터 시운전에 들어갔고 이달 말 준공식을 가질 예정이다.
기업들은 이 같은 현지화를 통해 미 정부와의 충돌을 피하고 역내 점유율을 유지하거나 확대할 수 있게 됐다. 미국 정부로서도 자국의 무역적자와 함께 미국 내 실업률를 낮추는 일석이조 효과를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노믹스의 통상정책은 무역적자 개선이 최우선 목표”라고 했다. 2023년 기준 중국의 대미수출 규모는 4272억 달러로, 미국의 대중 수출규모 1478억 달러의 3배에 달한다. 트럼프 통상정책의 주된 관심대상 국가는 중국과 멕시코, 베트남에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 미국의 한국 무역적자는 514억 달러 규모로 중국의 5분의 1 수준이다.
관세를 피해 미국 내 현지공장을 짓는 게 과연 정답일까. 지난해 미국 출장 중에 간 식당에서 경험한 물가는 한국의 2~3배 수준이었다. 통계치로 나온 미국 평균임금도 한국의 배가량 된다. 동남아나 남미 등 인건비가 싼 곳과 비교하면 더 큰 차이가 난다.
인건비가 싼 지역 대신 미국 내에서 제품이 만들어진다면 가격은 수입 제품보다 더 높아질 수 있다. 미국 국민들은 상대적으로 비싼 미국산 TV나 자동차를 사게 된다. 이로 인해 소극적인 구매로 이어져 결국 경기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게 경제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그렇게 해서 최근 생겨난 신조어가 ‘트럼프 리세션’(경기후퇴)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불을 댕긴 관세 전쟁이 제 발등을 찍어 상대국은 물론 미국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는 부메랑이 될 것이란 얘기다.
실제 미국 경제성장률을 실시간으로 추정하는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의 지디피나우(GDPnow)는 지난 6일(현지 시간) 올해 1분기 미국 경제성장률을 -2.4%(전기 대비 연율 기준)로 제시했다. 지난 2년여 동안 나홀로 성장을 이어온 미국 경제가 트럼프의 관세·이민 정책으로 후퇴할 것이란 우려가 커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경기 침체 전망에도 “큰일에는 과도기가 있다”며 다음 달 2일부터 미국의 모든 무역 상대국에 상호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될 경우 올해 한국경제 성장률은 최대 0.62%포인트 하락하고, 한국경제의 ‘성장엔진’인 제조업 위축으로 관련 산업 부진과 양질의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의 대응 카드는 없을까. 벌써 캐나다와 중국 같은 대국들은 미국을 겨냥해 보복관세를 부과하겠다며 맞불작전을 펴고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에선 아직 그런 얘기가 없다. 자동차, 반도체 등을 수출하는 국내 그룹 총수들은 트럼프 대통령 아들, 실세 등에 줄대기 바쁜 모습이다. 미국 내 한국 기업의 대관 담당 인력도 보강하고 있다. 맞대응 해봐야 손해만 더 커진다며 피해 최소화 분위기다.
최근 국방, 조선, 반도체, 한류 등으로 국격이 높아지면서 전 세계인이 한국인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번 사태를 보면 한국은 아직도 올라갈 ‘산’이 많아 보였다.
2025-03-1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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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멸종 위기의 도시' 부산과 해운대신도시
저출산 현상의 고착화로 학령 인구 감소가 사회 문제로 떠오른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부산을 대표하는 신도시로, 주거와 교육 여건이 좋기로 알려진 해운대신도시(해운대 그린시티) 내에 있는 몇몇 초등학교가 가까운 미래에 통폐합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저출산과 청년 유출로 인한 학령 인구 감소는 원도심과 서부산 지역에 국한된 문제로 여겨졌지만, 부산의 전통적인 주거 선호 지역인 신도시 지역에도 엄습하고 있어서다.
해운대신도시는 1990년대 말 개발이 완료된 부산 최초의 계획도시다. 노태우 정부 시절 주택 부족 해결을 위해 ‘주택 200만 호 건설’을 목표로 전국적으로 추진된 1기 신도시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좌1~4동 4개 동을 아우르는 타원형 시가지에 아파트 단지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하며, 입주 초기 신혼부부 등 젊은 층이 대거 유입됐고, 우수한 학군과 편리한 생활 여건 등으로 주거 지역으로 인기가 높았다. 그랬던 해운대신도시에서 인접한 초등학교 2곳의 올 신학기 1학년 학급 수가 각각 3~4개 반에 불과하다고 한다. 앞으로 입학생 수는 더욱 줄어들 것으로 예상돼 두 학교 통폐합의 카운트다운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해운대신도시 내 또 다른 초등학교는 올해 1학년 학급 편제가 2개 반에 불과하다고 한다. 지역 맘카페에서도 해운대신도시 내 초등학교 1호 통폐합이 머지않았다는 건 이미 통설이다.
올해 폐교 대상 초등학교는 전국 38곳. 이 중 대부분이 도농복합지역이지만, 대도시(특별·광역시) 중에는 부산 2곳과 대구 1곳이 포함됐다. 부산은 원도심인 부산진구의 초등학교 2곳이 폐교하고 인근 학교로 통폐합됐다. 학교 통폐합 대상이 될 수 있는 부산 지역 소규모 학교(학생 수 240명 이하)는 매년 늘고 있고 있는데, 부산의 전통 주거 선호 지역이었던 해운대신도시도 이제 ‘남의 일이 아닌 일’이 된 셈이다.
기자가 10여 년 전 잠시 신혼 생활을 했던 해운대신도시는 잘 닦인 방사형 도로망과 근거리 다양한 상업 시설로 젊은 층이 매우 살기 좋은 곳이었다. 학원가가 잘 형성돼 있고, 유치원과 어린이집도 곳곳에 있어 교육과 양육 환경 역시 만족스러웠다. 지금은 여차저차한 이유로 이사를 나왔지만, 아직도 해운대신도시에 살고 있는 지인들의 얘기는 그때와 사뭇 다르다. 한 지인은 “집값은 10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고, 오래된 아파트에 입주민 고령화도 심각하다”며 주변의 누구누구처럼 빨리 탈출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넋두리를 늘어 놓는다.
그나마 남아 있던 해운대신도시의 청년들은 수도권으로 떠났고, 부산의 다른 지역에 재정착을 하더라도 마린시티와 센텀시티를 비롯해 해운대구청 인근 상업 지역에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는 아파트로 옮겨 가면서 해운대신도시의 쇠락은 가속화되고 있다.
얼마 전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 세계 숱한 대도시 중 부산을 ‘멸종 위기의 도시’로 콕 집어 걱정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FT는 ‘멸종 위기:한국 제2의 도시, 인구 재앙을 우려하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1995∼2023년 60만 명의 인구가 감소한 제2의 도시 부산에 대해 저출생과 고령화 등으로 소멸 위기에 직면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서울 중심의 극심한 경제 집중 현상을 지목했다. 한때 부촌의 명성을 지녔던 해운대신도시의 쇠퇴는 FT가 지목한 부산의 위기가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해서 씁쓸하다.
부흥의 기회는 있다. 최근 정부는 해운대신도시 인근 53사단 부지의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부대를 재배치하기로 했다. 부산시는 그린벨트가 해제된 이곳에 첨단산업단지 개발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시는 첨단 연구단지와 스타트업 기업, 녹지공간 등이 어우러진 해운대 첨단사이언스파크를 조성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청년 인구를 유입시키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러한 계획이 현실화된다면 직주근접성을 갖춘 해운대신도시는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다. 올해 정부가 지방을 대상으로 노후계획도시특별법 대상지를 선정하는데, 해운대신도시가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또 다른 기회다. 재건축이 급물살을 타면 청년층의 탈출 러시를 수그러뜨릴 수 있다.
하지만 청사진만 번듯하게 그려놓고 실현이 지지부진한, 그런 희망 고문만 계속돼서는 안 된다. 인구가 소멸하는 부산의 위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너무나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멸종 위기의 도시’라는 오명을 씻어내고 인구 소멸을 막기 위해 정부와 부산시는 이들 역점 사업을 하루빨리 실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금 당장 지체 없이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야 한다.
이대성 사회부 차장 nmaker@busan.com
2025-03-1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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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가벼운 입은 반자본주의
말 그대로 ‘카오스’다. 해양산업 동향을 나타내는 통계들을 들여다보거나, 관련 산업계 인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숫자와 말들 속에 깊은 불안감이 느껴질 때가 많다. 조선 관련 분야에선 오히려 기대감이 느껴진다. 분야별로 희비가 교차하고 있는 해양산업은 미국 트럼프 정부가 몰고 온 혼돈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지난달 말 글로벌 해상운송 항로 운임을 나타내는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1515.29을 기록했다. 1월 초 2505.17에서 연속 7주 하락했다. 14개월여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SCFI는 세계 15개 노선의 운임을 종합해 계산한 지수로, 수치가 뚝뚝 떨어진다는 것은 운송비가 그만큼 싸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옮길 물동량이 없어졌으니, 해운회사들이 가격을 낮추고 있다는 뜻이다. 해운 회사의 불안감과 세계 경기의 둔화가 떨어지는 숫자에서 읽힌다.
해상운임의 하락은 계절적 요인으로 설명되지만, 빠른 속도의 추락은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당연히 트럼프 정부의 영향이 크다. 트럼프는 캐나다, 멕시코, 중국을 넘어 유럽까지 전 세계와 관세 전쟁을 벌일 기세이다. 가뜩이나 경기 둔화가 우려되는데, 관세 전쟁 예고는 둔화를 침체로 바꾸었다. 관세의 실질적인 영향은 하반기에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은 공포스럽기도 하다.
반면 조선업은 요즘 매우 ‘핫’하다. 트럼프가 직접 ‘K조선’에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고, 동맹국에서도 미국 군함 건조할 수 있는 법안이 추진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트럼프가 중국 선박에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는 발표로 반사이익 이슈도 있다. 이런 기류가 모여 조선업만큼은 트럼프 수혜주가 되었다.
사실 최근까지 조선업은 상당한 호황기였기 때문에, 곧 경기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이 흐름을 트럼프 효과가 막은 셈이다. 다만 트럼프의 말과 약속에 기반한 기대가 정말 어느 정도 현실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뱉은 말에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힘은 막강하지만, 말은 매우 가볍다는 걸 지구인이라면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트럼프는 기존의 정치인들은 상상하기 힘든 극단적인 주장과 요구를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더욱이 직관적이면서 단순하게 쉽게 말한다. 상상하기 힘든 요구를 단순화해 힘 있게 주장하니, 상대는 주눅이 들기 쉽다. 그러다 갑자기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이런 행보를 두고 ‘광인전략’이라고도 한다. 고도의 계산된 행동이든, 원래 그런 캐릭터이든, 트럼프는 미치광이처럼 상대국에 겁을 주며, 세계 경제를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다. 캐나다, 멕시코를 상대로 한 관세 논란을 되짚어 보자. 중과세하겠다고 했다가, 직전에 유예했다가, 또 부과한다고 했다가, 다시 합의점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관세를 부과하겠다며 제시한 10%, 25%, 50% 등의 수치는 면밀한 검토와 계산을 거친 것은 아닐 것이다. 숫자들은 논리적 결과가 아니라, 과세의 무서움을 보여주기 수단에 불과하다. 논리적으로 꼭 필요했던 과세가 아니었으니, 쉽게 주장하고 접을 수도 있는 것이다. 종잡을 수 없는 트럼프의 이런 행보를 동맹 관계도 뛰어넘는 극단적 국익 우선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말이 가벼우면 신뢰를 잃기 마련이다. 화폐는 사실 신뢰의 산물이다. 소라 껍데기든, 종이 조각이든 어떤 물건에 특정한 가치를 주기로 약속을 하면서, 화폐가 생기고 경제가 시작됐다. 경제 구조가 고도화되면서, 신뢰의 가치는 더욱 커졌다. 안정적인 경제 기반에 대한 믿음이 생겨야, 기업과 정부들이 안심하고 투자를 이어갈 수 있다.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시장이 믿음을 줄 때 개별 경제 주체들의 잠재력이 극대화된다는 건 자본주의 역사에서 입증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는 자본주의를 퇴보시키고 있다. 관세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 논리적이지 못한 정책으로 글로벌 시장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 것이 본질적인 해악이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가 혁신을 하고 미래를 준비하겠는가. 본질적인 성장은 멀어지고 하루하루 버티기 바쁜 허약한 자본주의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결국 국내 조선업도 위태로워지고, 미국 국민도 궁핍해진다. 당장 중과세로 수입품이 비싸지면, 미국 기업과 국민에도 타격이다. 사실상 과세는 수입품을 사는 자국민이 대신 내는 세금과 비슷하다. 국익 우선주의라고 부르기 힘든 정책이다.
트럼프 1기때에도 초기 광폭행보가 요란했지만, 대체로 곧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금의 트럼프는 더 ‘반자본주의’ 인물이 된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지만, 부디 그가 진짜 광인은 아니기를 바란다.
김백상 경제부 차장 k103@busan.com
2025-03-05 [18:12]